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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캘리 Oct 21. 2020

소리의 집

종일 나를 흔드는 '도발'




당신에게 전하는 마땅한 첫 문장을 고르다,
내 마음속 당신의 깊이를 알았습니다.




나는 아직도 그 날을 잊을 수 없습니다. 분명 당신은 발자국 소리도 내지 않았는데 고스란히 마음에 담긴 걸 보니, 제 심장이 귀보다 먼저 당신에게 닿았나 봅니다. 당신은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도발이었습니다. 당신은 내 고요한 일상에 파장을 일으키며 나타났습니다. 한낮의 볕처럼 시린 겨울 녹여주는 생명의 파장과 같았습니다. 이듬해 봄, 민들레 홀씨처럼 부유하던 내 마음은 나도 모르게 당신 곁에서 꽃 피었습니다.



소리 없는 파장이 이다지도 큰 울림을 주는지 몰랐습니다. 내 나이 열일곱 어떤 날, 귓가에 울리던 소리가 예고 없이 수면 아래로 잠겼습니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힘없이 꺼져버린 그 날 이후 내 일상은 날 선 고요함의 연속이었습니다. 섣부른 동정의 눈빛에 담긴 난해한 언어에 수없이 걸려 넘어졌고, 무언의 날카로운 시선에 수없이 베었습니다. 평범하던 일상에 균열이 일었고 그들과 나 사이, 서늘한 경계가 생겼습니다. 세상의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고 했던가요. 내게는 당신이 그랬습니다. 여러 해 여러 날 소리 없는 울음만 가득하던 삶에, 당신은 가장 소란스러운 파장이었습니다. 작년 겨울 내 손바닥 위에 손끝으로 수줍게 써내려 간 당신의 고백을 기억합니다.



나는 사랑에 자격을 갖다 붙여 당신의 고백을 거절했습니다. 허나 당신의 고백은 실로 인상적이었습니다. 내 감은 눈 안에 불현듯 빼곡히 들어찬 날도, 밤새 성가시도록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 바람에 잠 못 이루던 날도 있었습니다. 당신의 고백은 분명 나를 도발했음에도, 우리 사이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당신과 나는 다른 생의 걸음을 걸었기에 결코 닿을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적어도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당신과 만나기로 하고, 약속 장소로 가던 날이었습니다. 뒤에서 경적을 울리며 달려오던 오토바이 소리를 듣지 못해 배달원과 부딪혀 넘어졌던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입고 나온 옷은 엉망이 되었고, 길을 지나던 사람들은 주위를 에워싸며 싸늘한 눈길로 나를 발가벗겼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당신에게 연락했을 때, 당신에게 온 메시지를 잊은 적 없습니다. 그 날 저녁, 나는 생애 처음 목놓아 울었습니다.



‘내가 그쪽으로 갈게’ 그 말이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당신은 모릅니다. 생 자체가 봄볕이었던 당신과 여러 해 시린 겨울을 살아온 나에게, 감격적인 도발로 내 일상으로 들어왔습니다. 서로 다른 삶이 하나로 포개진 어떤 날, 당신은 허락도 없이 내 마음에 소리의 집을 지었습니다. 제 아무리 고요한 일상도 당신 앞에서는 널뛰었고, 당신에게 닿을 때마다 온몸의 감각이 행복한 비명을 질렀습니다.



당신의 손길, 눈길, 발길 곳곳에 담긴 소리가 온기로 변해 마음을 두드렸습니다. 당신의 너른 코트 주머니 속에 내 손을 넣고 걸을 때도, 당신의 팔을 베고 누워 가슴에 귀를 갖다 댈 때도 큰 울림이 일었습니다. 당신은 내 생애 가장 소란스러운 파장이었습니다. 소리 없이 찾아온 소란한 사랑이었습니다. 당신을 만나고, 당신을 사랑하게 해 주어 고맙습니다.



* 도발: 남에게 집적거려 (성가시게 하여) 일이 일어나게 하는 것




이 글은 김범수의 '사랑의 시작은 고백에서부터'라는 곡을 듣고 떠오른 영감을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사랑은 소리도 없이 느닷없이 찾아와 시작되는 순간, 각자의 마음에 소리의 집을 짓게 된다는 것과  '도발'이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 어감을 사랑에 대입했을 때, 전혀 다르게 읽혀 또 다른 파장이 일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극적으로 표현해 본 글입니다.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위 노래와 함께 읽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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