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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캘리 Oct 15. 2020

미치다

말 줄여버린 마음 : 빈 말의 의미




미치다

/ 담쟁이캘리




난 원래 그런 사람이야.
지난날, 그 말이 내 가슴을 울렸다
 


냉기 어린 말을 끝으로 한 세계가 닫혔다
고스란히 튕겨 나온 물음에

두 볼은 화끈거렸고
더는 그와 일상을 거닐 수 없음에

멀쩡하던 두 다리가 굳었다
 


여러 해 나란히 걷던 이가 다른 편에 섰다
눈길이 머문 자리마다

차오르던 온기는 간 데 없이
피하는 눈길마다 살얼음이 얼어

하려던 말은 자꾸만 미끄러졌다



예고 없이 맞은 이별을 억지 배웅하던 그 날 이후
생애 가장 무섭고 그늘진 말이 되었건만
 


난 원래 그런 사람이야, 네 앞에서만.
어떤 날, 너의 말이 예기치 않게 가슴을 울렸다
 


뜨거운 숨에 설익은 말 끝에서 불현듯 한 세계가 열렸다
갑자기 삐져나온 고백에, 두 볼이 달아오르고
평행선처럼 거닐던 별개의 일상이 서로 맞닿았다
  


주저하며 덧붙인 그 수줍은 고백은
말 못 할 시린 기억 녹여주는 볕이 되었고
일순간 너의 의미가 변했다
 


가슴을 울린 두 어절로, 너는 나에게 미쳤고
이상하고 신기한 그 날로부터 나는 너에게 미쳤다
 



미치다: 공간적 거리나 수준 따위가 일정한 선에 닿다




피하는 눈길마다 살얼음이 얼어 하려던 말들이 미끄러지는 일을 겪은 사람은 안다. 아무 말하지 않음이 되려 묵직한 말이 되어 가슴을 내려앉게 만든다는 사실을. 죽을 것 같은 시기를 지나 다시 숨통이 트여 본 사람은 안다. 비슷한 말이라도 '덧붙인 몇 마디'에 언어의 온도가 바뀌고, 반전의 결말에 닿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라는 것은 그토록 신비하고 오묘한 힘이 있다.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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