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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캘리 Nov 05. 2020

라면 먹고 갈래요?

유통기한이 짧은 라면일수록 빨리 불을까



"요즘은 소개팅 해도 커피 한 잔이 끝이야."
"왜? 애프터 신청도 안 와?"
"아니, 그냥 뭘 더 하고 싶지가 않다고 해야 하나. 지금은 혼자가 편해."



직전의 연인과 나쁘게 헤어진 것도 아니니 행복을 빌어주는 일은 어렵지 않았으나, 함께 나누던 감정이 바닥을 보일 때까지 몽땅 퍼다 부은 탓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데 시간이 들었다. 한 시간도 안 돼 비어버린 찻잔처럼 금세 방전되고 마는 마음은 누구를 새로 들이는 일이 힘에 부치는 듯했다. 모든 일은 시간이 약이라 여기며 휴일의 공백을 취미생활로 채웠다. 때때로 내 마음도 읽기 힘든 마음을 마주할 때를 떠올리며, 스스로 독해력을 키워야겠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들어 덜컥 책모임에 가입했다. 첫 모임의 낯선 감정은 사라지고 공통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 생각을 나누는 일은 생각보다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날도 여느 모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임을 마치고 돌아가던 보통의 주말 오후였다. 예기치 못한 늦잠에 삼십 분 정도 지각하는 바람에, 제대로 통성명도 못한 것만 빼면. 모임 말미까지 늦어서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저마다 각자의 행선지를 따라 흩어졌다. 가는 길이 같아 심심하지 않겠다며 반가워하던 그 남자만 제외하고.



"저보다 어리죠? 나이 많아 보이지는 않은데?"
"맞아요, 나이 별로 안 많아요."



그와 나는 간단한 통성명만 하고 열차에 올라탔다. 은근슬쩍 나이를 묻는 말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딱 봐도 나보다 어려 보이는 앳된 얼굴이었지만 말을 아꼈다. 나를 자기보다 어리게 보는 건 그의 자유고, 기껏해야 서른의 문턱을 넘은 내 나이를 많다 생각한 적 없었다. 여러 말 대신, 열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흔들리는 내 몸을 살짝 감싸는 그를 향해 눈인사를 건넸다.



"원래 별로 말이 없는 편이에요?"
"뭐가 궁금한데요?"



예상치 못한 나의 대답에 옆 자리에 선 그의 시선이 길을 잃고 흔들렸다. 때마침 열차가 멈춰 섰고 순식간에 불어난 승객들 때문에, 적당한 거리를 지키고 섰던 그와 나의 거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순간 그는 짧은 들숨을 쉬며 주춤하는가 싶더니 곁눈질로 나를 쳐다보고는 말했다.



"라면 먹고 갈래요? 혹시 약속이 없다면요."
"낮과 밤이 바뀐 대사 같은데요?"



평소 같으면 단칼에 거절할 일이었건만 첫인상의 느낌이 자리 잡기도 전에 모든 일들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아니 벌어졌다고 표현하기도 거창한 사소한 일이었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질 때, 그칠 줄 모르고 갖다 붙이기 바빴던 물음표들은 지난 모든 인연들에게 섣불리 마침표를 찍게 했다. 모든 결정을 앞두고 어른스러워야 한다는 강박을 뿌리치지 못한 어리숙함에 지나지 않았다. 여전히 '어른'이라는 옷이 몸에 맞지 않아 헐겁고 서툰 것들 투성인 주제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 진지했다. 적당히 나이답게 진지하고 마음 가는 대로 가벼이 움직이자 마음먹으니 그리 복잡하거나 어려울 것도 없었다. 고작 밥 한 끼일 뿐인데.






여러분은 라면 끓일 때 뭘 먼저 넣어요?
면 아니면 수프?



불과 두 시간 전, 책 모임에서 만난 그와 나는 소설 <서울역> 속에 등장하는 남녀 주인공에 대해 이야기하다, 처음 눈을 마주쳤다. 모두가 진한 국물 맛을 위해 수프를 먼저 넣는다고 말할 때, 둘만 유일하게 면을 먼저 넣는다고 말해 통성명하기도 전에 공감대를 형성했다. 모임에서 나눈 책 속에 등장하던 라면에 얽힌 사랑관을 곱씹다가 나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던 기억을 떠올려 보면 오늘 꼭 그가 아니더라도, 누구라도 불러 라면을 먹었을 일이었다.



"유통기한 빠른 라면부터 골라 끓여먹는 수호가 이해돼요?"



꼬들하게 나온 면발이 살짝 퍼지기를 기다리며 젓가락을 휘저을 때 그가 물었다.



그가 묻는 소설 <서울역>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대략 이렇다. 하루에도 몇십 번씩 수 갈래의 선로를 오가는 서울역 근처에서 동거하면서 벌어지는 일상 속에서 사소하고 자잘한 일들로 달라지는 남녀의 심리를 다룬 단편 소설이었다. 그중에 모임 내내 설전을 이룬 대목이 바로 '유통기한이 가장 빠른 라면을 골라 끓이는 장면'이었다. 소설 속 연인으로 등장하는 수호와 민정은 라면을 좋아해 찬장 가득 채워 두고 생각날 때마다 꺼내 먹는다.



둘의 그 모습을 통해 각자의 사랑방식이 드러나는데, 수호는 민정이 신선한 라면을 먹기를 바라는 마음에 유통기한이 짧은 라면은 늘 자기 몫으로 미뤄둔다. 마트에 진열된 봉지 묶음이나 박스를 통째로 사 들고 와 먹으면서도, 단 한 번도 유통기한을 살핀 적 없는 나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배려라 지나치게 섬세한 수호의 모습이 당혹스럽기도 했다. 더구나 소설의 중반부에는 수호의 그런 자잘한 배려를 알 리 없는 민정이 홀로 라면을 끓일 때, 수호와 반대로 유통기한이 가장 느린 라면만 고르는 장면을 시작으로 '권태'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1호선, 4호선, KTX, 경부선까지. 하루에도 몇십 번씩 서울역을 거쳐가는 열차의 복잡한 레일을 떠올리며 소설의 제목을 참 잘도 지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는데, 여러 갈래로 뻗히는 남녀 사이는 오죽할까.


"유통기한이 짧은 라면일수록 면발이 더 빨리 불까요?"



나란히 앉아 처음으로 겸상을 하는 그의 모습을 빤히 보던 내가 물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 유통기한부터 살피는 마음은 어떤 모양일까. 자주 닿는 곳마다 절로 굽어 자유자재로 형태가 바뀌는 말랑한 모습일까. 마음 가는 사람이 있으면 없던 지혜도 생긴다던데, 수호의 행동을 가만히 곱씹으며 그 마음을 헤아려보다가, 그 마음은 타고난 성정이 아닌 곁에 있는 상대를 위해 기꺼이 제 눈높이를 낮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집 라면 맛 괜찮죠?"
"원래 라면은 남이 끓여준 게 제일 맛있는 거예요. 맛이 없을 수가 없죠."


지금 내게 호감을 보이며 서서히 끓기 시작한 그가 보이는 감정의 유통기한은 과연 언제까지일까. 이름과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 말고는 아는 것이 없었다. 모르는 것 투성인 '알 수 없는' 그와 함께 있는 일이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오랜 밤잠 설치느라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던 불면의 마음이 이제야 잠자리에 든 것처럼 별 이유 없이도 편안했다.



"괜찮으면 우리 또 볼래요?"



말이 잘 통한다는 핑계로 자기 집을 지나쳐 나란히 걷던 그가 물었다. 망설임 없이 다가오는 그의 말이 놀랍기는 해도, 어쭙잖게 재는 것보다는 잰걸음이 낫다는 마음이 들었다. 부끄러운 듯 웃으며 대답을 기다리는 그를 바라보다 자고로 라면은 살짝 퍼진 부드러운 면발이 제맛이지만, 문득 설익은 꼬들한 면발도 그만의 매력이 있지 않을까 싶어 졌다.



그러려면 우리 번호 교환부터
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요?







어떻게 생각해

/ 담쟁이캘리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떠올려 나도 모르게
그리고만 얼굴인데 말


다물었던 입 사이로
무심코 떠올려 나도 모르게
부르고만 노래인데 말야


스쳐가던 그 눈길이
무심코 멈춰서 나도 모르게
훑어보던 모습인데 말야


깨닫지도 못 한 사이
기어코 마음에 담아 푸지게
생각하던 그대인데 말야


어떻게 생각해


습관처럼 하던 일에
기어코 까닭을 묻기 바쁘네
어찌 생각하느냐고 말야


가없는 그 무심결로
기어코 퍼지게 불고만 마음에
그 이유를 물어서 무엇해


까닭 없이 궁금해져
머릿속 자연히 차오른 것인데
그리움에 이유 있을 리가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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