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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캘리 Feb 20. 2021

아빠의 칭찬은 묵음이다

이건 특급 칭찬이야!


  아빠의 칭찬은 묵음이다.


  칭찬을 들은 기억이 거의 없다. 아빠는 감정표현이 서툴고 말수가 적어 말의 대부분이 단답형이다. 가끔 아빠의 언어 사전에는 '응, 아니, 관계없다' 이 세 마디밖에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만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살 비비고 살지 않았다면, 평생 아빠를 칭찬에 인색한 사람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알면 사랑한다'라고 했던가. 한 공간에 어우러져 살면서 아빠의 칭찬은 소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발음되지 않는 소리를 알아채는 방법은 단 하나. 사전을 찾아보듯이 일상 곳곳에 숨은 마음을 찾아보는 수밖에 없다. 찾으면 보물을 손에 넣는 것이고, 못 찾으면 그 보물이 어떤 것인지 영영 알 길이 없는 '복불복' 같은 것.

  수많은 표현을 두고 굳이 '복불복'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아무리 가족이라도 서로 오해하는 일이 빈번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그랬다. 마음은 보이는 게 아니라 들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말없는 아빠를 칭찬에 인색한 사람으로 이해했다. 아빠는 말로 감정 표현하는 일이 드물었다. 대부분 내가 아빠의 칭찬을 목놓아 기다리다가 못 참고 '나 잘했지?'라고 물었다. 그러면 아빠는 그제야 '응'이라고 답했다. 아니 사실 대답도 듣기 힘들다. 보통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게 전부다. 그래서 아빠를 쭉 보고 있지 않으면 그 모습마저도 놓칠 때가 많았다.






  어릴 때는 아빠가 '말 먹는 저금통' 같기도 했다. 저금통을 채우고 나서야 배를 가르는 것처럼 아빠도 할 말들을 모았다가 배 가르듯 가려두었던 마음을 보여주려는 것은 아닐까. 내 나름대로 이해했다. 그렇게 노력했던 마음은 어느 날 예기치 못한 순간에 폭발했다. 열입곱 살 무렵,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그녀의 아빠가 칭찬을 아끼지 않고 건네는 모습을 보았다. 친구의 아빠는 그녀가 현관에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은 것부터 밥풀 하나 남기지 않고 밥그릇을 싹 비운 것까지 칭찬했다. 게다가 '집에 친구를 데려온 것을 보니 우리 딸이 학교에서 인기가 좋은가 보다'라는 말도 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칭찬할 셈인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생소한 광경이었다. 눈앞의 모습이 꼭 '그림의 떡' 같았다. 아주 먹음직스러운 떡인데, 나는 먹을 수 없고 친구는 그것을 매일 배불리 먹는다고 생각하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날 저녁 아빠는 이런  마음도 모르고 전화를 걸어 천진한 목소리로 물었다.



"딸, 아빠가 빵 사줄까?"
"맨날 빵이야, 안 먹을래."



  이 와중에 빵은 무슨. 아빠는 나에게 기분 좋은 일이 생기거나 축하할 일이 생기면 항상 빵을 사들고 왔다. 칭찬 대신 빵이라니 생일빵은 들어봤어도 칭찬빵은 처음이었다. 아빠는 일단 배부터 불려야 마음이 고픈 줄 모르는 거라고 말하려는 듯 모든 칭찬과 축하를 빵으로 대신했다. 맨 정신에는 부끄러운지 술기운을 빌려서 사 왔다. 분명히 안 먹는다고 했는데 빈 손으로 들어오는 법이 없었다. 내 기분이 어떤지도 모르고, 우리 딸이 좋아하는 빵 사 왔으니 먹고 싶어 질 때 먹으라며 책상 위에 서너 개씩 올려두었다.  



"안 먹는다니까 똑같은 빵을 몇 개나 산 거야?"
"너 많이 먹으라고. 이거 봐, 오만 원어치나 샀어."
"부엌 식탁에 두면 되지, 왜 내 방까지 가져와?"
"오빠가 뺏어 먹을까 봐 너 많이 먹으라고."



  아빠의 칭찬은 묵음이었다. 묵음은 단지 소리 나지 않을 뿐 없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아빠는 나를 칭찬할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친구에게 부러움을 느끼게 만드는 아빠한테 뿔이 났다. 분명 아까그랬는데 책상 위에 놓인 빵을 보니 마음이 누그러졌다. 내가 좋아하는 빵을 사서 집까지 들고 왔을 모습을 상상하니 심통 났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아빠도 표현 좀 해. 말 안 하면 어떻게 알아?" 



아무리 가족이라도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고. 말을 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우리 딸이 얼마나 똑똑한데, 말 안 해도 다 알지!"



나 하나도 안 똑똑한데. 말하지 않아서 홀로 마음껏 오해했는데아빠는 그것도 모르고 너털웃음만 지었다.






  예나 지금이나 아빠의 칭찬은 묵음이다. 아빠가 칭찬 대신 사 들고 온 빵조차도 아무 말이 없다. 입이 있어도 말 못 하는 아빠와 입이 없어 말 못 하는 빵을 보니 아빠의 얼굴에서 빵이 보이고, 빵에서는 아빠의 얼굴이 아른거리는 듯하다. 이 빵 하나에 뿔났던 마음이 누그러지는 것을 보면, 아빠의 애정표현에 소리는 없어도 온기가 있나 보다.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서 말과 소리로 들어야만 알 수 있는 것인 줄만 알았는데, 마음을 눈으로 읽기도 하나 보다. 아빠의 마음을 읽기 위해 시작한 '복불복' 보물 찾기가 복으로 끝나 천만다행이다.

  아빠의 마음을 헤아리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가만 보면 일상 속에 숨겨진 소중한 것들은 대부분 아빠의 칭찬처럼 묵음이다. 고단했던 어제를 위로하듯 소리 없이 새 날을 열어주는 아침이 그렇고 시끄러운 하루 끝, 고요하게 저물며 닿아주는 밤이 그렇다. 그뿐이랴. 마른땅 적시려 기꺼이 제 몸을 던지는 단비도, 상처투성이 어지러운 세상 위로 새 살처럼 내리는 눈도 그렇다. 비록 소리가 없어서 깨닫기까지 시간은 들어도, 오래도록 변치 않고 보전되는 확실한 행복이 있다.


내게는 아빠의 말없는 마음이 변함없이 자기 자리를 지키는 거대한 자연 풍경과도 같다. 바래다주는 출근길 미리 내려와 시동을 걸고 따스히 틀어놓는 히터가 그렇고, 혹 그늘진 얼굴로 앉은 날이면 표정을 살피다 말없이 건네는 숟가락이 그렇다. 줄곧 나를 좇는 시선과 걱정하는 마음과 그 어떤 말보다 부지런한 사랑의 언어였다. 소리만 없을 뿐 그 어떤 말보다 수다스럽고 소란한 마음이었다.


내가 신도 아니고 아빠 마음에 들어가 앉아있는 것도 아닌데 무슨 수로 감춰진 속마음까지 다 알 수 있겠느냐는 말에, 아빠가 덧붙인 말만 곱씹어 봐도 묵음인 것들 속에는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더 큰 울림이 있는 것은 분명한 듯하다.   



그래도 아빠가
네가 좋아하는 빵 일등으로 골랐어.








소리의 집 

/ 담쟁이캘리




밤새 열어둔 창틈 사이로
소곤소곤 바람 불어오고
눈부신 햇살 감은 눈 위로
성가시게 아른거릴 때


슬금슬금 까치발로 걸어와
침대 맡에 둔 알람시계 숨 죽이고
둘둘 말린 이불 고이 펴 덮어주며
곤히 잠든 내 얼굴을 살필 때
 

눈 비비고 일어나
밤새 꾸던 꿈 깨기도 전에
고슬고슬 밥 냄새 코끝 간질이고
도마 위 썰어둔 야채들이, 송송
경쾌하게 노래 부를 때


온 집안 가득 채운 말없는 소리가
간밤 텅 빈 속 든든히 채워
잘 지은 밥만큼이나, 고슬고슬
되지도 질지도 않은 알맞은 마음이 되네


찬 속 뜨끈하게 녹여줄 온기로
보글보글 뭉근하게 끓어올라
쉬이 식지 않는 마음이 되네


그릇 위 수북하게, 꾹꾹
눌러 담은 고봉밥 한 끼에
고요하던 마음이 갖은 울림으로
금세 소란스러운 소리의 집이 되네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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