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담쟁이캘리 Sep 23. 2021

아빠, 난 꽈배기 안 좋아해요

꽈배기는 아빠가 좋아하지.



  어느 금요일 퇴근시간 무렵, 아빠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퇴근하는 길에 시간이 맞으면 같이 가자는 연락이었다. 자취를 하면서부터 주말에 별다른 약속이 없으면 본가에 와서 가족과 시간을 갖는 일이 이벤트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금요일만 되면 나의 약속 유무부터 확인하고 선약이 없는 날이면 대부분 아빠와 함께 퇴근한다. 몇 주 만에 함께하는 오랜만의 동반 퇴근길이었는데, 아빠는 차에 올라타기가 무섭게 꽈배기부터 건넸다.



“너 줄라고 샀어, 먹어.”

“꽈배기를? 나 꽈배기 안 좋아하는데….”

“뭘 좋아할지 몰라서 설탕 묻힌 거랑 안 묻힌 거 둘 다 샀어.”      



  꽈배기를 안 좋아한다는 나의 말은 고스란히 튕겨져 나왔다. 신나서 바로 받아먹을 줄 알았는지 나의 반응이 시큰둥하니 아빠가 한 마디 보탠다.



“네 생각해서 사 왔는데 안 먹을 거야?”



내 생각을 했다니. 그러면 내가 좋아하는 것을 사다 줬어야 하는 것 아닌가. 사실 꽈배기는 순전히 아빠 취향이다. 아마 아빠 입맛에 맛있는 것으로 골랐으니 당연히 딸인 나도 맛있게 먹을 거라고 생각한 것 같은데, 좋아하지도 않는 음식을 두고 고르려니 행동이 굼뜰 수밖에. 설탕을 묻혔든 안 묻혔든 둘 다 싫은데, 그중 덜 싫은 거라도 골라야 할지 고민했다.


그리고 결국 퇴근하는 나를 기다리며 굳이 이 음식을 사 왔을 아빠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래도 설탕은 묻혀야 꽈배기지.’라는 생각으로 그 어려운 선택을 마치고 한 입 베어 물었다.



“어차피 잘 먹을 거면서 튕기기는….”



  먹는 모습을 보며 배시시 웃는 아빠를 보다가 나도 따라 웃었다. 잘 먹을 거면서 튕긴 것이 아니라 정말 내 취향이 아니었지만, 그것이 무엇이 중하랴.   





  어릴 적 엄마가 그랬다. 반찬투정은 어린 아이나 하는 거라고, 밥은 쌀 한 톨도 남김없이 먹어야 한다고. 엄마가 차려주는 삼시세끼 밥상을 받아먹으면서 호불호가 생겼다. 특별히 가리는 음식은 없지만 손이 덜 가는 것들이 있다. 이를 테면 생선구이나 조림 요리는 지역 특산물이 아니라면 굳이 외식 메뉴로 먹고 싶지 않고, 삶은 계란은 떡볶이 국물에 비벼 으깨 먹는 것 외에는 잘 먹지 않는 편이다. 해산물을 좋아하지만 게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먹기 위해서 들인 힘에 비해 그 대가가 적게 느껴진다고나 할까. 물론 게살 발라먹는 실력이 미천해서일 수도 있겠지만 그마저도 오랜 시간이 흘러 취향이 되었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호불호를 구별하는 데에도 시간이 든다. 자신만의 좋고 싫음의 기호가 쌓여 개인의 취향이 된다. 내게 있는 취향 중에 이율배반적인 것이 하나 있는데, 초콜릿이나 젤리는 좋아하지만 단 것을 별로 즐기지 않는다. 가끔 스트레스받을 때 일부러 달달한 것들을 찾아 그 자리에서 수혈하듯 섭취할 때를 제외하고는 군것질도 하지 않는 편이다. 이런 내 취향을 아는 주변 사람들은 ‘모순적이지만 이해해, 단거는 위험(Danger)하니까.’ 라며 실없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평소 좋고 싫음이 확실한 확고한 취향이 있음에도 무장해제되는 순간이 있다 보니 ‘절대’와 같이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표현은 잘 쓰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일까. 지금처럼 가장 가까운 가족들이 내 개인의 취향과 상관없이 무작정 음식을 들이밀 때가 있다.


  그중 가장 힘든 것은 식사 후에 건네는 음식들이다. 여느 여자들과 다르게 밥 배와 빵 배가 따로 있지 않은 나로서는, 후식은 커피나 주스 같은 액체 종류만 먹는다. 보통 회사 동료들과 밥을 먹거나 친구들을 만날 때는 식후에 카페를 갈 것이 예상 가능하므로 후식을 위해서 적당히 배부를 만큼만 먹는다.




그런데 집에서는 이 모든 것들이 예측불허다. 엄마가 식후에 건네는 음식의 이름이 모두 ‘소화제’로 통하기 때문이다. 과일을 잔뜩 깎아 와도, 도토리묵을 무쳐도 다 소화제다. 배부르다고 아무리 말해도 ‘이건 살 안 쪄.’라는 전혀 다른 대답으로 일단 내 입에 갖다 댄다. 너무 배불러서 더 들어갈 자리가 없다고 해도, 그러니 이 소화제를 먹어야 한다고 대답하는 엄마와의 씨름은 늘 투덜대며 받아먹거나, 끝까지 먹지 않는다는 이유로 토라지면서 끝난다.


  엄마는 종종 ‘우리 애는 과일을 싫어해.’라고 말하는데, 진실은 과일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후식에 대처할 배가 남아 있지 않아 먹을 수 없는 것이다. 밥 먹기 전에 미리 후식의 존재를 알면 좋을 텐데. 대부분 엄마가 건네는 후식의 이름이 ‘소화제’라고 말한 것은 식사 전에 미리 아는 일이 드물기 때문이다. 주로 밥을 잘 먹는 모습을 보며 흐뭇해하다가 그제야 사다 놓은 후식 거리가 떠올라, 흥이 오른 술자리처럼 밥 2차가 시작된다.



“한 입만 먹어봐, 맛있어.”

“방금 밥 먹었잖아, 배불러.”

“이건 살 안 쪄, 소화제야 소화제.”



늘 같은 레퍼토리라 그런지 엄마의 말은 어쩐지 뻔한 클리셰처럼 느껴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내게 매번 후식을 권한다. 그러다 못 이기는 척 입에 넣으면 승패도 없는 이 일에, 승자라도 된 것처럼 환하게 웃는다. 그리고 왜 웃느냐고 물으면, 대답은 늘 ‘잘 먹는 거 보니 좋아서….’라는 말 하나다.





  빨간 신호등에 차가 멈췄을 때, 아빠는 입 주위에 묻은 설탕을 털어가며 꽈배기를 먹는 나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아빠도 엄마와 같은 이유겠지만, 그래도 왠지 모르게 그 찰나의 순간이 낯간지러워서 ‘왜’냐고 짤막한 물음을 던진다. 그러면 다른 목소리 같은 느낌으로 아빠가 말한다.



“잘 먹네, 우리 딸.”



  나의 호불호를 깨고 엄마와 아빠에게 적당히 맞춰주고서 ‘잘 먹어서 좋다’는 말을 듣고 보니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다 싫은 것은 아닌가 보다. 개인의 취향을 넘어서는 상대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서 싫었던 것마저도 한 수 접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늘 호불호가 확실한 성격이지만 이렇게 예외가 있는 것을 보면 세상 어떤 일도 ‘절대’는 없는 모양이다.


혼자서는 취사선택할 일 없고 기호에도 들어가 있지 않은 것들을 먹으면서 도리어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이유는 취향 너머에 짙게 깔린 마음 때문일 것이다. 호불호를 깬다는 것은 어쩌면 스스로 정한 어떤 선을 넘어, 내게 건네는 누군가의 마음이 다치는 일 없도록 더욱 견고히 지키는 일인 듯하다.




취향은 불호여도 나를 위하는
엄마 아빠의 마음은 언제나 호(好)니까.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