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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캘리 Aug 04. 2020

늦더라도, 완주하고 싶어요

나를 나답게 해 주었던 '사람'의 기억



인생은 '말아톤'이다.



마라톤이라 말하지 않는 이유는 영화 <말아톤> 속 초원이 백만 불짜리 다리처럼 우리에게도 '백만 불짜리'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내 무릎은 상처와 멍이 가실 날이 없었다. 수도 없이 넘어졌고 다친 데 또 다치기를 반복했다. 달리기를 좋아했고, 꽤 오래도록 나의 장래희망은 경찰이었다.



매해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집에 가져온 가정통신문 하단의 빈칸이 가득 차도록 꾹꾹 눌러쓰시던 엄마의 손글씨를 온전히 이해하기 전까지는.



안녕하세요, 선생님.
우리 아이는 선천적으로 다리가 조금 불편합니다.
7개월 만에 조산하여 1.5kg의 미숙아로 태어나
한 달간 인큐베이터에 있었습니다.
뇌성마비 진단을 받아 5살 때까지 업고 다니며 키웠습니다.
… (중략) 그래도 구김살 없이 키워 밝은 아이니
조금만 관심 기울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편지 같은 글은 초등학교 졸업 전까지 매년 반복되어,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제와 고백하건대 나는 매 년 아이들과 친해지기도 전에, 경계선을 긋는 기분이 들어 몇 번이고 그 종이를 잃어버리기를 바랐던 적도 있었다. 한데, 가정통신문을 정말 깜박 잊고 집에 두고 가도 모든 선생님들은 나를 보고 나면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왔으니 숨긴다고 숨겨질 일도 아니었다.




그럼 나는 깍두기 할게, 나도 껴줘.




깍두기는 사전상으로 '어느 쪽에도 끼지 못하는 사람이나 신세'를 뜻하는 말이었으나, 달리기를 좋아하는 나에게 '깍두기'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으니 뛰어도 좋다는 정원 외 참석권 같았다. 달리는 속도와 상관없이 동네에서 하는 놀이는 모두가 친선이었으므로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면 될 일이었고, 이기고 지는 승부의 결과는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 동네는 오르막 길을 두고, 윗 골목 아래 골목이 나뉘어 있었다. 어린 시절, 동네 친구들과 하는 모든 놀이가 그렇듯 "OO아, 놀자~"라는 목소리로 시작되는 놀이 초대장은 골목 아이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아, "OO야, 저녁 먹을 시간이야."라는 엄마의 채근하는 목소리로 하나둘씩 어쩔 수 없이 파하며 끝났다. 



늘 아쉽게 끝나던 달리기 놀이의 여운은 초등학교 입학 후에도 이어져, 달리기가 있을 때마다 빠지지 않고 손 들고 나섰다. 그때까지 나에게 달리기는 '여기 붙어라'처럼 손 들면 껴 주는 놀이였다. 마냥 신나기만 하던 달리기는, '놀이나 친선'이 아닌 '경주와 시합'이 되면서부터 점점 멀어졌다.




넌 달리기 느리잖아, 빠져.




초등학교 1학년, 반대항 달리기 시합 날 달리기 하겠다고 손을 든 내게 한 친구가 말했다. 내가 느리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빠져야 하는 이유가 된다는 것과 '경주와 시합'에 깍두기는 없다는 것을 생애 처음 인지한 순간이었다.



아이들의 눈은 금세 승부욕으로 불타올랐고, 하는 수 없이 스탠드에 앉아 달리기 시합을 관람했다. 빠른 친구가 앞 친구를 추월하자, 아이들은 흥분하며 소리쳤고 뒤 따라오는 친구와 간격을 벌려 결승선을 통과한 친구에게 환호했다. 그 친구 덕분에 우리 반이 이겼고, 아이들은 그 친구를 일약 스타덤에 오른 연예인 대하듯 했다.




시합은 끝났으니 우리끼리 이어달리기할까?




담임선생님 말 한마디에 반 친구들끼리 간이 이어달리기가 시작됐다. 멋모르고 신난 나는 이번에도 손을 번쩍 들었고, 오래전 일이라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가장 마지막 순번으로 달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마지막으로 결승선을 통과할 무렵, "얼마 안 남았어. 조금만 힘내."라고 말해주던 선생님의 목소리와 몇 명 되지는 않지만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나 결승전을 통과한 나에게 박수를 보내던 친구들의 모습을 여전히 기억한다.



반대항 운동회가 끝나고 '달리기 시합'에서 이긴 우리 반 아이들은 모두 상을 받았다. 서로 마지막 주자였던 친구의 달리기 속도를 추켜세우고 있을 때, 담임선생님이 교탁 위에 놓인 종을 치며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고는 교탁 아래 선물꾸러미를 꺼내 올려놓으며 말했다.




이건 달리기 완주한 사람에게 주는 상이야.



 

시합에서는 졌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결승전을 통과한 나를 비롯해 결승선을 통과할 수 있도록 손뼉 치며 응원을 보내던 친구들을 위한 상이었다. 반대항 운동회 상품과는 별개로 담임 선생님이 따로 준비해 나눠주었던 상이었다. 이 상은 반 아이들 모두 같이 받은 상과는 다르게 하나 더 받는 것이라, '특별한 이들에게 주는 상'처럼 느껴져 주눅 든 마음마저 으쓱하게 했다. 시합에서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중간에 넘어져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1학년 5반 담임선생님께 3학년 때 받은 편지


  그 당시, 달리기가 느린데도 마다하지 않고 끝까지 달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어른이 된 지금, 그 좋아하던 달리기를 주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만히 생각하고 돌아보던 중에 그것은 바로 열등감 때문이라 답을 찾았다.



열등감의 사전적 정의는 아래와 같다.



다른 사람에 비하여 자기는 뒤떨어졌다거나 자기에게는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만성적인 감정 또는 의식. 열등감에 빠진 사람은 자기 자신을 무능하고 무가치한 존재로 여기며 무의식 속에서 자기를 부정하기도 한다. 합리적이거나 이성적이지 못하고 불안심리를 동반한 이상행동을 보이며, 항상 경쟁에서 자기는 실패할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도 한다.



이솝우화 <토끼와 거북이>를 보면 토끼가 달리기 시합을 하자는 다소 불리한 제안에도 거북이는 거절하지 않고 경주에 임한다. 거북이가 질 게 뻔히 보이는 경주를 흔쾌히 승낙한 것은 아마도 자기의 강점, 즉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 잘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할 줄 아는 마음이 있었으므로 토끼가 자기를 앞지르든지 말든지 그저 묵묵히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데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이다.



토끼도 달리기 시합 도중에 낮잠을 자면서 한 번도 깨지 않고 푹 잤을 거라생각하지 않는다. 중간중간 인기척에 잠을 깼어도, 멀찌감치 있는 거북이를 보고 여유 부리기를 반복하며 방심했을 것이다.



'설마 격차가 이렇게 벌어지는데 쉬이 따라잡겠어?

좀 더 자고 뛰어가서 따라 잡지, 뭐.'



어쩌면 토끼와 거북이의 시합은 겉모습은 달리기 경주 같지만 실상은 '마음 겨루기'였는지도 모른다. '자기는 절대 지지 않을 것'이라고 과신했던 토끼의 마음을, '승부는 중요하지 않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자'는 열등감 없는 거북이의 최선으로 이긴 그림이 아닐까.



  내 나이 스무 살 때, 누군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힘이 센 늑대와 약한 늑대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힘이 센 늑대?"
"아니, 네가 먹이를 주는 늑대가 이겨."



이 말은 힘이 세다고 해서 모두 이기는 싸움은 없다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힘'이 아닌 '응원'이라는 말인데, '다 잘 될 거다'라는 마음으로 묵묵히 자기 일을 해 나간다면 그 긍정의 길로 향하게 될 거라는 의미일 것이다.  



지금, 당신이 서 있는 인생이라는 길고 긴 '달리기 경주'에서 딱 한 번만 줄 수 있는 '먹이'를 손에 쥐었다고 가정해 보자. 당신은 그 먹이를 어느 쪽에 줄 것인가. 아마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긍정'의 결과를 가져다 줄 늑대에게 배팅하지 않을까.



우리 모두의 생(生)은 

누구나 행복하게 완주할 가치가 충분하니 말이다.


 






장래희망

/담쟁이캘리




너는 장래희망이 뭐니
 


모든 어린이에게 묻는 안부 같은 말에
제법 진지하게 하늘을 날고 싶다고 했다
 


이곳저곳 마음껏 가고 싶은 곳
경계 없이 자유롭게 날아가기를
맑은 두 눈 반짝이며 금방이라도 날개를 펴고
비행할 것처럼 날갯죽지가 간지러웠다
 


너는 뭐가 되고 싶었니
 


모든 어른에게 묻는 철 지난 안부 같은 말에
제법 슬픈 얼굴로 하늘을 날고 싶었다고 했다
 


이리저리 어디든 발길 닿는 곳
원 없이 자유롭게 날고 싶었노라고
반짝이던 두 눈에 드리운 빛바랜, 어느 날
감춰둔 날개가 꿈틀거려 날갯죽지가 간지러웠다
 


못내 이루지 못한 염원 담아, 힘껏
날아오르기도 전에 머리 위 서늘한 경계가 졌다
 


너는 뭐가 될 수 있니
 


두 발로 너무 오래 걸어
딛고 선 자리 위로 천장이 생겼고
 


오래도록 펴지 않아 먼지 쌓인 날개로
하늘을 나는 일은 유난히 별스러운
비행(非行)이 되었다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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