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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우리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더라

별로 없어서 더 소중한 무엇

by 담쟁이캘리


갓 스물을 넘겼을 무렵, 서른은 자유의 상징 같았다. 이제 겨우 미성년자 꼬리표를 뗀 나와 다르게 서른은 독립된 주체로 보였다. 제 스스로 밥벌이도 하고 원하는 것을 취향 따라 취사선택할 수 있는 나이. 서른 중반쯤에는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넘쳐날 거라고 믿었다. 민트 초코 대신 다크 초콜릿을 고르는 단순한 기호를 너머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곧 도래할 어른의 시기를 동경했다.



서른이라고 꼭 멋진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건 정작 내가 서른이 되고부터 였다. 배부른 맥주보다 소주가 좋다는 기호만 확실해졌을 뿐 여전히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크든 작든 스스로 결정해야 할 것들이 늘었다. 선택의 자유만 있을 뿐 모든 선택이 옳은 것도 아니었다. 무엇을 고르든 선택에는 늘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깨치면서 선택하는 일이 짐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내가 했던 미숙한 선택들은 마치 엎질러진 물 같았다. 아무것도 채우지 못하고 갈증만 나는 것이 꼭 엎질러진 물처럼 보였다. 스스로 엎지른 것들을 수습하고 정돈하면서 좀 더 멋진 어른이 되기를 꿈꿨다. 이미 엎지른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지만 얼룩이 안 남게 잘 마르기를 바라며 철부지 같은 마음을 고쳐 잡다가 문득, 나이는 그저 수없이 쌓아 올린 오늘에 대한 부피 값일 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공간이 크다고 해서 그것이 꼭 질량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듯이. 나이 먹는 수만큼 어른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몸만 컸지 마음은 어른의 근처도 못 간 어린아이 같았다. 어른이 되면 모두 맘대로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치기 어렸고, 어른다운 어른이 된다는 것은 매일이 어려운 숙제 같았다. 그렇다고 다 같이 나이 먹을 때 혼자 나머지 공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부단히 살면서 온몸으로 부딪혔다. 수없이 실수하고 넘어지면서 주어진 난관 앞에서 덜 넘어지기보다는 잘 넘어지는 법을, 무뎌지기보다는 무던히 넘길 수 있는 방법을 삶으로 체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원하는 것을 취사선택할 수 있는 그토록 바라던 어른이 되었지만, 선택에 따른 책임을 지는 일은 언제나 어려웠다. 신중히 선택한 것이 되려 불행한 결과를 낳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마음 가는 대로 쉽게 택한 것이 예기치 못한 기쁨이 되기도 해서 더 그랬다. 고민한 시간과 비례하지 않는 미지의 영역이라 선택하는 것도, 그 선택을 정답으로 만드는 것도 생각보다 고된 일이었다.



그래서 무언가 선택하기 전에 많은 시간을 들였다. 그중 아무에게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사소한 것들이었다. 좋아하는 책, 드라마, 영화, 친구, 가족을 보는 것까지. 특별히 기깔나거나 훌륭할 것도 없는 취향을 취사선택할 때조차 신중을 기했다. 어릴 때는 부모님이 보호자였지만 이제는 스스로를 보호할 나이가 되었으므로. 나를 가장 잘 아는 보호자가 되기 위해 나에게 시간을 할애했다.



기껏해야 취향을 고르는 일에 마음을 쏟는 것은 나를 둘러싼 대부분의 것들이 취향으로부터 기인하기 때문이었다. 아직 크고 번듯한 무엇이 된 것은 아니지만 멈췄던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고 꼬박꼬박 메모장에 글을 모아두는 것부터, 자취방 곳곳에 놓인 가구부터 작은 소품들까지 모두 나의 기호와 취향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저 좋아서 선택한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자리를 이뤘다. 그러니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에 게으를 수가 없다. 메모장에 모아둔 대부분의 말들은 날 것 그대로의 마음이고, 내 역할은 그 마음이 하는 말들을 글이라는 체에 걸러 문장으로 앉히는 것이니 취향을 살피는 일은 어느새 당연한 일상이 되었다.



연애결혼 한 우리 부모님을 봐도 그렇다. 좋아서 선택한 사람과 가정을 이루고, 칠삭둥이 미숙아로 태어나 뇌성마비까지 앓아 살 가망이 없다던 나를 죽을 각오로 낳아 지금껏 기른 것을 보면 취향은 생각보다 힘이 세다. 취향의 사전적 의미는 마음이 하고 싶은 방향이 생긴다는 뜻인데, 달리 표현하면 새로운 길을 내는 것과 같다. 계획에도 없던 초행길을 기꺼이 걷는 것. 그 힘은 마음에서부터 난다.



세상엔 우리가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누군가는 이 문장에 마침표를 찍고 한숨 쉬며 돌아서겠지만, 맘대로 할 수 없는 게 별로 없어서 내가 하는 모든 선택이 귀중하다. 먹고 자고 깨고 일하며 사는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불현듯 마음이 하고 싶은 방향이 생긴다는 것. 과연 그만큼 짜릿한 게 또 있을까. 마음이 동한다는 것은 일상이 변하기 시작했다는 신호일 테니. 언제 올지 모를 마음의 동요를 알아채기 위해 오늘도 마음이 눕는 결을 따라 자잘한 것들을 부지런히 취사선택한다.



스스로 취향을 반영해 고른 선택의 끝에는 내가 아끼는 사람과 음식, 그 외에 모든 것들이 맞닿아 있다. 일상 곳곳에 자잘하게 숨어 있어 잘 보지 못하고 지나칠 뿐. 사소하지만 확실한 취향을 따라 이룬 삶의 공간에는 나의 뿌리 가족이 있고 슬플 때나 기쁠 때나 곁을 지켜준 친구들이 있다. 소중한 사람들과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함께 취미를 즐기는 것은 마음을 나누는 매개가 되기도 한다. 취향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구분하는 지표 이상의 것으로, 내가 백팀인지 청팀인지 나의 아군은 누구인지 가름할 수 있게 돕기도 한다.



그래서 나 역시 스스로 뭘 좋아하고 또 싫어하는지 주의 깊게 들여다보며 취향을 확실히 하는 편이다. 아이들에게 어떤 일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무서운 것이라는 뜻으로 '에비'라고 하듯이. 보호자로서 내 취향을 바로 알고 불호로부터 분리시켜주는 작업은 꽤 중요하다.



세상엔 우리가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별로 없어서 어떤 선택들은 더 소중하다. 내게는 시시각각 변하는 마음의 동태를 살피고 마음이 하고 싶은 방향이 생기는 것을 알아채는 일이 그러하다. 그래서 나는 어떤 선택을 앞두고 꼭 나에게 묻는다.




그래서 내 취향은 뭐지?







선택

/ 담쟁이캘리




제철도 없이 날뛰는 마음은
스물네 시간 모자라게 엎치락뒤치락 해도
순환하는 계절처럼 분명한 절기가 없어
면면이 흐르는 마음길 여러 갈래였어도



마음이 눕는 결대로 누워야
스물네 시간 뜬눈으로 뒤치락거린다 해도
팔팔하게 뛰어노는 마음은 아랑곳없어
번번이 거니는 마음길 황홀경이었다




가만 보니 마음에도 결이 있다. 힘주어 도끼질해도 결대로 자르지 않으면 무엇도 온전히 가를 수 없듯이. 여러 갈래로 뻗는 마음길을 가를 때에도 마음결대로 갈라야, 무심코 갈라버린 마음결 사이 웅크린 가시에 찔리지 않는다. 마음결대로 갈라야 고심 끝에 내린 결정에 뒤탈이 없다.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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