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담쟁이캘리 Sep 07. 2021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결국은 그치는 것들에 대하여

  

  예고에 없던 비가 내리던 날, 공모전에 또 떨어졌다. 왠지 좋은 결과가 있을 것 같았던 예감은 그저 예감에 그쳤다. 회사에는 급작스러운 결원이 생겼고 그 부재를 채우느라 속상한 마음을 달랠 새도 없이 업무에 매달렸다. 입맛이 돌지 않는다는 이유로 점심을 걸렀는데, 출근한 지 열두 시간이 꼬박 지나고 났을 때 배꼽시계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즈음 하던 일을 멈추고 집으로 향했다. 가뜩이나 무거운 몸이 내리는 비에 젖어 축 늘어지는 듯했다. 그 후로도 며칠간 별안간 구름이 끼거나 비를 뿌리는 일이 잦았고, 예고 없이 내린 비에 속절없이 젖어 몸도 마음도 덜 마른빨래처럼 눅눅해졌다.  


  내 꿈은 회사원이 아니었다. 여느 아이들이 그렇듯 장래희망을 손바닥 뒤집듯 바꿀 때도 단 한 번도 회사원을 꿈꾼 적은 없었다. 드라마 속 커리어 우먼을 보고 멋있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지만 그것은 똑 부러지고 당찬 성격의 캐릭터에 대한 동경이었다. 학창 시절 주변 어른들 대다수가 회사원으로 사는 것을 보면서 평범하게 살고 싶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어린 눈에는 회사원이 가장 보통의 직업으로 보였으므로 자연스럽게 장래희망에서 배제했다. 보다 더 창의적인 일을 하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작가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평생 손가락 빨아도 좋으니 원 없이 글만 써도 행복할 거라고 믿었다.


내 나이 열일곱, 고작 이팔청춘을 넘긴 직후의 나에게 교생 선생님이 그랬다. 그건 세상 물정 모르는 열일곱 소녀가 하는 말이고 스물일곱이 되면 달라질 거라고. 그 말이 맞았다. ‘세상은 낭만이 아니고 암만’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밥벌이가 우선이고, 배를 곯아도 괜찮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타오르는 열정도 지속할 수 있는 땔감이 없이는 불씨를 지필 수 없고 불을 지피지 못한 아궁이는 연기만 매서워 제대로 된 밥 한 끼도 짓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평범하게 살고 싶지 않았는데 어른이 되고 보니 평범하게 사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었다. 평범하게 산다는 것은 한쪽으로 기울거나 넘치는 일 없이 잔잔하다는 뜻인데,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인생이 어찌 예상 가능한 크기의 파도만 치랴. 돌이켜 보니 예측 불가능한 삶을 살면서 평범하게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만큼 철없는 소리가 없었다. 내내 공중을 떠다니듯 촐랑대던 마음이 현실을 마주했을 때, 절대 되고 싶지 않다던 회사원이 되었고 밥벌이를 위해 절필했다. 대신 글과 관련된 직업을 삼는 것으로 나 자신과 타협했다.


  이따금 글이 쓰고 싶어지기도 했으나, 온종일 쓸 단어들을 업무에 쏟고 나면 머릿속이 텅 비어 정작 내 이야기는 빈 말풍선으로 남았다. 습관처럼 비운 말풍선을 보며 ‘작가를 꿈꾸며 하고 싶었던 말들이 사라진 것’으로 단단히 착각했을 무렵, 나의 소속감과 존재가치는 모두 회사에 있었다. 그곳에서 불리는 직급이 나였고 그곳에서 해내는 업무가 하루의 보람이었다. 적어도, 퇴근 십분 전 회사에서 잘리기 전까지는 그랬다.    



  갑자기 두꺼비집을 내린 것처럼 눈앞이 캄캄해졌고, 순식간에 나의 소속감과 존재가치를 잃었다. 전 재산을 올인했다가 눈 깜짝할 새 파산한 듯했다. 그때 알았다. 회사가 주는 소속감은 한시적이고 그것이 나를 지탱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바닥을 치고 일어나면서 자생력을 키우겠노라 다짐했고 재취업을 준비하면서 어떤 외부 압력에도 꺼지지 않을 소속감을 만들겠다며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다시 쓰기 시작한 것이 글이었다. 그 우여곡절 끝에 돌아와 쓰는 글인데도, 종종 마음이 보송하지 못하고 내내 눅눅했다.   


가끔은 제대로 널지도 않고 대충 말린 것처럼 마음에서 쾌쾌한 냄새가 나는 듯했다. 괜찮지 않으면서 괜찮은 척 온종일 축축해진 마음을 뭉개고 앉아 있었다. 마음이 바깥 날씨를 따라 오락가락했다. 먼 길 돌아 다시 앉은 자리니 만큼 잘해보자며, 뜨겁게 달아오르던 열기는 간 데 없고 밤새 서늘해졌다. 밤낮으로 차갑다 뜨겁다 반복하며 일교차가 벌어질 때면, 내 마음의 온도도 따라서 오르락내리락했다.


글 쓰는 일에는 정년이 없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며 뭐든 다 해낼 것처럼 뜨거웠다가 재능이 있다면 진작 잘 풀렸어야 하지 않느냐며 애써 키운 자존감을 흥정하듯 깎았다. 장사치처럼 닥치는 대로 무턱대고 깎아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공치는 하루만 늘었다.


  퇴근길 저녁, 그칠 줄 알았던 빗줄기는 점점 더 거세졌다. 잠깐 내리고 말 거라던 일기예보와는 달리 장대비가 내렸다. 비바람까지 불어 우산 속으로 비가 들이쳤고 옷이며 신발까지 모조리 젖은 채로 버스에 올랐다. 버스 안의 승객들도 모두 나처럼 젖어 있었다. 물기 없이 보송하던 것들이 축축해진 상태로 버스에 몸을 싣고 달리는 중이었다.


창밖 풍경은 빗줄기에 가려 뿌옇게 흐렸고 빨강, 초록, 주황색 신호등마저 빗물에 번져 흐릿했다. 도로는 혼잡했고 앞서 간 차들의 후미 등으로 간신히 거리를 가늠하며 서행하고 있었다. 와이퍼를 켜도 차창에 흐르는 빗물은 닦이지 않았다. 전면 유리에 쉴 새 없이 주르륵 내리는 모양을 보니 말 못 한 속 이야기를 쏟아내도, 빗물에 씻겨 사라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마침 라디오에서는 전국 곳곳에 집중호우가 내릴 것으로 예상된다는 교통방송이 흘러나왔다. ‘집중호우’는 비교적 좁은 지역에 짧은 시간 동안 내리는 많은 양의 비를 뜻하는데, 그 말이 꼭 내 마음에 하는 말 같았다. 나 있는 그곳에 집중호우가 내릴 것쯤은 예상했으니 쏟아지는 중에는 그저 쏟아지는 것에 집중해도 된다는 허락처럼 들렸다. 너무 많이 쏟지 않을까, 혹여 쏟아낸 그것이 너무 많은 것들을 젖게 할까 걱정할 필요 없다고.


버스는 정류장을 지날 때마다 앞문으로 승객들을 태웠고, 뒷문으로 승객들을 쏟아냈다. 앞문으로 올라타는 이들도 뒷문으로 쏟아지는 이들도 모두 우산을 들고 있었지만, 비에 젖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아무리 우산을 챙겨 나와도 비에 젖을 수 있음을 알았다. 우산을 써도 안으로 들이치는 비를 막을 재간이 없고 장대비 쏟아지는 날에는 모두 젖거나 미끄러질 수도 있음을 각오하고 길을 나선다는 사실도 새삼 깨달았다. 젖을 것을 알면서도 빗길을 거니는 이유는 축축하고 찝찝한 것은 잠깐이고 이 시기가 지나면 자연히 마르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쏴아, 소리 내며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따라 마음의 소리를 쏟아냈다. 여전히 글을 쓰고 싶어 하는 마음이 욕심은 아닐까. 재능을 논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고, 나이 탓만 하며 주저앉기에는 너무 게으른 것 아닌가. 특별히 부지런하지도 않고 티가 나게 노력하지도 않고 어중간한 해서 장대비처럼 마음껏 쏟아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계획대로 되는 것이 하나 없다고 투덜대고 있지만 여태껏 살면서 계획대로 되었던 일이 얼마나 있나. 어떤 날은 알 수 없는 인생이라 좋았다가, 또 어떤 날은 도무지 예측이 안 되는 인생이라 사방이 미로 같다.


  갖은 노력 끝에 겨우 재취업했지만 '살아 있기만 하면 어떻게든 풀리게 되어 있다'는 말조차 거추장스러울 만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다는 것이 버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모두 때려치우고 브런치 작가를 목표로 제주도에 내려가겠다며 사직서를 냈을 때, 예기치 않게 직무 순환이 되었고 예상보다 빨리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계획대로 된 것 하나 없이도 원하는 바를 이뤘다. 퇴사를 유예하고 작가로서 발판을 마련하고 나가기로 마음먹고 새로운 직무도 익혔다. 그것도 글과는 전혀 상관없는 마감 업무를. 숫자 울렁증으로 일찌감치 수학을 포기했건만, 매달 말일마다 손익 예측을 하다 보면 사방이 숫자 밭이다.  잠시 방황도 했으나 이 직무는 겸업이고 평생 하고 싶은 일만 할 수는 없으니 다 괜찮다고 생각하며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와중에 틈틈이 퇴근 후에 글쓰기 소모임에서 쓴 글로 작은 문예지에서 등단하게 되면서 내 업무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글 쓰는 일은 우뇌의 역할이고 숫자를 다루는 것은 좌뇌의 역할이라 그런지 글과 관련된 업무를 볼 때보다 오히려 균형감 있게 느껴지도 했다. 생각하며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까 봐 나름 계획을 세우며 살았는데, 돌아보니 계획하며 살아도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태반이다. 그냥 물 흐르듯이 주어진 대로 열심히 살자 싶다가도, 마음이 역행할 때도 있다.


  얼마 전 만난 대학 동기는 내가 절필하고 회사원으로서 경력을 쌓을 동안에 대학원을 졸업했고 꾸준히 시나리오를 쓰더니 단편 영화로 상도 받았다. 줄곧 한 우물을 파는 동기를 보면서 자신감이 바닥을 치기도 했다. 어떤 분야에서 최고가 되려면 1만 시간의 훈련이 필요하다는데, 과연 퇴근 후에 할애하는 반쪽짜리 시간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을까 싶어서.



  그래도 나는 여전히 무언가 계속 쓰고 싶고, 글이 써지지 않는 날에도 빈 문서 앞에 앉아 깜빡이는 커서를 쳐다보다가 잠든다. 쓸 거리를 고민하다가 아무 소득 없이 잠드는 날조차 서글프게도 좋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은 쓰는 게 좋다니 참 벨도 없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무렵, 달리던 버스가 급정차했다. 내 몸은 관성대로 계속 움직였고 버스가 멈추는 와중에도 글에 대한 생각은 그치지 않았다.


  창밖에는 여전히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고 내 마음도 여전히 글을 향해 쏟아지는 중이었다.


뉴턴의 운동법칙 중 제1법칙, 관성의 법칙. 외부에서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모든 물체는 자기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힘을 뜻한다. 정지한 물체는 영원히 정지한 채로 있으려고 하며 운동하는 물체는 등속 직선운동을 계속하려고 하는 성질이 있다.


  관성의 법칙은 좋아하는 일을 하던 중에 외부의 힘이 가해졌을 때, 더 세게 나타나는 모양이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브레이크가 없는 자동차처럼 마냥 좋아서 멈출 수 없는 것인 줄 알았는그게 아니었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관성의 법칙처럼 불시에 달리던 것을 멈춰도, 해오던 것을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서 한다는 의미였다.



  곧 있으면 절기가 ‘백로(白露)’로 들어선다. 백로는 흰 이슬이라는 뜻으로 양력 9월 8일 무렵으로 가을이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시기다. 밤에 기온이 이슬점 이하로 내려가 풀잎이나 물체에 이슬이 맺히는데, 여기서 절기의 이름이 유래했단다. 이 무렵은 장마가 걷힌 후로 맑은 날씨가 계속되는데, 간혹 남쪽에서 불어오는 태풍과 해일로 곡식이 피해를 겪기도 한다고 했다.


내 마음도 ‘백로’처럼 맑은 날이 이어지다가 어느 날 갑자기 태풍과 해일이 불어와 또다시 밥벌이를 고민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지금 내 결론은 변함이 없다. 관성처럼 지금껏 해오던 것을 지속하는 것.


우산을 챙겨 나와도 젖을 수도 있는 것이 인생이고, 마구 쏟아지는 집중호우도 모두 지나갈 것들이라면. 엉뚱하게 자존감을 흥정하고 걱정을 가불 하는 일로 더 이상 하루를 공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듯이 축축해진 마음도 다시 뽀송하게 마를 순간은 언제고 반드시 올 것이므로. 미지의 것들은 그때 가서 치열하게 고민하기로 하고, 지금 눈앞에 닥친 호우시절부터 잘 보내기로 했다.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꽃은 피우는 것으로 결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향기를 뿜어내는 행위로서 존재하는 것들이라는 뜻 이리라.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에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그러므로 꽃 같은 너와 나 모두 결국은 그치고 마는, 어차피 지나갈 빗줄기에 부디 마음만은 젖지 않기를 바란다.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를 아는 사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