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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캘리 Oct 22. 2020

크레센도가 시작되는 순간

내가 제일 작게 느껴질 때 크레센도가 시작된다



내가 가장 작은 순간이
바꿔 말하면 크레센도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며칠 전 종영한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흘러나온 대사 하나가 마음에 콕 박혔다. 나 자신이 제일 작게 느껴질 때 크레센도(점점 크게)가 시작된다니. 절로 공감되는 역설적이라 저 말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음악 용어 중에 크레센도라는 말
점점 크게라는 뜻이잖아요.
점점 크게라는 말은 반대로 생각하면
'여기가 제일 작다'라는 뜻이기도 해요.
여기가 제일 작아야 앞으로 점점 커질 수 있는 거니까.

-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드라마에서 일부 발췌




되돌아보면, 나는 생각보다 빨리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드디어' 되었다는 감격보다는 '생각보다 빨리' 된 결과에 잠시 스텝이 엉켰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소속해 있는 집단을 떠나 퇴사를 하고, 제주도로 내려가 한 달 살이를 할 작정이었다. 그곳에서 시끄러운 속을 비우고 다시 새로운 것으로 채우면 몸도 마음도 다시 건강해질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내린 결단이었다. 세상 모든 마지막이 그렇듯 끝을 고민할 때는 온갖 생각이 뒤엉켜도 막상 결정을 내리고 나면 도리어 후련해지는 때가 온다. 나 역시 그랬고 마음의 갈피를 잡고 나니 금세 도달한 결론에, 그렇게 떠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이미 제주도는 '한 달 살기' 유행을 한 차례 거친 지역이라 그런지 머물 곳을 정하는 일은 어려울 것이 없었다. 한 달 간의 생활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계획한 것들을 실현할 수 있는 최적의 위치에 터를 잡으면 될 일이었다. 물론 생활자금 같은 현실적인 조건들이 우선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했지만, 평생을 두고 봤을 때 지금이 내 생애 가장 오래도록 아무 걱정 없이 쉴 수 있는 시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마저도 어렵지 않았다. 돈으로 시간을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이 정도면 오히려 헐값이다 싶었다.



머릿속으로 그 시간들을 미리 그리면서 나를 설레게 한 것은 '나만의 글 쓰는 방'이 생긴다는 사실이었다. 소박하게 표현하면 방이고 거창한 표현을 들자면 일종의 작업실이었다. '한 달 살기'지만 그 시간만큼은 내가 좋아하는 글을 쓰면서 진짜 작가가 된 것처럼 살아보자 마음먹어서 그런지, 떠나기 전부터 마음이 들떴다. 그렇게 마음을 굳히고 나서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주변 정리였다. 매 주말마다 규칙적으로 하던  취미모임을 멈췄고,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묵묵하게 도맡아 해오던 일들은 하등 중요하지 않은 일로 치부되고, 홀로 꾸려온 크고 작은 성과들이 깔아뭉개지를 반복했다. 생색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단 한 번이라도 '고생했다'는 따뜻한 말 한마디도 없이 내가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이미 마음은 퇴사를 결심했다. 회사는 자아실현하는 곳이 아니라 생활에 필요한 자원을 벌기 위한 곳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개인의 출세를 목적으로 다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개인이 아닌 '팀'으로 이루어진 집단에서 내 존재가 깡그리 무시당했음을 알았을 때 더는 소속의 이유가 없음을 알았다. 



쓸모없다고 했으니 떠나는 일도 바람처럼 가벼울 줄 알았다. 그럼 나도 회사를 떠나는 여느 동료들의 퇴사 인사처럼 '도비는 자유예요'를 외치고 나와, 제주도 한 달 살기를 하면서 브런치 작가에 정식으로 도전해 보면 되겠다 싶었다. 허나 쿨하게 나오겠다는 결심과 달리, 자존감을 바닥 친 그날 밤  마음도 같이 주저앉았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성치 않은 몸 때문에 넘어지는 일이라고는 이골이 났다. 멍들었다가도 아물기를 반복한 지 오래라, 다시 일어나는 일은 일도 아니었다. 넘어졌다가도 시간 지나면 다시 돌아와 헤실헤실 웃으며 엉기는 모양이 꼭 물방개를 닮았다고 해서 어릴 적 별명이 '물방개'였다.



하지만 그건 과거의 일이었고, 옛날에도 괜찮았으니 당연히 괜찮을 거라는 내 착각이었다. 밤새 괜찮지 않은 마음을 마주하며 '살기 위해' 글을 썼다. 세상에는 서툴고 부족하고 엉성한 사람들 투성인데, 왜 꼭 성공해야만 하는 걸까. 실수하고 넘어져도 바로 일어나지 않아도 괜찮다고. 아물 때까지, 그때가 언제든지 편히 주저앉아 있어도 괜찮다고 말해주지 않을까. 실수하고 실패하는 인생은 정말 무의미한 걸까.



Jtbc <한끼줍쇼> 이효리 편 중 이미지 발췌



<한끼줍쇼>에 나온 이효리가 길에서 만난 아이에게 ' 훌륭한 사람이 되느냐고, 그냥 아무나 돼'라는 말을 해 주었을 때. 여기저기서 기사 제목으로 따 와서 쓰기는 바쁠 정도로 회자됐는데, 왜 세상은 '그냥 아무나 돼'라고 하지 않는 걸까. 아픔을 딛고 일어선 이야기, 실패를 교훈 삼아 성공한 이야기, 장애를 이겨내고 무언가를 해낸 이야기. 왜 끝없이 일어나고 성공하고, 이겨내야만 하는지 '자꾸만 빨리빨리' 무언가를 해 내라고 채근하는 것 같은 느낌에 안 그래도 주눅이 든 마음이 잔뜩 쪼그라들었다.



보통의 삶도 괜찮을 수 있지 않을까.
사람마다 각자 그릇이 있고 자기에게 어울리는 옷이 있는데. 아무리 옷이 날개라도, 자기한테 맞아야 테가 날 텐데. 별 것 아닌 것 같은 보통의 삶 속에서도 충분히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동백꽃 필 무렵>이라는 드라마에서도 보면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 자기 마음에 꽃밭이 있고 기적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착실하게 모아 온 마리오 동전 같은 거라고 했다.



지금, 꼭 그 기적이 일어나야만 하는 걸까. 



그렇게 '보통의 기적'을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에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을 썼다. 모두에게 저마다 마음의 꽃밭이 있으니 함부로 들어가지도, 밟지도 말고 눈으로만 보라고. 그렇게 애달픈 마음으로 나를 위로하는 글을 썼다.





덜컥, 그 글로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회사에서는 타 팀으로 인사발령이 나 새로운 조직으로 갔다. 제주도 한 달 살기를 시작하지도, 퇴사 의사를 밝히지도 않은 시점에 내 계획보다도 먼저 브런치 작가가 되어 나만의 '가상의 글쓰기 방'이자 '작업실'이 생겼다.


작가는 초등학교 때부터 꿈꾸던 일이었다. 누구에게도 터놓지 못하는 이야기를 글로 터놓기 시작하다, 습관처럼 좋아진 일이었고, 정말 작가를 꿈꾸기 시작할 때는 밥벌이하기 어려운 직업이라는 이유로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 책상 하나 없이 글을 썼다. 책상은 오빠 방에만 있었고, 책상을 사 주면 작정하고 글을 쓸까 봐 못 하게 하려는 나름 부모님의 초강수였다.



손 벌리지 않고 글 쓰려고 엉겁결에 시작한 스물여섯 무렵의 사회생활이 여태껏 이어져, 꿈으로부터 너무 멀어졌다고 생각했다. 설사 되돌아간다  그저 취미이자 여가였다. 집착처럼 지난 그림자를 쫓고 있을 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쓸모없는 사람 취급을 받은 날 밤 쓴 글로 '(글) 쓸 만한 사람'이 되고, 작가의 꿈에서 멀어졌다 생각할 때 '글 쓰는 방'이 생겼다.



지나온 시간들을 더듬어 보면 생애 모든 순간에 크레센도가 있었다. 칠삭둥이로 태어나 탄생의 축하보다 살 가망이 없다는 말을 먼저 들어야 했던 시간을 넘어 인큐베이터에서 한 달 만에 기적적으로 회복했다. 하늘이 도와 죽을 고비는 넘겼으나, 걷지는 못할 거라던 말을 들었던 그 시간을 지나 불완전하지만 여섯 살 때부터 걸었다. 생각해 보면 크고 작은 인생 속의 사건들을 지날 때마다 매 순간 내게도 크레센도가 있었다.  



세상 일이라는 게 참 알 수 없다.

마음이 완전히 고꾸라진 날, 그토록 바라던 것을 이뤘다.


크레센도(crescendo)라는 음악 용어 하나가

지나온 시간을 위로하고 앞으로를 기대하게 한다.




처음 알았다. 계획한 모든 일이 어그러지고 뜻대로 되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좋을 수가 있다. 나에게 이 방이 생긴 지 벌써 꽉 채워  석 달이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내 글을 읽고 좋아요를 누르고 가끔은 댓글도 남기고 간다. 진심을 담은 글이라 그런지 내 글에 좋아요를 누르거나 댓글을 남기는 사람들을 보면 '진심이 닿은 것 같아' 기쁘다.

앞으로 어떤 글로 내 방을 채워야 할지 꽤 오랜 고민을 했다. 그 고민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언제고 다시 이어질 고민이라 숙제처럼 남아 있다. 가끔씩 내 방에 들러 이야기를 읽고 가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 머물고 싶어지는 글을 쓰고 싶다. 또 놀러 오고 싶은 글을 쓰고 싶다.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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