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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캘리 May 24. 2021

내 행복의 꼭짓점, 가족

저기 내 행복이 우뚝 서 있다


  내 나이 열네 살, 도덕 수업시간이었던가. 당시 50년 후의 나의 모습을 그리라는 말에 빈칸에 주저 없이 천사를 그렸다.


60을 넘겼으면 오래도 살았지, 그만 살고 날개 달고 하늘나라로 가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 뒤로 한동안 나의 먼 미래는 늘 예순이 기점이었다. 생과 이별해도 아쉽지 않을 것 같은 나이다 싶을 만큼 그 나이는 나중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부모님의 나이가 그 기점을 향해 가고 있다. 아빠는 작년에 환갑을 맞이했고 엄마는 내년이면 환갑을 맞는다.


  쏜살 같이 흐른 시간이 정말 순식간이다. 당시 나에게 60은 세상 부족할 것 없이 다 겪고도 넘치는 나이였는데, 가까이서 지켜보니 꼭 그렇지도 않다. 살아온 경험치와 별개로 잠잠한 호수에 돌 던지듯 곳곳에 별일이 도사리는 곳이 삶이라 나잇값으로도 미래를 점칠 수 없음을 알았다. 간혹 비 오기 전부터 신이 쑤시는 일처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직감과 촉이 다가올 불행을 예방할 때도 있지만, 대개 모든 일들은 도둑이 는 것처럼 예고도 없이 찾아와 어른이 되어도 인생은 늘 낯선 것이 당연해 보인다.





내 나이 서른넷, 60을 기점으로 겨우 반을 막 넘어서고 있는 지금. 다시 60이라는 숫자를 가만히 곱씹어 보니 그 나이가 그멀거나 많은 나이로 느껴지지도 않는다. 엄마는 여전히 봄만 되면 라일락 꽃 향기를 맡으며 소녀처럼 웃는 얼굴로 오래전 추억을 바로 어젯일처럼 말하고, 아빠가 매일 저녁 반려견과 친구처럼 장난치며 노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소년이 따로 없다. 누구나 꼬부랑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는 줄만 알았던 그 60은 지금 내 눈에는 너무도 청춘이다.


  60 평생을 살면 손에 굳은살이 배기는 일처럼 마음도 초연 해지는 무엇이 있는 줄 알았는데, 여전히 소녀다움과 소년스러움을 간직한 부모님을 보니 마음은 시간과 반비례하는 듯하다. 해마다 불어나는 나잇값과 별개로 마음은 언제고 청춘으로 회귀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그때는 몰랐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중학교에 진학하고 중학교를 졸업하면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일처럼 나이도 시간이 가면 당연히 진급하는 학년 같은 것으로 이해했다. 초등학교 때는 사칙연산을 익히고 중학교 때는 함수를 배우는 일처럼 어른이 되면 무엇이든 척척 해낼 수 있는 머리가 생기는 줄 알았다. 그러다 문득 어른이 된다는 것은 '머리'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엉덩이'에 힘이 생기는 일이 아닐까 생각했다.




  한결같이 우뚝 서서 제자리를 지키는 나무처럼 자기만의 영역을 만들거나 가족을 꾸리면서 '자기 자리'를 만들고 터를 잡은 그 자리에서 스스로 지켜야 할 것들을 위해 가만히 버티는 것. 그렇게 나와 함께 살아가는 상대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앉은자리를 굳건히 하는 것이 진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저마다 자신의 울타리를 만들고 가정을 꾸리면서 지켜야 할 것들을 온전히 지켜내기 위해 어른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순식간에 철없는 어린 시절로 회귀할 수 있는 마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매 순간 수없이 인내하고 희생하고 절제하며 자기 울타리 안에 있는 대상을 위해 기꺼이 땀과 정성을 쏟는 일이야 말로 어른이 되었다는 뜻 이리라.


  학창 시절 내가 좋아하던 준비물 중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단연 컴퍼스였다. 수학적인 머리는 젬병이지만 문제의 답을 구하는 일과는 별개로 컴퍼스만 있으면 언제든지 동그란 '원'을 그릴 수 있다는 사실에 홀딱 마음을 뺏겼다. 


갑자기 컴퍼스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나에게 가족이 삶의 꼭짓점이자 나를 둥글게 감싸 안아 지켜주는 원 같았기 때문이다. 어릴 적 나에게 동그라미만큼 매력적인 것은 없었다. 고백건대 열네 살 그 무렵, 천사를 그려 넣은 또 다른 이유는 천사 머리 위에 달린 동그란 링을 동경해서였다. 매일이 코너에 몰려 사각 링 안에 갇힌 것 같은 일상이라 더 그랬다.





  어릴  내 주변 세상은 온통 사각형 투성이었다. 칠삭둥이 미숙아로 태어나 뇌성마비를 앓으며 병실 안에서 처음 마주한 창틀 밖 세상도 사각, 하루 세 번 꼬박 근육이완 주사를 가지고 드나드는 문도 사각, 휠체어가 없이는 걷지 못해 주린 건지 배가 고파 그런 건지 알 수 없는 허기가 들 때마다 눈앞에 놓이는 배식판도 사각…. 온통 사각형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자꾸 귀퉁이로 밀리는 듯해 툭하면 마음이 쿡쿡 쑤셨다. 여섯 살 무렵, 기적처럼 걷게 되었는데도 여전히 깍두기 신세를 면치 못할 때. 그리고 그 깍두기마저 네모라는 것을 알았을 때, 컴퍼스 하나면 거뜬히 원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에 모났던 마음까지 둥글어지는 듯했다.


컴퍼스를 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꼭짓점을 잘 찍는 일이었다. 원의 중심이 되는 꼭짓점을 찍어두고 흔들리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것. 삐뚤지 않게 그리겠다고 아귀에 힘을 주다가 종이에 구멍을 내는 일도 수두룩했다. 그래도 잘 그려진 원을 보면 유난히 기분이 좋았다. 어디 하나 모난 구석 없이 매끈한 것도, 어디든 맘껏 구를 수 있는 동그란 모양이라는 것마저도 좋았다.



  시간이 흘러도 시들지 않는 소년 소녀 같은 마음을 기꺼이 누르고 부모의 무게를 가만히 견디는 엄마와 아빠의 마음이, 컴퍼스의 꼭짓점과 닮았다.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스스로 터를 잡은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켜낼 수 있는 때를 맞이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부모가 된다는 것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아랑곳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켜내는 우직함으로 울타리 안에 함께 하는 제 식구들을 보호하는 일과 같은 것.


나잇값을 한다는 것은 비단 숫자에 책임을 지는 것만이 아닌,  지난 시간 동안 스스로 불려 온 자기의 울타리를 더욱 견고히 하고 그 안에 있는 나의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꼭짓점을 찍어두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번 뿌리내리면 자리를 떠날 줄 모르는 나무처럼 설혹 선 자리가 주체할 수 없이 흔들려 넘어진다 하여도 자기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늘 그 자리를 지키는 것.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언제나 제 자리에서 모자람 없는 사랑으로 마음에 든든한 양분을 주는 부모님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나에게 엄마 아빠라는 꼭짓점이 없었다면 나는 수없이 흔들리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지금'에 방점을 찍고 옛날을 추억하며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것조차 부모님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존재만으로도 든든하리만큼 제 자리를 지켜준 덕분에 나 역시 쉽사리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고, 가뭄 들듯한 뙤약볕에도 버석하게 메마른 마음이 아닐 수 있었음을. 결국 지금 내 손에 있는 이 모든 것이 내 소중한 가족 덕분이라는 사실 또 하나 배워간다.




손 닿을 가까운 곳
저기, 내 행복이 우뚝 서 있다









별스러운  

/ 담쟁이캘리




꺾어진 나무처럼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습관처럼 내뱉던 때가 있었다


희끄무레한 하늘 자욱한 안개에
구태여 고개 들고 살 이유가 있으랴


아래로 내리꽂는 시선 익숙해져
어스레하게 땅거미 진 어둑한 마음
내리 식구처럼 데리고 살았는데


가만 보니 행복은 별 거였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딴다는 말처럼
행복도 시선을 돌려 봐야 볼 수 있어
하늘의 별과 닮았으니
행복은 확실히 별 것이 맞았다


행복은 밤하늘의 별처럼 흩뿌려져
잘 보이는 날이 있는가 하면
날씨가 흐린 날은 아무리 찾아봐도
도통 눈에 띄지 않는 게 당연한 이치라


희끄무레한 마음이 걷히고
맑게 개인 마음일 때에야, 오롯이
빛나는 행복을 발견하는 것을 보니


행복도 밤하늘의 별처럼
시선을 돌려야 볼 수 있는
별 것이 맞았다






談담쟁이캘리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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