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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캘리 Feb 17. 2021

서른이 넘어,  인어공주를 다시 읽었다

그리고 놓쳐버린 문장을 발견했다.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답니다.



  보통의 동화들은 이런 결말이 대부분인데 반해, 동화 속 인어공주는 행복은커녕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며 끝난다. 어릴 적 엄마가 읽어준 <인어공주>의 결말을 듣고 다시는 읽어달라고 조르지 않았다. 당연하게 행복을 말하는 여느 동화들과 다르게 주인공이 물거품으로 사라진다니. 구태여 슬픔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결말을 듣자마자 책을 서둘러 다른 동화책을 읽었다. 불쑥 사라져 버린 인어공주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함이었다. 어수룩한 저녁, 잠자리 누워 무방비 상태 맞이한 인어공주의 마지막감은 것처럼 감감해더욱 슬펐다.



"엄마, 인어공주는 어떻게 된 거야? 물거품이 뭔데?"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거야."



 끝나기 무섭게,  엄마 목소리를 따라 머릿속으로 열심히 그리고 있었던 인어공주가 사라졌다. 누가 불이라도 끈 것처럼 덩그러니 까만 밤만 남았다. 물거품이 된다는 말은 영원히 불 꺼진 방에 남겨지는 일 같은 것이 아닐까, 어렴풋이 이해했다.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꺼진 인어공주가 슬퍼, 다시는 이 동화를 읽지 않았다. 얼마 전 그녀가 내게 이 말을 건네기 전까지는….



"멀리서 걸어오는 모습이 꼭 인어공주 같아요."



  걸어오는 내 모습이 인어공주 같다니 대체 무슨 말일까.


서른이 넘어서 <인어공주>를 다시 읽은 것은 순전히 그녀의 말 때문이었다. 절름발이라 한쪽으로 치우친 나의 걸음이 어색하다는 말일까? 그 당시 나에게 인어공주의 의미는 슬픔이라 '걸어오는 모습이 슬퍼요'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사는 내내 온갖 별명이 나의 이름을 대신했다. 좋게 말해 별명이고 쉬이 내뱉는 모진 말들과 날 선 시선에 하루에 수십 번씩 마음이 고꾸라졌다. 무엇으로도 감출 수 않는 아킬레스 건을 혹처럼 달고 살면서, 다리가 저린 것과 마음이 저린 것은 짝꿍처럼 붙어 다닌다는 사실도 알았다.


지금껏 이름을 대신했던 많던 것들은 모두 상처였는데, 이상하게도 인어공주라는 은 싫지 않았다. 어떤 의미인지 아무것도 묻지 않았으므로 이유도 듣지 못 했지만, 그냥 '고맙다'라고 해도 될 것 같아 '그렇게 봐줘서 고맙다'고만 했다. 돌이켜 보면 아마도 그것은 그때 당시 그녀의 눈에 담긴 온기 덕분이었으리라.


집에 와 가만히 그 말을 건네던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 그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오래도록 읽지 않았던 인어공주 이야기를 다시 읽었다. 누군가의 마음을 읽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애써 덮어두었던 것을 다시 펼치고, 혹시 놓친 문장은 없었는지 되짚어보는 일. 그 말을 건넬 때의 표정, 말투, 눈빛을 바탕으로 내게 건넸던 그 문장을 곱씹으며 알 수 없는 애틋함이 전해졌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내내 '슬픔'으로 읽히던 인어공주의 의미가 변하는 듯했다.


  문득 무턱대고 덮어버린 동화책처럼 사는 동안 '슬픔'이라는 로 뭉뚱그려버린 순간이 또 있지 않을까, 궁금해졌다. 


꼭꼭 닫아둔 마음 한복판을 저벅저벅 걸어, 수없이 지나친 삶의 문장들을 되돌아보았다. 스스로 오역했던 순간은 없는지, 제대로 읽어보자고 결심하며 마음속 외딴 방을 들여다보았다. 그동안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해묵은 이야기를 꺼냈다. 곱씹을 때마다 입안 가득 모래처럼 꺼끌거리던 아킬레스 건에 대한 이야기를….  






  용기 내서 쓴 글이 쌓이던 어느 날, 그녀가 내게 물었다.



"혹시 제가 당신에 대한 글을 써도 될까요?"

"저에 대한 글이요? 제 이름이 들어간 글을 쓴다고요?"

"아니요, 인어공주…."



  어떤 글을 쓸지 몰라 선뜻 대답하지 못했지만 순수한 마음을 담아 나를 위한 시를 쓰고 싶다는 말에, 마음은 이미 긍정하고 있었다. 그 후 시간이 지나 그녀가 쓴 시를 브런치에서 읽게 되었다. 처음 그녀가 나에게 '인어공주 같다'라고 했을 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 마음을 온기로 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나의 인어공주
/ yuriana


당신은
투명한 에메랄드 빛 바다를 누비는
아름다운 인어공주

당신의 세계에서
쓰인 글들은
바다처럼 깊어 헤어 나올 수 없고
긴 여운을 남긴다

인간세상이 궁금해
잠시 육지로 나온 인어공주

꼬리 대신 얻은 어색한 다리가
조금 더뎌 시선을 받아도
조금 느리게 조금 천천히

누구보다 강한 모습으로
당당하게 나아가지

(후략)



  단 한 번도 나의 아킬레스 건을 이렇게 해석해 준 사람이 없었다.


바깥세상이 궁금해 남들보다 일찍 태어난 칠삭둥이로 얻은 뇌성마비는 태생부터 잘못 끼운 첫 단추처럼 읽혔다.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외계에서 온 이상한 사람 보듯 했다. 가던 길 멈추고 나의 어색한 걸음을 대놓고 구경하던 경우도 많았다. 그중 멋모르는 꼬마 아이가 '엄마, 저 누나 걷는 거 이상해!'라고 소리칠 때도 있었는데, 아이 엄마는 '불쌍한 사람한테 그러는 거 아니다'는 말로 나를 불쌍하고 가엾게 만들었다.


함부로 받는 동정은 온기도 없는 빈 껍데기 같아서 걷는 내내 발에 차이기만 했다.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무사히 집으로 되돌아올 때까지, 섣부른 동정의 눈빛과 무언의 날카로운 시선에 수도 없이 베어 몇 번씩 마음에 갑옷을 둘러도, 귀가할 즈음이면 너덜너덜해질 때가 많았다. 말로는 괜찮다고 했지만 사실은 괜찮지 않은 날이  많아, 아무도 없는 곳에서 습관처럼 울었다.     


  다음 날이면 또 바깥세상에 나갔다. 사람 때문에 죽을 만큼 아팠는데도 사람이 좋았다. 나를 울게 하는 것도 웃게 하는 것도 사람이라 끊을 수가 없었다. 바깥세상이 궁금해 열 달도 못 채우고 나온 칠삭둥이인데 오죽할까. 어쩔 수 없는 천성이라 받아들이며 걷고 또 걸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걸었다. 걷고 또 걷다 보면, 이런 나를 모두 이해해 줄 친구를 만나게 거라고 믿었다. 그 누가 아무리 손가락질해도 나의 걸음은, 평생 걸을 수 없다던 의사 선생님의 말도 뒤엎고 이뤄낸 기적이었으로 사막에서도 살다보면 또 다시 기적을 만나지 않을까 싶었다.


게는 대단한 기적도 '보통'으로 읽히는 삶에서, 그녀의 시가 내 상처 위에 연고처럼 내려앉았다. 눅눅한 슬픔인 줄만 알았던 아킬레스 건도 자랑이 될 때가 있었다.





물거품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을 위해 기꺼이 낸 용기였다.




  덮어두고 '슬픔'이라고 이해했던 물거품의 의미가 변했다. 어릴 적 내가 놓쳐버린 문장을 읽으면서 그때는 미처 몰랐던 행간의 의미를 깨쳤다.


인어공주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한 것을 위해 자기의 소중한 것을 기꺼이 내려놓은 '용기'였다. 그러고 보니 굽이치는 파도에는 언제나 물거품이 인다. 푸른빛을 내는 물살을 자세히 보니 물거품에 덮여 하얗게 부서진다. 평생 잠들지 않는 파도 위로 일렁이는 것을 보면 물거품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유로이 헤엄칠 수 있는 자유를 벗어나, 뭍으로 와서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위해 기꺼이 낸 용기였다. 누군가는 무모하다 해도, 인어공주는 제 스스로 사랑하는 것을 쟁취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영영 사라지지 않는 물거품이 된 해피엔딩이었다.


  덮어두었던 책을 다시 읽는다는 것. 지나온 삶을 되짚어 본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이미 끝을 봐 버린, 결말이 정해진 이야기라도 시선을 돌리면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 무심코 지나친 삶의 크고 작은 골짜기마다 숨은 보석 같은 의미를 되찾고, 헐값에 치른 내 소중한 삶을 다시금 가치 있게 바라보게 되는 일이다.


나는 책을 빌리지 않고 무조건 사서 읽는다. 완독하고 나서도 버리지 않고 책장에 꽂아둔다. 어느 날 문득 말을 걸어온 문장 하나가 나의 지난 시간들을 다시 빛나게 해 줄지도 모르는 일이므로. 어떤 날 갑자기 다른 의미로 읽힐 그 순간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내 생애 여러 순간들을 잊지 않고 고스란히 담아둔다.


즐거운 기억이든 아픈 기억이든, 그 무엇도 버리지 않고 마음의 책장에 꽂아둔 덕분에 오늘도 내 지난 삶의 한 페이지를 되돌아보며 비록 느린 걸음이지만, 여기까지 잘 걸어왔다고 다독이며 잠들 수 있을 것 같은 밤이다.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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