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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캘리 Jan 31. 2021

오빠는 가방셔틀이었다

기꺼이 내 짐을 뺏어 드는 가방셔틀

 

  어릴 적 엄마의 과업은 나의 독립심을 키우는 일이었다. 그 누구의 도움 없이 신발을 신고 옷을 입고 밥을 먹고, 등교할 수 있도록 가르쳤다. 세상 모든 부모가 평생 자식의 보호자일 수 없으니 스스로의 힘을 길러주는 것은 당연했다. 다만, 엄마는 나에게 유독 엄격했다. 칠삭둥이 미숙아로 태어나 뇌성마비까지 앓아 평생 절름발이로 살아야 했으므로. 혹여 인생마저 자립하지 못하고 절지 않을까 염려해서였다.



엄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가방은 스스로 들게 했다. 준비물을 챙겨 넣고 현관을 나설 때까지 등굣길을 배웅하는 내내 가방 메고 걷는 모습을 지켜봤다. 매일 나란히 등교하는 한 살 터울의 오빠에게 대신 들어주지 말 것을 당부했다. 엄마 말의 효험은 딱 집 앞 골목 어귀까지였다. 골목을 벗어나 엄마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오빠는 말없이 내 가방을 들어주었다. 무겁다 말하지 않아도 자꾸만 엉키는 걸음이 위태로워 보였는지 등하굣길마다 '가방셔틀'을 자처했다.





  고작 아홉 살 인생이 여덟 살짜리 여동생을 위해 오빠 노릇을 하는 중이었다. 1학년은 아래층, 2학년은 위층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오빠는 내가 잘 들어가는지 확인하고 나서야 자기 반으로 갔다. 학교가 파하고 나면 오빠를 기다렸다. 아이들이 모두 돌아간 빈 교실에 분실물처럼 앉아 있다가, 오빠가 부르면 쫄래쫄래 따라 걸었다. 드넓은 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걷는 동안 철봉, 구름다리에 매달려 놀거나 축구공을 차는 아이들을 지나쳤다. 이따금 눈앞까지 축구공이 굴러와 아른거릴 때도 오빠는 가만히 내 손을 잡고 걸었다. 그때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공은 내게는 그저 공포였지만, 오빠에게는 거대한 유혹이었을 것이다. 당장 뛰어가 동참하고 싶을 만큼 온 사방이 놀이 천지였으니.



나는 그런 오빠 속도 모르고 눈치 없이 엉킨 걸음에 수없이 넘어졌다. 그때마다 오빠는 한눈팔며 구경할 새도 없이 나를 일으켜 손바닥에 묻은 흙을 털어주기 바빴다. 그러면 나는 멋쩍게 웃으며 '오늘은 어제와 다른 곳을 다쳤다'거나 '다행히 피는 안 난다'며 덜 다친 것을 자랑했다. 상처가 아물 새도 없이 매일 습관처럼 넘어지기를 반복하던 삶이라, 그것마저 자랑이 되는 일상이었다. 몸 이곳저곳 상처로 인한 딱지가 가득했다. 오서방 점처럼 딱지가 앉은 모양이 스스로 꼴 뵈기 싫어, 억지로 뜯으려고 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오빠는 이렇게 말했다. '딱지는 새 살이 돋도록 돕는 장군 세포가 물리친 세균의 무덤'이라고. 딱지는 장군 세포가 남긴 영광의 흔적이니 함부로 떼어내면 오히려 흉이 질 거라는 말로 나를 다독였다.  





  "오빠 눈에 너는 H.O.T. 여동생 같아."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팔, 다리를 가진 아이들을 부러워할 때마다 오빠는 이렇게 말했다. 갑자기 웬 말이냐 싶겠지만 저 말은 그 당시 오빠가 내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수련회나 수학여행을 가면 장기자랑 때마다 열의 아홉은 H.O.T. 의 <캔디> 노래에 맞춰 춤추고 노래를 불렀다. 오죽하면 사회자가 '이러다 우리 학생들 이가 몽땅 겠어요.'라는 우스갯소리를 할 만큼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가수의 여동생 같다니. 무작정 예쁘다는 말보다 더 구체적이라 기분 좋은 칭찬이었다.



오빠는 자주 나를 업고 걸었는데 집 앞에 도착하면 내 가방은 내 손에 쥐어주고, 오빠 가방은 자기 손에 들고 들어갔다. 행여 오빠가 내 가방을 들어준 것을 알면 나를 나무랄까 봐 걱정하는 마음에 한 행동이었다. 물론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야, 엄마가 이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해 줬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나중에 우리가 없으면 네가 동생 챙겨야 해. 네가 엄마, 아빠 대신이야."

  두 손 꼭 붙잡고 걷던 오빠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엄마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 무려 '엄마 아빠 대신'이라는 그 말의 무게를 아는지 모르는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던 오빠의 옆모습도 선하다. 갓난쟁이 시절, 오빠가 안방에 잠들어 있던 내 손가락을 깨물어 울린 적 있다. 아빠는 그 순간을 포착해 사진을 찍었고, 엄마는 그것을 인화해 사진첩에 사연과 함께 고스란히 기록해 두었다.





  언젠가 첫째 아이가 자신의 동생을 맞이하는 일은 이방인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도 모자랄 시기에, 받은 사랑을 나누어야 할 존재가 생긴다는 것은 어떤 느낌인지 감조차 오지 않는다. 문득 연년생의 장남인 오빠를 볼 때면, 나보다 기껏 일 년 먼저 당겨 먹은 밥으로 치르는 대가가 너무 고된 것 같을 때가 있다. 더구나 나는 칠삭둥이로 태어나 새치기하듯 오빠의 막내 자리를 뺏었다.



그저 나보다 조금 일찍 태어난 것뿐인데 훗날 '부모의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니. 상상조차 안 되는 그 말의 무게를 어릴 때부터 견뎠다고 생각하니 그 옛날 쉽게 건네준 내 가방이 미안해졌다. 손꼽아 보니 오빠는 불과 16개월 만에 막내에서 장남이 되었다. 나는 열 달을 채우고 태어나는 여느 연년생들보다 3개월 일찍 나타난 갑작스러운 존재였다. 회사였다면 파격적인 초고속 승진이겠지만 집에서는 한껏 받아도 모자란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하루아침에 나눠 가져야 하는 것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것들을 정확하게 반으로 갈라 나누기는 쉽지 않다. 하물며 그 대상이 남들과 다른 핸디캡을 가지고 태어나, 유난히 아픈 손가락일 때는 한쪽으로 기운 시소와 같은 마음일 수밖에 없을 때가 많았다. 집안에 아픈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당사자는 스스로를 짐이라 여기고, 남은 가족들은 매일같이 그 짐을 지고 걸으며 '가방셔틀'이 되기를 자처하는 것. 어려도 너무 어려서 오빠가 군말 없이 들어주던 가방의 무게를 가늠할 줄 몰랐다. 온 사방이 놀잇감 천지인 사이를 비집고 내 손을 잡고 걸으며 마다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나와의 하굣길에 무수히 지나친 공 때문이었을까. 오빠는 운동선수를 꿈꾸며 체대 입시를 준비했다. 키 188cm에 운동신경이 좋아 실기 점수도 좋았다. 별 탈 없이 원하는 대학에 입학해 꿈을 펼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나의 믿음은, 1년 뒤 나의 대학 입시 시기가 다가오면서 물거품이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오빠가 부모님 몰래 자퇴를 한 것이다.



그 길로 바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번 돈으로 나의 대학 등록금을 내주었다. 뒤늦게 알게 된 내가 그랬는지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은 '내가 만두고 싶어서 그만두었다'는 말이 전부였는데, 그만둔 이유가 너무 간결해서 슬펐다. 아무도 들어달라고 한 적 없던 그 짐을, 오빠 혼자 지고 걸었을 생각 하니 곁에서 아무것도 몰랐던 나 자신이 죄스럽게 느껴졌다.



만일 내게 핸디캡이 없었다면 오빠는 어리광 부리는 철없는 아이 같을 수 있었을까. 하루아침에 철들어야 했을 그 시간을 헤아리다가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맏이라는 이유로 나의 짐을 나눠 들던 오빠와는 겨우 한 살 차이였다. 나보다 먼저 운 밥그릇으로 키운 등치 값 치고는 그 값이 너무 과했다.




오빠와 나눈 평상시 카톡 중 일부 발췌



"네 꿈은 회사원이 아니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꿈은 포기하지 마."


먼 길을 돌아 지금의 자리에 간 오빠는 언제나 '맏이'답게 나의 꿈을 응원했다. 작가는 배고픈 직업이라며 회사원이 되라던 아빠의 성화에 못 이겨 처음 회사에 취직했을 때도. 재작년 봄, 회사에서 갑작스러운 해고 통보를 받았을 때도. 몇 개월 전 회사를 그만두고 제주도 한 달 살기를 하러 갈 것을 결심했을 때도. '투자금이라고 생각하고 백만 원 정도는 그냥 줄 수 있다'며 내 꿈을 지지했다. 나조차도 욕심이라 생각하고 미뤄둔 꿈을 잊지 않고 응원해 주었다.



"나도 포기하지 않은 꿈을 왜 네가 접어?"


오빠는 학교를 자퇴하고 갖은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거기서 번 돈으로 나의 대학 학비를 보탰다. 그중 음식점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요식업의 꿈을 키웠다. 아르바이트생으로 시작해 매니저, 슈퍼바이저를 거쳐 지금은 본사의 대표 직속으로 일하며 이른 나이에 부장이 되어 제 꿈의 등치를 크게 불렸다. 기꺼이 내 짐을 뺏어 드는 오빠를 위해서라도 나는 글 쓰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여느 집 자식들처럼 사고 치지 않고 커줘서 참 대견해."


  얼마 전, 가족이 모여 외식하는 자리에서 아빠가 그랬다. 한편으로는 오빠와 나 둘 다 너무 빨리 철들게 만든 것 같아 미안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아빠의 말을 곱씹다가 알았다. 자식이 스스로 짐을 질 수 있는 힘이 생겨도 부모 마음에는 결코 덜어지지 않는 마음의 짐이 있다는 것을. 독립심은 단순히 자기 가방을 스스로 드는 이 아니었다. 아무 말하지 않아도 절로 자식에게 뻗치는 부모 마음의 짐을 덜어주는 '장성한 어른'이 되는 것이 나에게 남은 과업이었다.



  스스로 자기 몸을 가누고 앞가림할 줄 아는 의 어엿한 보호자가 되는 것. 그 누구에게도 나의 짐을 맡기지 않고 '가방셔틀'이 되지 않게 하는 것. 기필코 혼자서도 잘하는 사람이 되어서 나의 가족들에게 마음의 짐을 지지 않도록 하는 것. 비록 몸은 마지막 날까지 절름발이로 지라도, 마음만은 절지 않는 건강한 마음으로 남은 생 떳떳하게 자립해 살아가는 것. 그것으로 내가 먹은 수십수백수천 그릇의 밥값이었. 지금껏 살면서 내 대신 기꺼이 나의 짐을 뺏어 들어준 오빠를 비롯한 가족들에게 진 마음의 빚을 갚는 것. 이것이 나의 소원이다.







마지아니하다

/ 담쟁이캘리




태어날 때는 막내였던

응석받이가 하루아침에 형제자매의

손윗사람 맏이가 되었다



그저 일찍 태어났다는 이유로

먼저 먹어치밥그릇   세워

하루아침에 앉은자리인데



자리의 무게 마다하지 않고

맏이라는 이유로 기꺼이 짐 지고

묵묵히 걸어가는 그대를

사랑해 마지아니한다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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