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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캘리 Aug 02. 2020

미운 오리 새끼가 어때서?

에러도 눈부시게 아름다울 수 있다


  어릴 적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어느 드라마에서 이런 대사를 만난 적 있다.


평범하게 사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요.
저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남들 사는 만큼만
평범하게 사는 게 꿈이에요.


생각해 보면, 남들 사는 만큼 살면서 평범하게 산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칠삭둥이 미숙아로 태어나 뇌성마비를 앓으면서 뒤쳐진 인생 같아서 남들처럼 평범해지기 위해 정말 열심히 살았다. 노력하는 사람에게 행복은 자판기처럼 제 값을 치르면 당연하게 주어지는 줄 알았다. 동화 속 뻔한 권선징악의 결말을 학습하며 세상 모든 일의 끝은 '의심의 여지없는 해피엔딩'일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머리가 크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세상 일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고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초행길의 연속이었다. 생각과 다른 결과를 두 눈으로 마주하면서 밤낮으로 열심히 해도 좋은 결과가 따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체감했고, 성실하다는 말로도 채울 수 없는 그릇이 있다는 사실에 절망하는 날이 쌓여갔다.

  퇴근 10분 전 부당해고를 당했던 그날 이후 석 달 만에 재취업에 성공했다. 그제야 불행으로 기울던 원심력이 겨우 제자리를 찾은 듯했다. 내가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 군말 없이 기다려 준 부모님의 시선마저 무거워 그 중압감을 떨치려 밤잠 줄여가며 얻어낸 재취업이었다. 당연히 불행 끝 행복 시작인 줄 알았는데 새로운 직장에서는 상사의 가스 라이팅으로 직장 내 괴롭힘을 겪어야 했다. 끝난 줄 알았던 불행이 반복되자 이 모든 것이 내 탓 같았다. 세상 쓸모없는 존재가 된 것 같다며 인신공격을 그만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 상사는 오히려 내 말에 쐐기를 박았다.




스스로 쓸모없는 존재인 것 같다 했는데,
내가 그 말을 부정하지는 않을게.




두 손 가득 모아둔 흙 위로 장대비가 쏟아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간의 노력들은 손 틈 새로 빠져나갔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볼품없는 빈 손이었다. 그렇게 나의 존재감이 바닥을 친 날이었다. '쓸모없음'을 확인받고 나자, 불쑥 마음에 허기가 들었다. 무엇으로라도 채워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은 굶주림이었다. 그 순간, 평소 가입해 두고 한 번도 나간 적 없는 소모임 어플 채팅창에 메시지가 떴다. 오늘 진행하는 모임에 뜻밖의 결원이 생겼다는 내용이었다.

  병실 내 비치된 비상벨을 누르는 마음으로 참석 버튼을 눌렀다. 장소, 시간, 진행방식도 모르는 채 무작정 신청부터 했다. 모임은 각자 읽고 싶은 책을 가져와서 읽고 나서 서로 책 내용을 소개하며 담소를 나누는 형태로 진행된다고 했다. 계획에도 없던 일정이라 가져온 책이 있을 리 만무했지만 이 기분을 그대로 가지고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일단 가 보면 무슨 수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모임 장소로 향했다.



"제가 갑자기 참석해서 책이 없는데요. 대신…."
"그럼 이거 읽으세요." 



모임장에게 책을 안 가져온 대신 글이라도 쓰겠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그러자 그는 책을 두 권 가져왔다며 그중 한 권을 건넸다. 그가 건네준 책은 배우 박정민의 <쓸 만한 인간>이었다. 책을 받아 들던 그 찰나, '쓸모없다는 말을 들은 오늘의 나에게 쓸 만한 인간'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이래서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건가. 스스로를 하등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은 날 '쓸 만한 인간'이라고 쓰인 책을 건네받다니. 글을 읽기도 전에 책 표지만으로 위로받았다.







작가는 서문에서 '서사도 그럴듯한 문장도 없다'라고 패기 있게 밝히면서 스스로를 온몸에 평범함이 흘러넘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글) 쓸 만한' 자리를 제안받아, 매달 연재를 하던 글을 엮어 책이 발간되었으니 나 보다는 조금 덜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였다. 그는 글의 마지막을 대부분 '다 잘 될 거다'라는 말로 끝맺었다. 반복해서 눈에 띄는 그 문장이 나에게는 마법의 주문처럼 느껴졌고,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무슨 생각을 하든 결말은 해피엔딩일 거라 말해주는 덕담 같았다.

이 책을 읽고 느낀 점을 글로 적어 사람들과 나눴다. 긴 말이 오고 간 것도 아닌데 모두 경청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날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의 고민은 대부분 닮아 있었다. 얼굴 생김새는 달라도 모두 똑같이 고민을 달고 사는 것을 보면서 끝없이 불안한 것이 삶의 당연한 모습 같았다. 사람 사는 것 다 비슷하고 고민거리도 다 거기서 거기였다. 나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일상 속 고민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짐을 덜어낸 듯했다. 우리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에 위로받았을 즈음, 모임장이 각자의 버킷리스트를 나누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내 차례가 왔을 때 무언가에 홀린 듯이 이렇게 말했다.



박정민. <쓸 만한 인간> 중 한 부분




제 버킷리스트는 두 개인데요.
하나는 책 쓰기인데,
실행에 옮길 예정이라 곧 이룰 거고
나머지는 오로라를 보는 거예요.




  아직 나의 움직임은 보잘것없고 자잘하기만 한데 곧 실행에 옮길 예정이라니. 말이 씨라도 된 것처럼 입 밖으로 뱉으며 우선 심고 보자는 마음이었지만 목소리에는 꽤 단호한 의지가 실렸다.

모임장은 모두의 버킷리스트를 듣고 난 뒤, 각자의 바람을 그대로 이루라며 닉네임을 붙여 부르기 시작했다. 사장이 되고 싶은 사람에게는 'O사장'이라 불렀고,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O작가'라고 불렀다. 그렇게 말 몇 마디로 '쓸모없는 존재'였던 나는 순식간에 '작가'가 되었다. 예고도 없이 '온몸에 평범함이 흘러넘치는 사람들'에게 위로받았다. 난생처음 본 책이었고 낯선 사람들이었지만, 그 어떤 말도 튕겨 내지 않고 고스란히 들어주었다. 그 경청의 자세를 곱씹다가 문득, 평범한 사람이 주는 보통의 위로가 주는 힘을 실감했다. 잔잔하지만 얼마나 오랜 온기를 지니는지 새삼 위대하게까지 느껴졌다.


  분명 최악의 하루였는데 금세 방전된 마음이 충전되는 듯했다. 말로는 이미 오늘 작가가 되었는데,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진짜 작가 신청을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망과 위로가 뒤엉켜 온 날 밤, 그동안 자꾸 떨어져 멀리하고 있던 브런치 어플을 켰고 작가 신청을 했다.



꼭 특별하고 빛나는 삶만 의미가 있는 걸까?
이번 생이 처음인 우리 모두는 미운 오리 새끼다.
우리 모두는 미숙하고 서툰 사람들이고,
실패담도 자기 계발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안데르센 동화 속 미운 오리 새끼는 '남들과 다른 외모'를 가졌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지만, 후에 자신이 백조였음을 깨닫는다. 물 위에 비친 보잘것없는 깃털과 볼품없이 마른 목을 지녔던 못생긴 모습은 간데없고 아름다운 백조의 모습만 물 위에 비친다. 모두에게 미움받던 미운 오리 새끼인 줄 알았던 백조가 날갯짓을 시작하며 끝난다.

 

우리는 꼭 백조가 돼야만 하는 걸까? 미운 오리 새끼 그 자체로도 충분히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일 수 있지 않을까. '미운 오리'가 된 이유는 그저 '남들과 다르다'는 것 때문인데, 남들과 다른 나만의 특색을 가졌다는 것은 그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나다움'일 수도 있지 않을까.  


미운 오리 새끼가 어때서? 대단하지 않아도, 작고 사소한 것들이 얼마나 빛나고 아름다울 수 있는지 쉽게 자잘하다 치부하고 지나치는 서툴지만 사랑스럽고 소중한 '보통의 기적'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그렇게 오래도록 몸담고 있던 직장에서 '쓸모없는' 존재로 받아들여진 날, 울음으로 써 내려간 신청서를 시작으로 브런치는 내게 '쓸 만한 자리'를 내주었다.

  내 나이 열다섯, 사춘기 시절. '그저 조금 불편할 뿐'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핸디캡이 남들과 '다르다'는 차별의 이유가 되었을 때. 스스로 미운 오리 새끼 신세를 면치 못했던 시절, 돌이켜 보니 그때도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쓸모에 대한 확신'이었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여전히 미운 오리 새끼였으나 절름발이로 불리하게만 보였던 내 인생을 긍정하게 도와준 문장이 있다.





하느님은 이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하나도 만들지 않으셨어.

- 권정생, <강아지 똥> 중에서 발췌





  스스로의 삶을 '다르다'는 말로는 온전히 설명될 수 없는 오류 같다고 생각했었다. 조물주가 의도한 대로 만든 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 만들어진 오류 같은 것. 수 날을 버티다 마음이 벼랑 끝에 닿았던 때도 있었다. 정처 없이 떠도는 마음을 다독이며 하루에도 몇 번씩 일렁이는 자존감을 키웠다.

브런치가 내어준 이 '쓸 만한 자리'에서 착실히 나의 쓸모를 다해 쓰는 글들이 켜켜이 쌓이다 보면 어느새 책을 이루고 있지 않을까. 꾸준히 제 할 일을 하면 그 작은 행동들이 모여 '나만의 쓸모'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또 하나의 버킷리스트로 오로라를 보고 싶다고 했는데, 오로라는 아이슬란드 같은 고위도 지방에서 일어나는 발광 현상으로 '우주의 에러'라고도 불린다. 원래 지구 밖에 있는 자기장이 어쩌다 보니 북극으로 흘러 들어온 작동 오류라고. 그런데 어느 드라마에서 오로라에 대해 말하기를 '설사 조물주가 의도한 대로 만들어진 게 아닌 어쩌다 보니 만들어진 에러라도, 눈물 나게 아름다울 수 있다'라고 했다.
  
나 역시도 나의 태생이 작동 오류 같고 어쩌다 보니 지구에 떨어진 낙오자 같았지만 그런 나라도 아름다울 수 있다. 굳이 머나먼 아이슬란드에 가지 않고도 내 인생 속에서 오로라가 쏟아지는 순간을 직접 목도하게 되는 날이 올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자잘하고 소소한 나의 일상이라고 이르게 절망하지 말고 좀 더 천천히 음미해야 한다. 내 생애 오로라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운 찰나를 맞이하기 위해서라도 스스로를 섣불리 탓하거나 깎아내리려 하지 않고 좀 더 애틋하게 바라보겠노라고 다짐해 본다.

  지금 바라보는 거울 속에는 미운 오리 새끼밖에 없는 듯해도 그 미운 오리가 백조가 되어 날갯짓을 할 수도 있다. 설사 백조가 되지 않는다고 , 거울 속의 나를 미운 오리 새끼로만 보는 것은 어쩌면 보는 눈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니 나 자신을 보는 안목부터 키우겠노라고.








위로

/ 담쟁이캘리




산다는 건 어쩌면 끝 모를
등반의 여정일지도 몰라



오름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고
험준한 길이 있으면 쉬어가는 터도
가문 목 축일 시원한 계곡도 있겠지



내 가는 길이 어디로 가는지
끝이 어딘지 알 순 없어도, 돌아보면
나 말고도 많은 생(生)들이 정상을 향해
등반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지



삶은 매일이 초행이라
작은 돌부리에도 휘청거릴 때 있지
앞만 보며 걷다가도, 문득 뒤돌 때
한 마디 위로면 충분했는데 너는
말없이 나를 위로 떠밀더라



어릴 땐 높이 나는 게 꿈이었건만
예고 없이 오른 허공은 발 디딜 틈 없어
우두커니 견뎌야 할 외로움이더라



위로, 또 위로 오르던 가파른 언덕은
가히 내려다보기도 아찔한 드높은 절벽이고
자유 낙하하듯 하늘에 몸을 던지는
어릴 적 동심으로 간절히 바라던 일은
이제와 보니 상상할 수 없는 고독이더라



그대, 산다는 건 어쩌면 끝 모를
등반의 여정일지도 모르니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이 되어주고
험준한 길이 있으면 쉼터가 되어주는
가문 목 축일 시원한 계곡으로 있어주기를



내 가는 길이 어디로 가는지
끝이 어딘지 알 순 없어도, 돌아보면
많은 생(生)들이 함께 정상을 향한
등반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기를



삶은 매일이 초행이라
행여 작은 돌부리에 휘청거릴지라도
그대 문득 뒤돌 때, 혼자가 아니므로 부디
말없는 위로가 되기를 가만히 바라본다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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