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두 글자밖에 되지 않은 말을 썼다 지우며 그와의 거리를 가늠했다. 그와 시시콜콜한 안부를 나누던 게 언제였는지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바빠도 생사 보고는 하자던 최소한의 예의만이 우리 관계를 간신히 지탱하고 있었다. 기상시간, 출퇴근 시간, 귀가시간마다 도착하는 메시지는 온통 마침표 투성이라 이제는 권태로운 이 관계에 마침표를 찍어야 할 수순인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렇게 매일 밤 굳은 결심으로 내린 이별의 닻은 소리 없는 울음에 속절없이 물이 불어, 몇 번이고 닻을 올리고 내리기를 반복했다. 과연 그를 떠나 다시 항해할 수는 있을지. 쉬이 잦아들 것 같지 않은 우기雨期가 언제까지 지속될는지. 그에게 할 말을 썼다 지우며 수도 없이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기를 반복했다. 결국 오늘도 우리의 대화창에는 곱씹을수록 꺼끌대는, 모래알 같은 마침표만 가득했는데…….
"아니, 그냥."
우리에게도 그냥이라는 말에 주체할 수 없이 설레던 밤이 있었다. 퇴근은 몇 시에 하는지, 이후에 약속은 없는지, 주말에는 무얼 하는지 나를 향해 줄줄이 이어지는 물음의 이유는 늘 '그냥'이었다. 다음 날 이른 출근을 앞두고 피곤한 와중에도 한달음에 달려와서도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던 그는 그 말 뒤에 수줍게 이 말도 덧붙였다. 보고 싶어서. 꾹 참았던 말이 새어 나왔던 그 날, 나는 내 눈앞에 그를 그냥 일단 만나봐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내 마음이 그러니까.
시도 때도 없이 '뭐해?'라는 말로 나의 뻔한 하루를 물어, 시시하기만 하던 날들이 뻔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던 순간이 있었다. 잠은 잘 잤는지, 밥은 먹었는지, 퇴근은 했는지. 매일 묻던 것들을 묻고 또 묻고, 했던 말들을 하고 또 하는데도 그 반복된 이야기들이 전혀 지루하지 않아 절로 수다스러워지던 날들이 있었다. 쉴 틈 없이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그 마음 다 읽고서도, 괜스레 확인하고 싶어 '왜?'라고 되묻다 새어 나온 웃음 들켜버린 적 있었다. 그때마다 딴청 피우며 '그냥'이라고 말하던 그의 말에 설레 꼴딱 밤 지새우다 얼굴만큼이나 뜨거워진 핸드폰을 핑계 삼아 아쉬움에 통화를 끝내던 그 시간들은 어디로 사라진 건지. 온종일 수 개의 물음으로 넘실대던 그는 숨죽인 듯 잠잠해 진동하지 않았다.
더는 떨리지 않는다던 그를 보며 일상을 송두리째 흔들던 지진은 이제 끝났다며 안도했건만, 그에게 떨리지 않는 일상은 메마른 사막과도 같았는지 자주 망망대해로 가 종일 잠수를 타기도 했다. 어느 겨울밤, 그에게 무슨 일 있었는지 물었을 때 돌아온 답은 '그냥 좀 바빴다'는 게 전부였다. 오래전 그 날처럼 똑같이 '그냥'이라고 말했지만 그 밤은 유난히 추웠던 기억이 났다. 환기를 위해 잠시 열어둔 창틈 새로 무언가 빠져나가버린 기분이었다. 숱하게 나를 찾던 진동소리는 눈에 띄게 줄었다. 딱 다투지 않을 만큼의 선을 두고 지키는 것만 같았다. 잠잠해진 핸드폰을 보며 더는 진동하지 않는 우리의 일상을 탓하며 불쑥 찾아든 권태를 받아들였다.
답하다, 한때는 내 것이었던 것에 대하여
"아니, 그냥."
뭐하냐는 내 물음에 심드렁하게 왜냐고 묻는 그의 말에 뒷걸음치듯 답했다. 분명 아직 내 카톡 즐겨찾기에 네가 있고, 전화번호부에 네가 '내 거'라고 쓰여있는데……. 낮이 있으면 밤이 있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냥, 내가 사는 세상 이치가 그렇다는 것쯤이야 모르지 않건만 왜 이별은 늘 억지로 떠 넣는 밥숟가락처럼 매번 더부룩한 건지. 숱한 밤 서로의 품을 찾아 헤맬 때마다 결국은 서로가 서로의 도착지가 되어 줄 거라는 철없는 믿음 때문이었으리라 생각했다. 무턱대고 철석같이 믿어버린 시간들이 와르르 무너져 늘 더 기대하고 꿈꾸던 쪽이 약자였다. 실은 세상의 모든 관계에는 시작과 끝이 있고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는 것이 순리였다. 그저 낭만에 취해 먼저 눈 감아버린 내 잘못이었다. 시킨 사람도 없이 스스로 꾼 꿈은 깨는 것 역시 자기 몫이었다. '그냥' 네가 좋아서 시작한 무모한 모든 관계는 헤어짐에도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그냥' 끝이 가까워 왔을 뿐.
제 아무리 생생한 오늘의 기억도 눈 감았다 뜨면 어제가 되는 일처럼 모든 관계는 시작하는 순간 끝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당연했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이 하는 행동에는 '유효기간'이 있어 어쩔 도리 없는 일이었다. 주어진 시간 내에 최선을 다해 행복하는 것 말고는. 그래도 문득 궁금하기는 했다. 아니 그냥……, 그때 시도 때도 없이 나를 찾던 너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지금 뭐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자연히 그려지던 너의 패턴은 사라지고 '알 수 없는' 너만 남아, 나란히 걷고 있다 착각한 너는 지금 어디까지 간 건지 다급하게 묻는다. 본래 이때쯤이면 집에 도착했을 시간인데, 왜 아직도 너는 밖에 있는 것인지. 서로의 보금자리가 되어줄 거라던 믿음이 밑을 드러낸 기분이었다. 다 안다고 생각한 네가 나의 궤도를 한참 벗어나 걷는 모습이 아득하기만 했다.
오래전 그 날처럼 시시한 일상 얘기나 하면서 추억 곱씹을 요량이었는데, 시시콜콜한 이야기마저 쉬쉬하다 불쑥 찾아든 권태만 더 키웠다. 잦은 다툼도 이별보다 나을 거라며 늘 져주는 게 익숙하던 우리였는데, 좀처럼 끝나지 않는 싸움에 지쳐 결국은 그 흔하고 자잘한 다툼마저 입을 닫았다. 예전처럼 싸우지도 않고 때마다 보내는 메시지로 너는 오늘도 무사하다 생사 보고를 하는데, 왜 그때마다 우리의 관계는 생사의 갈림길에 있는 것만 같은지. 오늘도 무사하다는 너의 말에 무사히 버티고 섰던 마음이 왜 고꾸라지고 마는 건지. 이번에도 그저 몇 번 먼저 눈 감고 나면 지나갈 우기雨期인 걸까.
나란히 걷던 우리가 이렇게 멀어지는 동안 앞서 간 너는 지금 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 건지. 한치의 의심도 없이 내 것이라 말하던 너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한 때는 내 것이었으나 지금은 사라진 것에 대하여 떠올리는데, 왜 머릿속 한 가득 네 이름만 꽉 차는 건지. 입 밖으로 이별을 꺼내지도 않았건만, 어쩌면 너는 이미 내가 잃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고 스스로에게 답했다.
소란했던 시절
/ 담쟁이캘리
지금 뭐해?
하루에도 수십 번씩
틈 없이 진동하던 너의 물음
답하고 또 답해도 금세 되돌아오지
별다른 이유도 없이
아니 그냥
하루에도 수백 번씩
가없이 물어대던 나의 안부
말하고 또 말해도 금세 되물어오지
별 뜻은 없다고 숨겨
시도 때도 없이 울려
시계 위 고이 올려 두었던
애끓는 내 마음이 닳고 닳는 동안
시침은 빠르게 흘러
지금 뭐해?
시도 때도 없이 울던
침대 맡 너의 연락 뜸해져
저무는 내 하루를 묻는 일은 줄고
찾아든 권태만 깊어
아니 그냥
밑도 끝도 없이 네가
못내 날 찾아 헤맨 시간들
소란한 그 시절을 그려 나도 몰래
그때의 너에게 묻지
지금 뭐해?
하루에도 수십 번씩
틈 없이 진동하던 너의 물음
읽히고 또 읽히던 그때 그 마음들은
어디서 뭐 하는 건지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