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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캘리 Sep 24. 2021

나에게 우호적인 것들

뒤집어라 엎어라 쫄려도 한 판


  어릴 적 친구들과 여럿이 모여 놀이를 시작하기 전에 늘 편부터 나눴다.


손바닥을 한 데 모아 뒤집거나 엎는 것으로 편을 가르는 것으로 무리를 짝지었다. 편을 가르는 이 단순한 것도 지역마다 구호가 다를 정도로 다양한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 동네에서는 ‘뒤집어라 엎어라 쫄려도 한 판’이었는데, 약식으로는 ‘뒤퍼 엎어 쫄려도 한 판’으로 통했다. 몸이 불편해 매번 깍두기 신세를 면치 못해서인지 ‘쫄려도 한 판’이라는 말이 참 좋았다. 놀이의 형국이 점쳐지더라도 무조건 한 편이라고 해주는 듯해서 묘한 안정감이 들었다.


놀이 내내 끈끈하게 뭉쳤던 무리가 흩어져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느꼈던 아쉬움의 크기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더 이상 놀 수 없다는 단순한 감정은 아니었다. 이기든지 지든지 상관없는 놀이를 끝내고 현실로 귀하면서 습관처럼 외로웠다. 인생은 성적순이 아니라고 하지만 삶에는 친선이 없었다. 고작 한 자리 숫자에 불과한 나이의 어린이가 뇌성마비라는 핸디캡의 무게를 이겨내고 불리한 출발을 뒤엎고 역전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쫄려도 한 판’으로 같은 편을 이루는 것이 좋았다. 조금 느리고 불편하더라도 무리 중에 그 부족함을 채워줄 이가 있으니 잠시나마 그 믿는 구석에 맡길 수 있어서 좋았다. 내게는 놀이가 고달픈 인생 중에 잠시 숨 고르는 쉬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행여 삐끗해서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해도 내 구멍을 메워주는 ‘나에게 우호적인 것들’이 좋았다.





  어릴 때는 이솝우화부터 안데르센까지 동화책을 달고 살았다. 동화 속에 등장하는 ‘마법에 걸린’ 왕자나 공주의 이야기처럼 나 역시 잠시 이상한 마법에 걸렸다고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삶은 동화가 아니었고 여전히 이상한 거울 속의 나를 마주하면서 핸디캡을 내 평생 데리고 살아야 할 존재로 받아들였다. 틈틈이 재활을 하면서 ‘너 정도면 불편한 것도 아니야.’라는 말을 들을 정도가 되었지만, 핸디캡의 굴레를 완전히 벗을 수는 없었다.


나의 과업이 온통 홀로서기에 꽂혀 있을 무렵, 버스 정류장처럼 내 삶에 머물다 간 인연들이 있었다. 그들과 마음을 나누면서 놀이보다 더 좋은 ‘나에게 우호적인 관계’가 있음을 알았다. 거울 속의 나는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데, 있는 모습 그대로 예뻐해 주는 따스한 눈빛에 잠깐이지만 마법이 풀리는듯한 황홀한 오해빠지기도 했다. 그중 누구도 내 핸디캡에 대해 묻지 않았고 오히려 ‘그게 뭐 어때서’라는 태도로 상관없다는듯 달려와 당혹스러웠던 은 언제나 나였다.


  난생처음 나의 엄마를 궁금하던 연인의 성화에 못 이겨 함께 만난 적 있다. 그 자리에서 엄마는 나의 연인에게 ‘고맙다’고 했다. 서로 좋아서 만나는데 고마울 것이 있나. 당시 그 말이 도무지 소화되지 않았다. 고맙다는 말은 누군가 베풀어 준 호의나 도움에 대하여 보답하는 표현인데…. 마치 정말 내가 ‘마법에 걸린’ 존재가 된 듯했다.


그때 알았다. 백마 탄 왕자나 마법을 풀어줄 키스를 꿈꾼 것은 보호자가 필요한 어릴 때나 해당되는 이야기라는 것을. 내가 바라는 건 밑 빠진 독을 잠시 막아줄 두꺼비고, ‘쫄려도 한 판’이라는 말처럼 믿는 구석이 있는 내 편을 얻는 것이었다.   





“우리 아들이랑은 좋은 친구처럼 만나고 결혼은 다른 남자랑 해.”



어느 여름날, 내 편이 되어주던 그 사람의 엄마를 만났고 만난 지 한 해가 지나서야 그에게 불치병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아들이 자리를 비운 틈에, 너도 몸이 아파서 잘 알겠지만 결혼은 멀쩡한 사람과 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이별을 종용했다. 직전의 연애와 데칼코마니처럼 닮아 있는 현실을 마주하면서 어찌할 도리가 없어 애꿎은 나를 탓했다.


그들은 본래 몸이 약했고 아팠던 것을 숨겨온 것뿐이었지만, 연이어 같은 이별 사유로 연애를 끝내며 혹시 나의 불운이 상대에게 깃드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다. ‘나 때문에 자꾸 쫄리는 형국’을 맞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 같은 것. 그 죄스러운 마음 때문인지 이후로 누군가 호감을 표현해도 답하지 못한 채 접어둔 마음만 쌓여갔다. 돌이켜 보면 내 잘못도 아니지만 그때는 그렇게 하는 것이 나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 같았다.  





  손바닥 뒤집기처럼 단순한 의식으로는 관계의 편을 나누고 짝을 짓는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쯤은 잘 안다.


언젠가 일찍이 결혼한 친구와 나란히 앉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동시에 나를 좋아한다는 것은 아주 동화 같은 일이라고 말한 적 있다. 생애 몇 번 일어나지 않는 기적 같은 일을 놓치지 않고 잘 잡아서 토끼 같은 자식들을 낳고 사는 모습을 보니 내가 다 흐뭇하다고.


  친구는 언제 봐도 나를 늘 예쁘다고 해준다. 너 자체로 괜찮고 걸릴 것이 없다고. 초등학생처럼 뛰어다니고 잡고 하면서 연애하는 것도 아니지 않냐며, 늘 빈칸으로 남겨둔 나의 연애를 응원한다. 그러니 더 이상 너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하는 말에 마음 잡히지 말고 네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하라고.       



  “너랑 몇 번을 만나도 불편하다고 생각한 적 없어.”



  네가 가진 불편함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보다는 분명 한 걸음 더 올라가야 하는 수고로움은 있겠지만, 가 잘 살고 있는 거 보면 주관적으로는 문제가 아니라는 말도 덧붙였다. 만나서 서로 알아가다 보면 평생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는 사람은 당연히 있을 거라고.


갑자기 묻지도 않은 이야기에 왜 이렇게까지 진심인 건지 웃으며 물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답이 돌아왔다.



  “난 네 편이니까. 네 곁에 남아 있는 사람들 모두 너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이야.”



  맞다, 누가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니고 인생은 짧다.


여태껏 남 눈치 보면서 피곤하게도 살았다. 앞으로는 내 편을 잘 가르고 그들에게 고맙다, 사랑한다 표현하며 살기에도 모자란 삶이다. 문득 엄마가 지난 나의 인연에게 왜 ‘고맙다’고 했는지 알 것다.


태생부터 불리한 출발선에 서야 했으므로.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성적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 ‘깍두기’로 있어주길 바라던 사람들로 가득 찬 고독한 삶이었으니. 그 척박한 틈바구니에서 내 편이 되어준 인연이 나타났다는 사실이 그저 고마울 수밖에.  


  돌이켜 보면 습관처럼 소외되던 삶 속에서도 나에게 우호적인 자세로 있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떤 이의 호의는 찰나로 그쳤고 또 어떤 이의 호의는 사시사철 계절이 바뀌고 켜켜이 쌓이는 시간만큼이나 무르익어, 눈빛만 봐도 영락없는 내 편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평생 그 어느 쪽에도 들지 못하고 '깍두기' 신세를 면치 못할 줄 알았는데, 그들과 함께 있을 때는 다행히도 마음이 두 발 쭉 뻗고 쉼을 얻는다.





예나 지금이나 그들은
내 고달픈 하루에 믿는 구석이다.









윤종신, <기댈게> 중에서 발췌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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