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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캘리 Sep 18. 2021

개나 소나 다 하는 일

그래서 꼭 해야 하는 일



  "오 양손잡이예요? 양손잡이는 머리 좋다던데."

  "저 머리 나빠요, 공부 못 했어요. 대신 일머리는 좋아요."



  마주 앉은 그가 연필은 오른손, 수저는 왼손으로 잡는 것을 보고 양손잡이는 머리가 좋다는 속설이 있지 않느냐고 묻자, 단칼에 아니라는 답이 돌아왔다. 자기 평가가 솔직한 것 같다는 말에 그는 원래 솔직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저 못하는 것을 못한다고 했을 뿐인데 자기 약점을 스스럼없이 놓는 태도 때문인지, 잘 알지도 못하는 그의 말에 신뢰가 갔다.


곧 있으면 서른이 되는 아홉수의 그는 다가올 삼십 대를 기대하고 있었다. 마흔 전까지 어떻게 살지에 대한 계획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면서 자신은 조기 은퇴를 꿈꾸는 파이어족과 비슷하다고 소개했다. 은퇴 후 하고 싶은 제2의 직업을 말하는 얼굴에서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본래 십 년 전에는 지금과 전혀 다른 일을 했지만, 그 시 동안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시간과 열정을 쏟아부은 덕분에 직업을 바꿀 수 있었다고 했다.


  그야말로 십 년 후를 목표로 마지막 이십 대와의 '굿바이'를 준비하고 있는 듯했다. 그에게 아홉수는 도움닫기 같았고 삼십 대는 원대한 목적지로 향하는 즐거운 모험처럼 보였다. 지난날 나에게 서른은 청춘으로부터 멀어지는 나이에 불과했는데… 일순간 내 지난 아홉수와 다르게 자신에게 못난 부분이 있음을 알면서도 주눅 들지 않고 도리어 희망찬 것을 보면서 과거의 나에게 미안해졌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말이 있다. 그 어느 시인이 지은 제목 때문에 스물다섯 꽃다운 청춘을 '반 오십'이라고 불렀다. 이십 대 중반을 지나 후반으로 기울 때 서른을 상상하면서 알 수 없는 절망과 설움을 미리 떠안았다. 잔치가 끝나기 전에 뭐라도 해야 한다는 조바심이 앞섰고 사회 초년생 때조차 '경력 없음'이라는 당연한 이력을 탓하며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경력을 쌓았을 때는 이력서에 고작 한 줄 추가했다며 더딘 걸음을 재촉했고 제자리걸음을 걷는 현실과 별개로 꼬박꼬박 먹는 나이에 줄곧 마음이 쭈글쭈글했다. 돌이켜 보면 지난날은 지금의 나보다 너무도 젊고 어린 봉오리 같은 시절이었건만 시야는 기울어진 시소처럼 불평불만에 온 힘을 실어, 눈앞의 행복은 보지도 못하고 허공에 띄워 보냈다.   


  행복은 종종 풍선 같아서 허공에 뜨면 잡기 어렵고 손에 쥐었을 때 온전히 누리지 않으면 바람 빠진 풍선처럼 홀쭉해져, 손에 꼭 쥔 행복마저 빈곤해지기도 했다. 특히 남들에게 나를 견주어 볼 때 더욱 그랬다. 남들의 행복은 빵빵하게 부푼 풍선 같은데 그에 반해 내 것은 보잘것없게만 보였다. 그때마다 내 형편을 탓했다. 보란 듯이 내세울 것 없는 경력, 이 나이 먹도록 제대로 이룬 것 하나 없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벌세웠다.


인생은 죄목처럼 누구의 잘잘못을 따질 수 없고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건만 이십 대 때는 나이의 끝자리를 따라 울적했고 조급했으며 실망스러웠다. 아홉수에 그 감정은 극에 달했고 소위 '계란 한 판'이라는 나이가 되었을 때, 이 작은 계란 같은 결실도 이루지 못한 나 자신이 미워졌다. 애초에 이렇다 할 잔치도 없었던 인생인데 서른을 기점으로 '잔치는 끝났다'는 말을 곱씹자니 청춘에 내리는 사형 선고 같기도 했다. 매스컴에 등장하는 젊은 스포츠 영웅이나 드라마 속 주인공이 내 나이 또래가 되어가도록 그저 먹고 자고 싸는 삶만 산 것 같아서 지난 시간이 개탄스럽기만 했다.   


좀 더 부지런했어야 했고 더 굶주려야 했고 더 많이 깨어있어야 했다고. 탓할 수 있는 것들을 몽땅 끌어와 죄목처럼 붙였다. 일벌백계하면 스스로 경각심이 생겨 더 빨리 달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모든 탓을 나에게 돌리고 나니 아이러니하게도 마음이 실형을 사느라 동력을 잃었다.



  살기 위해 먹고 자기 위해 싸면서 배를 불리고 잠에 드는 일조차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일거수일투족 모든 것을 트집 잡으면서 불현듯 반려견이 부러울 때도 있었다. 스스로 알아서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는 것을 두고 '아유 잘했다!' 시원스럽게 칭찬받는 삶이 부러웠다. 그리고 이내 나 자신이 애잔해졌다.


이력서에 적을 만한 경력이 없다고 해서 열심을 다하지 않은 건 아닌데….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이 같지 않을 수도 있고 운 좋게 좋아하는 것을 일찍 찾았어도 그것을 업으로 삼지 않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십 년의 긴 세월을 뒤로하고 전혀 다른 직업을 택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자책하기보다는 오히려 좋았다고 말하던 그의 말과 표정을 곱씹었다. 지나온 시절의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나라서, 그런데도 나는 나를 안아주기보다는 내치기 바빠서. 스스로를 외롭게 한 것에 대하여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는 무엇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장래가 유망한 것을 업으로 삼고 뒤돌지 않고 가야 하는 줄 알았다. 내 주위에는 일하지 않는 어른이 없었으므로 굶지 않기 위해서는 꼭 일을 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자기 밥값을 하는 것은 개나 소나 다 하는 당연한 일이었으므로. 나 역시 더 나은 경력을 쌓아 무엇이 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밥은 입맛에 따라먹거나 쉬이 걸렀고 아무런 고민 없이 살기 위해 매번 고민하느라 잠을 설쳤다. 대부분 내 태도는 조급했고 생각보다 별 볼일 없는 현재에 늘 불만족스러웠다.  

  

  그런데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깨달았다. 인생은 빨리 달리기가 아니고 마라톤이라는 것. 분명 알고 있었는데 자꾸 잊고서 빨리 달리지 못해 좌절한다. 개나 소나 다 하는 일은 '밥값'을 하는 것인 줄만 알았는데,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는 일이 먼저였다.


체력을 길러야 먼 길도 거뜬히 달릴 수 있고, 그 체력이 나오는 몸과 더부살이하는 마음도 잘 돌봐야 무사히 완주할 수 있으므로. 마음이 허기지는 일 없이 틈틈이 내가 나에게 긍정의 먹이를 주고 쓸데없는 고민으로 머리가 복잡할 때는 군말 없이 재우기도 하고, 속이 답답해 꽉 막힌 듯할 때는 바로 배출해 주면서 스스로를 잘 보살피는 것이 우선이었다.  



  인생이 마라톤이라는 것은 저마다 가는 속도가 다르고 결국은 속도가 아닌 완주의 싸움이라는 뜻이다. 청춘은 사전적으로 한창 젊고 건강한 나이를 의미하지만, 실제 청춘을 정의하는 나이는 없다. 사회적으로 말하는 적령기는 있지만, 제 시기에 그 구간에 들지 않았다고 해서 누가 뭐라 할 수는 없다. 인생을 사는 모두가 마라톤 레이스 위를 달리고 있는 것은 맞지만 피니시 라인은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 그 말은 즉 인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가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일 텐데, 나는 피니시 라인을 과거에 둔 사람처럼 굴었다. 그래서 빛나는 인생으로부터 멀어진다고만 생각했다. 함께 말을 나누던 처럼 피니시 라인을 도래할 미래에 두었다면, 상상 속 현실이 가까워지는 즐거운 시간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을 텐데….


아깝게 늙어가는 줄도 모르고 탓하고 지루해하기 바빴던 나의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다,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건만 연신 미워하느라 아껴주지 못한 내가 애틋해졌다. 좀 더 애정 어린 시선으로 봐주었다면 어땠을까. 이미 지나버린 시간에게 미안해졌던 어느 날 저녁 무렵, 아빠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딸, 연락 한 통도 없고 애정이 식었네."

"애정이 어제 피곤해서 일찍 잤어."



연락 한 통 없다며 애정이 식었다는 농담을 주고받다가 아빠의 마지막 말에 머릿속이 명료해졌다. 인생은 가끔 막다른 골목인 것 같다가도, 전혀 예상치도 못하게 쉽게 풀릴 때가 있다. 너무 무거울 것도 어려울 것도 없었다. 평생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었던 것을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개나 소나 다 하는, 그래서 꼭 해야 하는 일부터 다시 세우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차게 식어있던 나에 대한 애정의 불씨는 다시 살리면 그만이었다. 아빠와 나누던 그 말속에 답이 있었다.





애정이 깨워 얼른.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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