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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캘리 Feb 23. 2022

눈물 마른자리에 싹이 돋았다

기록하고 담아둔 덕분에

  

  어느 여름날, 손에 쥐고 있던 물 컵을 엎지른 적 있다. 쏟아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이 바닥에 흥건하게 흘렀다. 마른 목을 축이지 못한 아쉬움에 탄식하다 흐르는 것들은 담아두지 않으면 그저 흘러갈 뿐임을 알았다. 한여름의 시원한 물처럼 찰나로 사라지는 존재들을 곱씹으며 지금 나에게 흘러온 것들에 대한 마음가짐을 바로 했다. 인생에서 마주하는 모든 순간도 오롯이 그때에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이므로. 제일 먼저 카메라 뒤로 숨기 바빴던 나를 렌즈 앞 피사체로 두었고 눈 깜짝할 새 흘러가는 일상들을 틈틈이 기록하기 시작했다.




오랜 절필의 시간을 끝내고 다시 생각이 고이는 자리에 앉은 이유는 소박했다. 아무리 감수성이 풍부해도 감정과 기억은 망각하기 쉽다는 것. 적당한 망각이 도움이 될 때도 있었지만 좋았던 기억도 덩달아 유통기한이 짧아지는 것은 섭섭한 일이었다. 에세이를 꾸준히 쓰는 것도 순전히 이것 때문이었다. 생애 가장 빛나는 순간이 마냥 흘러가도록 두고 보지 않는 것. 작지만 소중히 빛나는 순간들을 자음과 모음으로 합해 그저 흘러가지 않도록 고이 담아두는 것.



  간혹 모진 풍파에 굳건하던 것들마저 힘없이 스러질 때. 혹여  스스로 인생 전체가 불행하다 오해하며 걸려 넘어지지 말고, 내게도 그 누구 부럽잖게 반짝반짝 빛나는 소중한 시절 있었노라고 위로할 수 있기를. 딱 그 마음으로 내 지난 시간을 더듬기 시작했다. 아무리 추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라도 자세히 보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시(詩)와 같은 찰나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시도 천천히 음미하다 보면 다르게 읽히듯이 무턱대고 평가절하 한 내 삶도 재차 음미해 보면 전혀 다르게 느껴질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아무도 묻지 않았던 나의 핸디캡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칠삭둥이 미숙아로 태어나 뇌성마비를 앓으며 절지 않고는 갈 수 없는 태생이라 느림보였던 삶이, 누군가에게 위로로 닿는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마음으로 보통의 이야기를 써 내려갔고 그 이야기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아무도 묻지 않았던 탄생을 이야기하며 지나치게 솔직한 건 아닐까,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이야기를 쓰는 데 괜한 열심을 내는 것은 아닐까. 성장 과정 중에도 또 아주 가끔이지만 여전히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익명의 날 선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삶인데, 과연 보통보다 더 못한 사람의 이야기를 어느 누가 읽어줄까. 끝없는 고민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쉬지 않고 일렁이는 고민들이 썰물 때를 만나서 바닥을 드러낼 때가 오기는 할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우직하게 외길 달리기 하듯 글을 썼다.



  살아온 시간들만큼이나 고독하고 긴 레이스를 시작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 누군가 내 글을 읽고 건넨 말 때문이었다. 글은 작가의 삶을 비껴갈 수 없다는, 진정으로 삶을 살아낸 뒤에 시든 수필이든 써내는 것 같다는 말에 글의 자리가 깊어지는 것과 함께 생애 발자국도 깊이를 더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 후 가만히 돌아보니 나에게 글쓰기는 정화와 배설을 뜻하는 그리스어 ‘카타르시스’처럼 하루씩 삶 속에서 내가 먹고 마시고 마주한 순간들을 온전히 소화했을 때에야, 글로 정리되는 듯했다.



어떻게든 살아 있기만 했을 뿐인데 요 며칠 그렇게 엮은 글이 브런치 메인에 걸렸고 하루 새  말도 안 되게 구독자 숫자가 늘었다. 느림보 외길 달리기라도, 피니시 라인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몰라도 응원한다는 듯이. 누구에게  박수받기보다 손뼉 치며 축하해 주는  익숙한 삶을 살아온 나에게, 하루씩 늘어가는 구독자가 꼭 아군 같았다.



  반 대항 달리기를 할 때도 운동회에서도 ‘너 때문에 졌다’며 힐난받는 스탠드 계단 붙박이 신세였는데, 내 삶을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니…. 마치 꽃잎이 바람에 떨어졌어도 줄기는 굳건히 뿌리내려 있으니 기죽지 말고 열심히 피어라 응원하는 듯했다. 서로 얼굴을 모르는 채 글만 보고 나눠준 온기라 더 감개무량했고 숫자로 치환되는 그 알 수 없는 삶의 주인공들이 독립영화 엑스트라 단역 같은 삶의 이야기에 공감해 준다니 이렇게나마 글로 보답하고 싶어 손끝이 간질거려 틈틈이 떠오르는 문장들을 메모장에 쌓아 올렸다.



이래서 공든 탑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 걸까. 비록 살면서 수없이 넘어지고 일어나기를 반복하는 삶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으므로. 무너지지 않고 견고한 삶이 있다는 것이  예기치 않게 자랑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다. 눈물 마른자리에 새싹이 돋을 줄이야….



그간  무턱대고 불행하다 치부한 삶들을 툭툭 털어, 다시 땡볕에 널은 기분이다. 부디 이번에는 군내 없이 잘 마르기를. 오늘도 한 자 한 자 자음과 모음을 이어 또 하나의 질펀한 글 자리를 만들었으니 아군처럼 구독자들이 늘었행복한 그날의 기억만은 어디도 흘러가지 말고 이 자리에  소중히 담기기를. 그래서 남은 날들이 나에게 더욱 애틋해지기를 바라본다.   

  



그저 흘러가게 두지 않고
담아두길, 참 잘했다







나무 밑동

/ 담쟁이캘리




나무가 머물던 흔적 따라

팔각으로 터를 낸 자리가

그저 슬프지 않은 까닭은



위로 뻗어 올릴 줄기 없어도

보이는 곳 너머 아래로, 아래로

뻗어내려 간 뿌리가 있으니



부단히 뿌리내리고 내렸을

강인함을 따라 터를 냈으니

그저 기뻐할 일이 아니냐



나무는 저대로 제멋을 내고

뿌리가 깊음을 반증해 낸

한 폭의 걸작품이니



위로 올라갈 수 없다고

밑동을 드러냈다고

그저 슬프기만 할쏘냐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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