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담쟁이캘리 Nov 29. 2020

화이트 아웃의 계절이 왔다

12월 (끝과 끝)



손꼽아 기다려도 너는 결코 서둘러 오는 법이 없었다. 고작 살랑대는 바람결에도 겨우 붙든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려 꺾일 때도 너는 내게 먼저 와 손 내미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군말 없이 말미에 나타나 끝맺음을 하고 갔다. 지난날의 기억도 후회도 몽땅 막을 내리고 홀연히 사라졌다. 서운함이 들 때도 있었으나 묵묵히 제 몫을 하고 가는 우직함에 날뛰던 마음도 금세 잠잠해졌다. 열두 달 순번 어김없이 기다려 제 할 일을 하는 12월이 12월다워 퍽 좋았다.



겪을수록 세상은 요지경이었다. 춘삼월에도 눈발이 날리고 단풍이 들기도 전에 서리가 내려 물이 얼었다. 켜켜이 쌓인 지난 세월로도 어림잡을 수 없는 이상기후가 나타나도 그것을 ‘이변’이라 부르며 저마다의 말을 보탤 뿐 별 다른 대책이 없었다. 자고로 생(生)은 절대 예고가 없으므로 경계를 늦출 수 없는 교통사고 다발지역 같았다. 수없이 일어나는 사건 사고에 오가는 길목마다 표지판을 세워 두었으나,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잊는 건 언제나 내 몫이었다. 얄궂게도 생(生)은 굽어지는 길목마다 낯을 바꿨다. 웃는 낯이라 방심하면 불현듯 뒤통수를 쳤고 사방이 막혔다 생각할 때 기가 막히게 문을 열어두고 그 틈으로 빛을 비췄다. 알다가도 모르는 게 인생이라지만 정말 겪을수록 세상은 요지경이었다.



끝순으로 와서 끝을 맺고 가는 네가 나는 늘 새삼스럽고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속절없이 끝을 향하는 순리 그대로의 흐름에 몇 번이고 두 손 두 발 드는 것 같은 항복과도 같은 마음을 느낀 적도 있었다. 한데, 미운 정이 무섭다고 여러 해 오가는 너를 마주하며 썩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쉼 없이 널뛰는 인생에서 12월, 너는 변함없이 한결같아 좋았다. 내가 서두르든 그렇지 않든 늘 제 속도에 맞춰 거닐어 늘 때가 이르면 제 자리를 지키는 모습이 미더워서 좋았다. 좌로 우로 치우치는 수없는 갈림길을 지나다 문득 너를 볼 때면 모든 일에 끝이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그 자체로 위로가 되기도 했다.



세상은 요지경인 게 앞과 뒤가 달라 그런 것은 아닌가 싶은 순간도 있었다. 당연한 기쁨이었던 것들이 말도 안 되는 슬픔으로 돌변하고 들춰보기조차 버겁던 아픔도 어느새 너털웃음으로 털어지는 날이 기어코 오고야 마는 것.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 같은 그 시간은 늘 마무리할 때가 되어서야 돌아볼 수가 있으므로. 가만히 더듬게 만드는 12월이 언젠가부터 썩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오래 보아야 예쁘다 너도 그렇다'라고 했던가. 나태주 시인이 말한 들꽃은 어쩌면 그 꽃 자체가 아니라 그 꽃이 보낸 생의 전부를 두고 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드넓은 뜰에 한가득 피었으나 이름 모를 그 꽃들마저도 실은 각자의 생이 있고, 똑 닮아 보이는 모습일지라도 저마다의 속도대로 싹을 틔우고 줄기를 뻗고 수도 없이 흔들리며 마침내 피어난 생이니 자세히 보면 예쁘지 않은 생이 없노라고 토닥여주는 시를 빌린 위로일 테지. 그렇게 생각하니 올해 내가 마주할 12월이 참 고마웠다. 어느 것 하나 능숙하지 못한 걸음으로 갖은 골짜기와 마음의 사막을 지나며 스스로에게도 부끄러울만치 깊은 수렁에 빠졌던 날들. 빠져나올 생각은커녕 그곳이 본래 내 자리였던 마냥 의심 없이 어둠을 끌어안았던 시간들. 더듬더듬, 지나온 날들을 가만히 더듬어 보니 이리저리 흔들리고도 끝자락에 용케 닿았다는 생각에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선 12월이 고마웠다.



'원래 바람은 불어야 맛이고 비는 내려야 그친다'라고. 기나긴 터널 같은 시간을 지날 때마다 요동치는 마음을 위로해주던 고마운 이들의 말이 절로 이해되었다. 결코 지레짐작할 수 없는 수없는 오늘이 스스로 다잡은 마음을 부지불식 간에 또다시 흔들어 놓는 날이 있을 지라도, 나를 둘러싼 이 고마운 풍경들은 어김없는 한결같음으로 우직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어줄 것이므로.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비가 퍼부을지라도 12월은 그 마저도 하얀 눈으로 변하게 해 줄 힘이 있으므로. 어지럽고 요지경인 풍경마저 온통 하얗게 덮어 '화이트 아웃' 시킬 수도 있는 마법을 부릴 줄 아는 것이 바로 12월이므로.



되돌아온 올해의 너는, 나의 어느 날에 끝을 고하고 어떤 세계의 문을 닫을지. 또 어떤 예측할 수 없는 세계의 문을 열어 또 다른 시작을 알릴지. 전에 없던 고대하는 마음으로 두 팔 벌려 너를 끌어안기로 다짐했다. 겨우내 잎새 하나 걸치지 못한 앙상한 몸뚱이도 묵묵히 견디다 보면 청록의 옷을 짓고 불긋불긋하게 제 색을 내는 날이 있으므로. 한 번도 거름 없이 마무리를 짓고 떠나 주는 12월의 등을 보며, 나 스스로 흐드러지게 필 어떤 날을 위해 오늘을 꾸준하게 살아가기로 다짐해 본다.






종이접기

/ 담쟁이캘리




올해의 마지막 한 장
무던히 넘기던 달들 이건만
한 장밖에 남지 않은 시간이라니
미처 오지 않은 시간마저 야속하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세던 대로 세는 것뿐인데
제 아무리 아쉬워도 한 장뿐이라니
미처 닿지 않은 내일마저 애잔하네


남은 시간은 종이 한 장 남짓
고작 종이 한 장으로 무얼 하나
그런 아쉬운 마음일랑 접고
저 멀리 날려버리자


네 변의 길이가 똑 닮은 종이
분명 네모난 종이였는데
끝과 끝을 맞춰 접으면
또 다른 모양이 되네


남은 시간은 종이 한 장 남짓
고작 종이 한 장으로 무얼 하나
그런 아쉬운 마음일랑 접고
저 멀리 날아가 보자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나
남은 시간 동안 제대로 접고
훨훨 저 멀리 날아가 보자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라면 먹고 갈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