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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캘리 Dec 05. 2021

매운맛을 보느니, 맵찔이가 되련다

솔직할 수 있는 용기



  "다들 괜찮다는데 나만 맵네. 저 맵찔이인가봐요."



  점심시간, 지인과 간 식당에서 그녀가 말했다. 음식이 좀 매운 것 같지 않느냐는 물음에 나는 괜찮다고 했더니 돌아온 답이었다. 당시에는 그냥 웃어넘겼는데, 문득 떠오른 그녀의 말을 곱씹다가 '매운맛을 보느니, 맵찔이가 되는 편이 낫다'라고 생각했다.



  '맵찔이'의 사전적 정의는 매운맛과 찌질이의 합성어로 매운 것에 약한 사람을 일컫는다. 유의어로는 '맵린이'가 있는데, 매운 것에 약한 사람들을 어린이에 빗댄 합성어다. 반의어로는 '맵부심'이라는 말을 쓰는데, 매운맛을 잘 견디는 것을 과시할 때 쓰는 표현이다. 매운맛 하나로 강자와 약자를 나눈다니. 사람마다 매운맛을 체감하는 정도가 얼마나 천차만별인지 알 수 있다.



돌이켜보면 나도 '맵부심'을 부리던 때가 있었다. 유년 시절, 친구들과 모여 엄마가 밥반찬으로 만들어 둔 고추튀김을 밥도 물도 없이 먹으면서 '매운맛을 잘 견딘다'는 것을 과시했던 기억이 있다. 한눈에 보기에도 매운 것을 참고 견디며 괜찮은 척하는 것이 위대한 일인 양 우쭐했더랬다. 그때는 매운맛을 잘 견디는 것이 어른스럽고 의젓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 어릴 적 믿음이 습관이 된 걸까. 몇 해 전 별다른 이유 없이 상사의 타깃이 되어 지옥의 매운맛을 본 적 있다. 치를 넘어설 정도로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는데, 주변 사람들 모두 나에게 '이 또한 지나간다'며 일희일비하지 말고 버티라고 하길래 그 말만 믿고 우직하게 일 년을 넘게 버텼다. 그냥 매운 것은 맵다, 아닌 것은 아니다 말해도 되는 일이었는데….
   


  매운맛은 맛이 아닌 혀가 고통스러운 통증을 느끼는 감각으로 미각을 정의하는 신맛, 단맛, 쓴맛, 짠맛 중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통각이다. 그러니 매운맛을 보고 통증을 느끼는 일은 지극히 당연하다. 다시 말해 매운맛은 혀가 느끼는 고통의 강도라는 뜻인데, 고통의 강도를 견디는 정도에 따라 분류하는 신조어가 있다는 것은 참 흥미로운 지점이다.



더구나 매운 것을 잘 먹지 못하는 이들을 일컫는 말로 쓰이는 '맵찔이'라는 합성어에서 찌질이는 어느 소속된 집단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겉도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인데, 본래 통각에 속하는 매운맛을 잘 견디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찌질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쩌면 누군가에게 '통증을 참고 견디는 일'은 아주 당연하다고 속이는 말일지도 모른다.  





 참고 견디면 나아질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나를 괴롭히는 상사의 악행은 극에 달했고 결국 정면돌파를 택했다. 고심 끝에 회사를 그만 둘 결심을 했는데, 그만 두더라도 할 말은 하고 나가자는 마음으로 그간 겪었던 불합리한 것들을 모두 공론화했다. 그 일을 계기로 절대 꺾이지 않을 것 같았던 그가 꺾였고 뒤늦게 사과받았다. 왜 이제야 사과를 하느냐던 나의 물음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제대로 말하지 않았잖아. 그래도 되는 줄 알았어. 아마 네가 처음부터 확실히 표현했으면 안 그랬을 거야."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끝까지 내 탓을 하는구나' 싶었는데, 이제와 보니 매운맛을 보고도 무작정 참았던 내가 미련스러웠다. 분명 매운데도 괜찮다며 참고 견디던 그때를 떠올리다 스스로를 맵찔이라 칭하던 그녀의 솔직함이 부러워졌다.   






  살다 보면 비단 음식이 아니어도 살다 보면 알알하고 독한 느낌이나 기분을 느낄 때가 있다. 입 안 가득 매운 어떤 것을 머금고 있는 것처럼 알싸한 순간이 있다. 어릴 때는 물 없이도 매운맛을 견디는 일이 짐짓 어른이 된 것 같은 승리감을 주었는데, 지금은 스스로 느끼는 그대로 매운 것은 맵다고 말하는 솔직함이 오히려 자기 자신을 지키는 용기로 느껴진다.



  뒤늦은 다짐이지만, 나 역시 입에 맞지도 않는 것을 욱여넣고 애써 괜찮은 척 참고 견디느니 매운 것은 맵다고 말하는 솔직하고 용기 있는 '맵찔이'가 되련다. 그 누군가의 눈에 나의 모습이 지질해 보일지언정 그것은 아주 잠깐이고, 결국은 그 솔직함이 나를 지키는 방패 역할을 하게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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