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담쟁이캘리 Sep 21. 2023

어린 킬러들의 수다

플래시백: 잽 날리듯 정타로 꽂히는 날 선 말들


  불행은 행복보다 더 빠르게 플래시백 된다. 애쓰지 않아도 불쑥 떠오르는 순간은 나를 맹렬히 위협했다. 뭉그러진 속도 모르고 잽 날리듯 날 선 말을 해대는 아이들은 마치 수다스러운 킬러 같았다. 나는 그들이 쉴 새 없이 뱉는 말속에서 수백수만 번 죽고 또 죽었다. 모두 진실이 아니라고. 진실도 아닌 이야기에 힘쓰지 말자고 스스로 단속하기에는 너무도 어렸다.


  거울 속 내가 익숙해질수록 아이들의 검은 말들이 온몸에 아로새겨졌다. 미운 오리 새끼처럼 어딘가 다르고 이상한 못난이 같았다. 태어나보니 아킬레스건이 있는, 선택한 적 없는 불행의 이유도 모른 채 그저 짓궂은 마법에 걸린 거라고 믿으며 오지도 않을 구원을 기다려 온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것은 그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고 했지만, 잘못이 아니라면 남들은 대체 무슨 복으로 멀쩡히 태어났는지. 상대적 빈곤을 이유로 한쪽으로 치우친 듯한 불행이 못내 억울했다.



  다리병신이라는 욕지거리에 거울로 뇌성마비를 앓는 다리를 볼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때마다 마음 편히 거울을 볼 수 있는 튼튼한 몸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 아이들은 내게 왜 태어났느냐고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태어나지 말지 그랬냐고 날 선 말들을 쉽게 내뱉었다. 나만 세상이 만만찮고 어려운 것 같아 보란 듯이 잘 태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만 서른이 되기까지 상한 곳 없이 다시 잘 태어나는 삶을 꿈꿨다. 꿈꾸는 것은 자유니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달콤한 상상은 늘 정타로 꽂히는 날 선 말들에 산산조각이 났다. 다리병신이라는 말보다 더 아팠던 건 어른들이 불쌍하다며 혀를 끌끌 차던 모습을 따라 하는 아이들이었다. 불시에 그날의 기억이 플래시백 될 때마다 그 장면을 아프게 마주했다. 나는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고 했지만, 그들은 내 말에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처음 보는 낯선 어른이 자기 지팡이를 휘두르며 똑바로 걸어야지 그렇게 걸으면 못 쓴다며 혼내기도 했는데, 아이들은 그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하며 내 뒤를 쫓았다. 사람들이 하는 말만 들으면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 정말 내 탓인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면에서 만일 잘 태어났더라면 불행을 겪지 않았을 거라는 소리가 들렸다. 뒤늦게 어떤 꿈을 꾸든지 그것은 자유지만, 여태껏 내가 꾼 꿈은 지금 살고 있는 삶을 낭비하는 꿈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동안 나도 모르게 어린 킬러들과 한 편이 되어 나를 죽이기를 도모하고 있었다. 내가 겪은 불행은 남들이 서슴없이 내뱉는 말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을 섣불리 진실이라 믿어 자초한 불행이었다. 빠른 속도로 불행이 플래시백 될 때, 그 고통스러운 감정에 매몰되는 것을 경계해야 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억 속 날 선 말들로부터 나를 지키는 힘을 기르지 못해서 오래도록 불행을 학습하며 살았다.



  애석하게도 그 당시 나는 나를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태생이 결핍을 지닌 신체였으므로 가지지 못한 것을, 깊이 염원하는 기도가 불러올 행운을 선물할 요량으로 다시 잘 태어나기만을 기도했다. 정작 그 기도가, 스스로 잘못 태어났음을 인정하는 것인 줄도 모르고 지속하다 공연히 상처만 키웠다. 속절없이 플래시백 되는 기억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이유는 마음속 어디에도 나를 보호할 울타리 없이 공허해서였다.


  쉬이 고단해지는 몸은 날 때부터 결핍을 타고나서였다면, 마음이 고달팠던 건 결핍에 매몰되어서였다. 아무도 무어라 하는 사람이 없는데 주눅이 들고 어쩌다 마주친 시선에도 마음이 너덜거릴 때.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지금껏 날 선 말들이 잽처럼 꽂힐 때 제대로 방어하거나 공격하지 못하고 한 방에 링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적어도 나를 지키기 위해 맷집을 키워야 했다. 세상에 약점 없이 잘나기만 한 사람이 어디 있으랴. 남들과 다르게 눈에 보이는 약점이니 내면을 더욱 단단히 다져야 했다.

       


  언젠가 어느 인문학 서적에서 ’슬픔을 가진 모든 자들에게는 날개가 있다 ‘라는 구절을 본 적 있다. 앞뒤 문장은 기억나지 않지만, 세상에 슬픔을 모르는 이는 없고 저마다 자기의 슬픔을 달래는 날개와 같은 것들이 있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원치 않는 슬픔이 플래시백 되는 시공간을 벗어나 유유히 흘러갈 수 있는 마음이 되기를 기도하며 글 쓰는 일에 정진했다. 그리고 지금도 종종 지난 기억이 자동으로 플래시백 되어 깊은 슬픔이 나를 덮치려 들 때, 지금처럼 차곡차곡 글을 쌓아 올려 마음에 단단한 울타리를 두른다. 수다스러운 킬러들의 날 선 말들에 대항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지 않은가.



펜촉은 수다스러운 킬러의
칼날보다 강하니까.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