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나의 학창 시절을, 가만히 앉아 되감아 볼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불쑥 까만 밤 안으로 들이닥친 그때의 그 기억이 감은 눈 안에서 재상영을 했다. 억지 춘향으로 가 앉은, 관객이 하나뿐인 누구도 반기지 않는 시사회 같았다.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악몽으로 재연되고 나니 도리어 홀가분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는 모든 기억을 마주하고도 울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이었다. 비 온 뒤 땅이 굳는다더니 내내 축축하던 것들이 드디어 볕을 만나 마른 듯했다.
나의 탄생은 그야말로 '비수기'였다. 나를 찾는 사람들은 없었고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마음에 비수를 꽂았다. 그냥 내 삶 전체를 우기(雨期)라고 받아들였다. 열 달 채우지 못하고 칠삭둥이로 태어나 뇌성마비를 앓을 때 마치 '여름의 저주'에 걸린듯했다. 온몸이 타들어갈 듯 내리쬐는 볕도 그침 없이 퍼붓는 장마도, 좀처럼 예측할 수 없는 모양이 꼭 내게 닥친 불행같아서 싫었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말들로 마음에 생채기를 낼 때, 처음으로 말에도 가시가 있음을 알았다. 날 선 말들은 죽지 않고 살아남아 몇 번이고 되감아졌다. 절로 떠오르는 말들에 수백수천 번씩 넘어지면서 나는 자주 외로워졌다.
날 때부터 배역이 정해진 삶 같았다. 그것도 사람들 눈에 잘 띄지도 않는 단역. 과연 엑스트라 같은 인생을 반길 사람이 있을까. 원한 적도 없는 초라한 배역으로 지낸 나의 학창 시절은 그야말로 암흑기였다. 가난의 정도에 따라 타고나는 수저가 있다면, 핸디캡의 유무는 누구나 주인공으로 사는 각자의 삶에서 졸지에 엑스트라로 전락하는 일이었다. 그 핸디캡이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는 것일 때는 더욱 그랬다. 미운 오리 새끼처럼 누구의 관심도, 주목도 끌지 못하고 잘못한 것도 없이 차별받는 것이 일상이 되는 일이었다.
더구나 한 반에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친구가 있을 때. 나의 외로움은 더욱 깊어졌다. 아이들은 똑같은 이름을 극명한 온도 차로 불렸고 그때마다 움찔하는 내 반응을 즐겼다. 나에게 '이름'은 괴롭힘을 부르는 피리 같았다. 피리 소리를 듣고 음지를 뚫고 나온 뱀이 몸 전체를 휘감아 꼼짝없이 묶인 듯한 기분이었다. 뱀의 날름거리는 혀처럼 살갑지 않은 목소리로 불리던 이름은 듣기만 해도 소름이 돋았고 급기야 내 이름마저 싫어졌다. 이름이 가십처럼 불릴 때, 나를 놀리는 아이들은 금세 학교 전체로 퍼졌다.
우리 절교하자, 너랑 친구인 거 알면 나까지 따돌려.
같은 학교, 같은 교실을 쓰는 내내 나만 빼고 모두가 웃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분단선이 있는 듯했다. 겉모습이 남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숨길 수 없어서 매일 하루씩 멀어졌다. 어제까지 친구라 불리던 아이들이 모두 같은 이유로 떠나갔다. 순식간에 불어난 적을 보며 정말내가 전염병에 걸린 것은 아닐까, 헷갈리는날도 있었다. 근처에 가기만 해도 달아나듯 피하며 놀려댔다. 한 번은 책상 밑에 떨어진 연필을 줍다가옆 짝꿍과 손등이 스친 적 있었는데,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 질렀다. 감히 벌레 같은 게 어디다 손을 대느냐고.
그러면 아이들은 큰 소리에 잠깐 놀라다가도, 그 대상이 나라는 것을 알고 금세 소리 내 웃었다.그 짝꿍은 다름 아닌 옆집 살던 내 친구의 남자 친구였다. 셋이 모여 소꿉놀이를 하며 같이 놀던 사이였는데, 하루아침에 남보다 못한 사이로 변했다. 이외에도 반 아이들은 나를 경쟁적으로 놀렸다. 마치 위해를 가하는 것으로 '나는 너희들 편'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듯이.
엎친 데 덮친다고, 그 무렵 오빠는 이른 사춘기를 겪고 있었다.
늘 함께 하던 등굣길과 하굣길이 허전해지자 아이들은 기가 막히게 빈틈을 공략했다. 당시에는 집까지 쫓아가 놀려도, 맞벌이라 아무도 없는 빈 집이라는 것을 알고 더 짓궂게 굴었다. 처음에는 걸음이 느려서 나와는 맘껏 뛰놀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고, 또 같은 편을 먹고 달리면 달리기 시합은 꼴찌를 하는 것이 이유가 됐다. 아무리 절름발이라도, 수없이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금세 털고 달렸다. 달리기를 좋아해 깍두기를 자처하고라도 뛰었건만… 나의 느린 달리기를 반기는 사람은 없었다. 아이들이 원한 것은 깍두기가 아니라, 스트라이커였다.
우리 반에 이슬이가 두 명이니까. 제가 대신 쟤 몫까지 뛸게요.
이 말도 안 되는 말로 나는 늘 운동장 스탠드 신세였다. 허울 좋은 말로 가만히 나를 묶어두는데도, 선생님 중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몸이 불편하면 당연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림처럼 앉아있어야 한다는 듯이. 나중에는 아무 말도 없이 조 편성에서부터 나를 배제했고, 모두 '다 나를 위해서'라며 늘 가만히 앉아있도록 했다. 싫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또 다른 아이들을 볼모로 삼았고, 그 끝말은 항상 '억울하면 쟤를 탓해'라는 말로 모든 화살이 내게 향했다. 온 사방이 나를 과녁 삼아 마구 쏘아댄 셈이었다.
나쁜 일도 길이 드는 듯했다. 불쑥 고개를 드는 불행은 야속하게도 한 번에 몰아치듯 찾아왔다. 대비할 틈도 없이 뒤통수를 후려치며 평온하던 하루를삼킬 듯이 덮쳤다. 불행은 지독한 습관처럼 반복되었다.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어 온 정신을 흩트려 놓았다.
'웃는 얼굴에는 침 못 뱉는다'는 말을 되새기며 웃는 낯으로 대할때는 독하다는 소리를 들었고, 참다못해 울음이 터진날에는 같은 층 교실을 쓰는 다른 아이들이몰려와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찾은 듯, 나의 불행을 관람했다. 방관하거나 동참하거나. 부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는데, 어느 쪽도 구원이 되지 못했다. 그때 당시 내 눈에는 교실 앞뒷문, 창틀에 매달려 낄낄대며 구경하던 그 무리가 나보다 더 벌레 같았다.
이후 여름방학을 맞으면서 불행도 잠시 쉬어가는 듯했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아이들은 현실에서도 모자라 '사이버 공간'에서까지 나를 놀림감으로 삼았다. 내 나이 열세 살, 당시 무료로 홈페이지를 만들어주는사이트 '미투 유투'라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사칭해 전교생 아이들 방명록에 욕을 도배해 놓는바람에, 불특정 다수에게 '마녀사냥'을 당해야 했다. 심지어 방명록마다 열 받으면 연락하라며우리 집 번호까지 남겨 둔 모양이었다. 그때는 본인 확인이 없어도 아무 닉네임이든 제한 없이 쓸 수 있었는데, 욕설이 담긴 게시글마다 내 이름을 사칭해 나인 척 글을 썼다. 이러한 연유로 방학 내내 불행은 더욱 깊어졌다. 전화벨이 정말 불난 듯이 울렸다. 심지어 얼굴도 모르는 아이들까지 전화해서는 다짜고짜 욕설과 저주를 퍼붓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넌 밥 안 먹어도 배부르겠다, 욕을 하도 먹어서.
하루에도 수십수백 통씩 밤낮없이 전화가 왔다.
전화벨이 쉴 새 없이 울리는 통에 일상이 마비될 정도였다. 영문도 모르고 비아냥거리는 말들을 듣다, 전화 코드를 뺐고 수화기를 가로 놓았다. 결국 나중에는 가족이 나서서 나를 전학 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진압하려고 했다. 하지만 곧 졸업이었고 또다시 이런 일이 반복될 수도 있으니 차라리 친오빠가 다니는 중학교를 함께 다니는 것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때 중학교는 일명 '뺑뺑이'로 가는 랜덤 진학이었는데, 엄마는 차라리 장애인 전형으로 진학하면 변수가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일단락되는 줄 알았던 사건은 새 국면을 맞았다. 엄마가 증빙서류를 들고 교무실을 찾은 그 날, 우리 반 아이 중 하나가 '선생님께 촌지를 건네는 모습을 봤다'는 헛소문을 퍼트리기 시작한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소문으로 오히려 '사이버 마녀사냥' 사건의 범인의 실체가 밝혀졌다.
엄마가 교무실을 찾은 그 시간, 학교에서 마주친 학생은 교무실 청소 당번이던 우리 반 아이 한 명뿐이었다. 그녀는 반에서 '양치기 소녀'로 통했는데, 반복된 거짓말에 자신이 소외당하게되자, 나를 앞장서서 괴롭히는 것으로 아이들의 관심을 얻으려고 했던것이었다. 그녀는마지막 '촌지 사건'으로 완벽한 범죄를 꿈꾼 듯했다.
소문을 듣고 화가 난 엄마가 직접 그녀의 집에 전화를 걸었고, 스스로 진실을 밝히지 않으면 직접 찾아가겠다는 말에 벌벌 떨며 모든 잘못을 이실직고했다. 덕분에 오명은 벗었지만달라질 것은 없었다. 나는 여전히 걸음이 느린 아이였고 같은 편을 먹으면 꼼짝없이 졌다.
결말이 달라지지 않으니 억울한 누명 한 꺼풀 벗었다고 해서 드라마틱하게 바뀔 상황도 없었다. 주동자는 하나지만 모두가 나의 불행에 동참한 가해자들이었다. 마치 '그래서 뭐, 너 다리 불편한 건 사실이잖아!'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통쾌한 복수도 없이 시시껄렁하게 끝났고 상처는 고스란히 내 몫이었다.
최근 몇 년 전까지 내 꿈은 이사였다. 마음속으로 여러 번 도피를 꿈꿨으나, 여전히 이루지 못한 채 동네 주민으로 사는 중이다. 이곳에 산 지도 삼십 년이 넘었다. 전에는 초등학교 근처를 지나는 것도 힘들었는데, 이제는 반려견과 산책하며 그 부근을 거닐기도 하고 선거철이 되면 건물 안으로 들어가 투표를 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누군가의 상처를 무심히 방관하는 느낌이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오래도록 피해 다녔던 그곳을 용기 내 걸으면서 내게도 시간이 약이 되어 덤덤해진부분이 있음을 알았다.
괜찮을 줄 알았다면 좀 더 일찍 상처를 마주할 걸…. 마음 한편에 흉처럼 남아버린 지난 상처를 들여다보다가, 그동안 아프다는 이유로 상처 난 부위에 연고를 바르는 일을 무작정 미뤄두었던 것은 아닐까 싶었다.
크든 작든 흉터를 남기지 않으려면, 상처 난 자리에 연고를 바르고 새 살이 차오르기를 기다려야 한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상처를 마주할 용기가 없어, 그냥 덮어두고 옷으로 가리려고 했다. 한 번도 상처 받지 않고, 하나도 아프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나 자신을 속이는 동안 무작정 덮어둔 옷깃에 쓸려, 애꿎은 상처만 덧나게 했음을 알았다. 제때 치료하지 않고 아픈 상태로 방치한 바람에, 별 것 아닌 일도 예민하게 반응하며 고슴도치처럼 날을 세웠다.
그냥, 아프다는 말 한 마디면 충분했는데….
살다 보니 철 지난 영화도 재개봉하는 날이 다 있다.
책이든 영화든 시간이 흘러 다시 보게 되면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일 때가 있다. 내 오랜 상처도 마찬가지다.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나의 학창 시절을, 가만히 앉아 되감아 보면서 나의 오랜 불면이 제때 치료하지 못해 덧난 상처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불쑥 까만 밤 안으로 들이닥친 그때의 기억은 이제 완벽한 과거다. 이제 그 시간으로부터 멀리 떠나 왔으니, 행여 그 순간이 악몽으로 재연된다 해도 걱정할 것 없다. 이제 누가 내 핸디캡을 가지고 뭐라 해도, '그래서 뭐, 내가 불편한데 보태준 것 있어?'라고 되받아칠 수 있는 단단한 마음이 되었다. 이제는 그 모든 기억을 마주하고도 울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이되었다.
비 온 뒤 땅이 굳는다더니. 내내 축축하던 것들이 드디어 볕을 만나 마르나 보다.
이제 상처 난 자리에 흉이 남지 않도록 딱지가 앉는 것만 기다리면 될 일이다. 어릴 적 오빠가 내게 말했듯이. 새 살이 돋도록 돕는 장군 세포가 물리친 세균의 무덤이자, 장군 세포가 남긴 영광의 흔적이라고 했던 그 딱지를!
비워야 할 것들
/ 담쟁이캘리
울어야 비워지는 쓰레기 통이 있다
비워야 소리 나는 것들이 있다
버리지 않고는 채울 수 없다
비우지 않고는 들을 수 없다
속 시끄러운 마음이 그렇고
좋은 소리를 내는 악기가 그렇다
악기도, 마음도 비우지 않고는
그 어떤 소리도 채울 수 없다
울어야 비워지는 쓰레기 통이 있다
비워야 소리 내는 것들이 있다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