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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노마드 Oct 03. 2022

[Prologue] 신혼 살림살이 정리하기

끝이 없는 중고거래 지옥과 세 번의 이사


여행을 결심한 뒤 가장 먼저 할 일은
집안 살림살이 정리


지난 생활의 흔적을 갈무리하는 것은 다가올 여행을 준비하는 것보다 성가시고 머리 아픈 일이었다.

2년도 안 된 새것 같은 가전, 몇 날 며칠을 고민해서 고른 가구들, 잡다구레한 주방 살림과 너절한 옷가지들까지.


그때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 집에 들였으나 살면서는 그 존재를 잊고 있던 물건들이 많았다. 결연하게 여행 결정을 내리고 나서야 그 물건들은 한꺼번에 튀어나와 '나는 어떻게 할 건데?' 하며 옆구리를 찔러대는 것 같았다.



제일 큰 짐 덩어리는 가전이었다.


부모님 집에 얹혀살던 나와 풀옵션 오피스텔에 살던 남편이 같이 살자니 가전제품은 전부 새로 살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그때 우리는 ’이왕이면 좀 더 보태~' 병에 걸려 고급스러운 마감과 최신 기술이 들어간 가전들로 집안을 꽉꽉 채워나갔다.

그러나 매해 새 상품이 출시되는 가전 시장에서 우리의 신혼가전은 겨우 반값을 받는 구 모델이 돼버렸다. 중고 시세를 알아봐도 신혼살림으로 동고동락한 정(?) 때문인 지, 여전히 영롱하면서 제 몫을 톡톡히 해내는 가전을 헐값에 치워버리는 짓은 할 수가 없었다.


이 고민은 양가 가족과 친척들한테 까지 소문이 났다. 어머니는 당신들의 안방을 비워서라도 가전을 맡아주실 기세였지만 큰 짐을 드리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다행히 작은 이모가 집에 오래된 가전을 바꿀 때가 되었다며 세탁기, 건조기, 스타일러 등등을 찜하셨다. 친정집 가전도 다시 보니 일부 낡은 것이 있어 TV와 냉장고는 나의 본가에 가는 걸로 정해졌다.




큰 살림의 주인을 정하고 나니 그다음 가구들은 좀 더 수월했다.


TV에 맞는 거실장은 TV와 함께 친정집으로, 소파와 침대, 책상과 책장은 중고거래 앱으로, 옷장 정리용 행거는 다음 세입자에게 넘기기로 했다. 내가 아끼던 세라믹 식탁과 그릇장은 나중에라도 다시 쓰고 싶어 친정집에 '임시 보관'을 부탁드렸다.



이 외 캠핑장비와 지하 창고방의 취미용품, 자잘한 주방 살림들도 골칫거리였으나 엄마와 외가 친척분들이 외할머니가 계신 시골집 근처에 맡길 만한 공간을 구해주셔서 고민 없이 이곳에 두고 가기로 했다.

시골 창고. 환기도 잘 되고 장마철에도 곰팡이가 없어 안심했다



이삿날에 임박해서는

버리자니 아깝고 보관하기엔 애매한

잡화류, 생활용품, 전자기기를 처분했다.


남편과 나는 하루에 4~5개씩 중고거래 앱으로 물건을 팔아치웠다. 초반에는 물건 하나 올리는 데에도 시간이 많이 들었다. 절박해 보이면 가격을 후려치기 당하고 너무 쿨 해 보이면 불친절한 판매자처럼 보이기 때문에 조금은 도도하면서 말이 통하는 사람인 척, 적절한 사진과 설명을 곁들였다.


거래 건수가 많아질수록 내공이 쌓였다. 아무리 포장을 잘해도 안 팔릴 것 같은 물건은 파격적으로 가격을 낮추거나 무료 나눔을 하면 금방 거래됐다.


무료 나눔을 원하는 사람 대부분은 거래 약속을 잡을 땐 친절하고 신속하게 응답했지만 막상 거래날이 되면 제시간에 만나기가 어려웠다. 무책임한 공짜 헌터에게 몇 번 데인 뒤 나는 거래 어플 닉네임에 약속을 지켜달라고 절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절규하는 프로필은 효과가 있었다


그렇게 뻔질나게 거래를 해서 번 돈은 우리가 투자한 시간과 에너지에 비하면 작고 귀여웠다. 사실 돈 벌 생각보다 자원 낭비를 막는 게 더 큰 목적이었는데 이렇게 진이 빠지고 인류애가 줄어드는 일인 줄 알았다면 그냥 ‘아름다운 가게’에 보내버리는 게 나았을까 싶기도 하다.


끝이 안 보이던 중고거래는 이삿날 아침, 짐 빼느라 어수선한 분위기 속 철제 빨래 바구니 거래를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스파르타 이사 주간

이사는 총 세 번, 일주일에 걸쳐 진행됐다

첫날은 시골집으로 캠핑 장비와 에어컨, 주방 잡동사니를 보냈다. 아직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 아니라서 남편과 같이 내려가 이삿짐을 정리했다. 뙤약볕 속 시골집에서 중노동을 마치고 올라왔는데 이제 집에 에어컨이 없으니 편히 쉴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날은 동네 모텔에서 1박을 했다.

시골로 간 짐들. 둘이 사는 데 뭐가 그리 많이 필요했을까


이틀 뒤엔 엄마의 집에 TV, 냉장고, 내 최애 가구들과 옷상자를 보냈다. 오롯이 내 짐을 받아주기 위해 온 집안이 정리되고 비워졌다. 친오빠는 외국 생활 중 잠깐 쉬러 들어왔을 뿐인데 본의 아니게 힘쓰는 일에 계속 동원되어 고맙고도 다행이었다.

내 생활에 필요한 살림 대부분이 갔기 때문에 나도 짐짝처럼 실려가 출국일까지 지내기로 했다. 남편도 남편의 짐과 함께 시댁으로 실려가면서 우리는 처음으로 별거를 하게 됐다 (ㅎㅎ)


그다음 날에는 이모네 집에 대형 가전들이 옮겨갔고, 또 며칠 뒤 다음 세입자에게 가스레인지, 옷장 등등을 넘기고 나서야 우리의 짐 정리 미션이 마무리됐다.


이때의 한 여름 땡볕 더위와 정신없던 이삿짐 테트리스는 다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녹초가 될 것 같다.

선풍기 한대...그렇게 녹초가 된다




이건 아직 쓸 만하고
저건 다시 구하기 힘드니까


짐 정리를 시작할 때부터 마지막 짐을 빼는 날까지도 물건을 버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살 때는 사야 할 이유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고 쉽게 쉽게 샀는데 정작 버려야 할 때에는 버리지 못할 여러 가지 사연을 갖다 붙이게 된다.


결국 이삿날 당일이 되면 쓰레기통으로 버려질 걸 알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잠재적 쓰레기들을 붙들고 감상에 젖고 싶었던 걸까? 사는 것보다 버리는 게 4배는 어려웠다.


그러고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 남겨둔 나머지 짐들. 이 미련 덩어리들을 보관한다고 가족, 친척 여러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총 다섯 집(혹은 그 이상)에 우리 살림살이가 값도 안 치르고 기약 없이 얹혀살고 있다. '가족 찬스'라는 표현을 이럴 때 써야지 않나? 이렇게 볼륨이 큰 가족 찬스를 쓸 수 있는 것도 흔치 않은 복이다.


우리 힘으로 여행 갈 거라고 큰소리치며 판을 벌렸으나 결국 둘만의 힘으론 절대 엄두도 못 냈을 일. 두 젊은이의 대책 없는 도전을 이렇게 열정적으로 응원받았다는 생각에 또 여행의 의지를 다지게 된다.



과정은 지옥 같았지만 살림살이를 정리하며 배운 점도 많다. 버려야 할 물건을 집어 들 때마다 앞으로의 소비 생활에 대해 여러 다짐을 했다.

싼 값에 충동적으로 허접한 물건을 사며 즐거워하지 않을 것

안 입는 옷과 안 쓰는 살림은 주기적으로 점검하며 비워낼 것

그리고 가능한 친환경적으로 처분해 볼 것

다음에 비슷한 상황이 생기면 중고거래 앱보다 아름다운가게를 잘 활용해 볼 것


여행 시작도 전에 여행 이후를 다짐하는 게 우습지만 여행 중인 지금도 저 결심을 곱씹게 되는 때가 있다. 짐을 줄이고 줄여 왔어도 버릴 짐이 생기는 걸 보면 우리가 사는 데 꼭 필요한 물건이 배낭 몇 개를 넘지 않는가 보다.


물론 미니멀리스트가 될 자신은 없다. 아무 짐도 안 나와있는 집안 모습은 인간미가 없달까. 그래도 모든 여행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간다면 적어도 잘 버릴 줄 아는 맥시멀리스트는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중고거래와 세 번의 이사가 가르쳐 준 이 값진 교훈을 잘 간직해야겠다.







-------------이삿집 정리의 추억-----------



잠깐 자취하다 본가 들어갈 때 이사해주신 아저씨한테 또 연락 드렸다. 하필 손 없는 날이라 일손이 부족해 사모님과 아드님이 같이 와주셨다.


남편의 공구박스 정리. 만나서 반가웠는데 다신 보지 말자...


마지막 짐댕이 차 마저도 아주버님과 직거래했다
팔려고 내놓은 철봉에 세탁소 아저씨가 세탁물을 걸어두고 갔다. 마지막까지 아낌없이 주고 간 철봉 친구
나의 최애 식탁과 최애 강아지가 함께 지내는 중이다. 보고싶은 최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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