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슈퍼맨이 아니었다

어릴 적 나의 슈퍼맨이 지상으로 내려왔다

by 담쟁이캘리




깜박하고 약을 안 챙겨 먹었네.



아빠 나이 올해 예순 하나, 환갑을 기점으로 나의 슈퍼맨이 지상으로 내려왔다. 세상 그 누구보다 크고 힘센 천하무적 슈퍼맨이라고 믿었던 지난날들은 이미 '명백한 과거'였다. 환갑을 기념으로 떠난 아주 오랜만의 가족 여행길에서 새삼 세월을 실감했다. 흐르는 시간 앞에 장사가 없다는 것을 모를 나이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은 당황스러운 감정도 섞여 있었다. 이제는 식전 식후 꼬박꼬박 약을 챙겨 먹지 않으면 안 되는 나이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번 슈퍼맨은 영원한 슈퍼맨이라며 훌쩍 지나버린 아빠의 시간을 무턱대고 재단했다.


운전석에 앉은 아빠가 정지 신호를 받자마자 서둘러 약을 챙겨 먹는 모습을 보며 나의 슈퍼맨이 지상으로 내려왔음을 체감했다. 세월이 우리 아빠만큼은 비켜 갈 거라고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인생은 육십부터 라며 아빠는 이제 청춘이라고 건넨 선물과 말들이 조금은 멋쩍게 느껴졌다. 육십 평생 고단하게 지나온 생인데, 또다시 '청춘'이라는 말로 등 떠미는 것은 아닌가 싶어 만감이 교차하기도 했다. 말없이 엄마와 아빠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 깊이 패인 주름에 한 번, 팔 위에 핀 선명한 검버섯 자국에 또 한 번 놀라 시선을 돌렸다.


가족여행 내내 하늘은 참 맑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차를 타고 달릴 때는 비가 내리다가도, 우리가 내려 이동할 때가 되면 감쪽같이 비가 잦아들었다. 평소 같으면 날씨가 변덕스럽다고 칭했을지 모르나, '날씨 요정'이 돕기라도 하는 것처럼 마법처럼 그쳐 우산이 필요 없었다. 더구나 아빠 생신 당일인 오늘 아침에는 비 갠 뒤라 그런지 더 맑고 화창해 시선이 닿는 곳마다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했다.




시간이 참 빠르네, 처음 여기 왔을 때
너희는 유치원생이었는데.



해안 고속도로를 달리는 내내 그냥 아무렇게나 셔터를 눌러도 작품이 되는 하늘을 보며, 달리는 차 안에서 사진을 찍는데 엄마가 툭- 던진 그 말 한마디에 또다시 세월을 실감했다. 오빠와 나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꼬꼬마 시절을 추억하는 동안, 우리 인생도 이제는 '고속도로' 위로 올라탄 것이 아닌가 싶은 마음이 들었다.




10대는 10km로 가고 20대는 20km로 간다.
시간의 속도는 나이에 비례해 간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은 더 쏜살같이 흐른다는데, 나보다 더 빠르게 달리는 차 위에 올라 탄 부모님을 찬찬히 보니 온 몸에 세월의 흔적이 선명했다. 세상 그 누구보다 크고 강하게 느껴졌던 나의 슈퍼맨은 이제 보통의 일상 속에서, 흐르는 시간의 무게를 가만히 받아들이고 있는 듯했다. 나의 오랜 버팀목이 서서히 늙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몸이 옛날 같지 않다며 기운 있을 때 잘 챙겨야 한다는 말하며 너털웃음을 웃는데, 나도 모르게 따라 웃다가 서글퍼지기도 했다. 그래도 서로 놓고 온 약을 챙기고, 깜박 잊었던 기억을 깨우쳐 가며 미우나 고우나 '둘'이서 나누는 대화를 가만히 듣다가 지상으로 내려온 나의 슈퍼맨이 혼자가 아니어서 참 다행이다 싶었다.



새벽에 아빠랑 호숫가 드라이브하다가 길을 잘못 들어 역주행했는데, 차가 없어서 다행이었지. 나중에 들어온 차들이 빵빵 대서 미안하다고 얼마나 사과했는지 몰라.



오늘 새벽, 엄마 무릎을 베고 누워 들은 이야기에 가슴을 쓸어내리다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보호자'가 '보호받아야 하는 자'로 역행하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여전히 어리숙하게만 느껴지는 내가 과연 어릴 적 나의 '슈퍼맨'에게 든든한 보호자일 수 있을까. 감히 가늠할 수 없지만, 아마 나는 내가 받은 보살핌의 절반도 흉내 내지 못할 듯싶다. 내게는 '슈퍼맨'이었어도 부모님에게는 어떻게 해도 '슈퍼맨'이 될 수 없을 것 같아 마음이 조금은 아리다.



분명 나는 시간을 돌리는 타임머신이 있어도 절대 돌아가지 않을 거라며 지금이 좋다고 했던 사람이었는데, 부모님을 생각하니 마음이 또 다르다. 드라마나 영화처럼 하루아침에 시간을 되돌리거나, 원하는 한 순간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옷장 안에 들어가 눈 감으면 뿅 하고 옛날로 돌아가는 마법을 부릴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절대 그럴 일도 없고 현실에는 예외가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나 공평한 그 시간이 우리 가족에게는 다르기를 바라며 예외를 기대하는 나를 보며 가수 김광석이 줄곧 노래하던 '또 하루 멀어져 가는, 매일 이별하며 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깨달았다.



머물러 있지 않고 지체 없이 늙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서글픈 일인지 알아도, 부지런히 흐르는 시간을 내가 어찌할 수 있는 도리는 없다. 나보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부모님의 시간을 따라잡을 수도 없다. 맞다, 그건 허황된 꿈이다. '오래오래 늙지 않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같은 이야기는 동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허무맹랑한 꿈이다. 흐르는 시간을 막거나 멈출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다. 주어진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는 것. 적어도 우리 가족은 지금 이 시간을 '함께'하고 있으니 할 수 있는 한 부지런히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주어진 숨으로 살아가는 시간 동안 보통의 일상을 소중하게 쓰는 것 말고는 별다른 도리가 없다.



드라마틱하고 판타스틱한 결말로 어릴 적 나의 슈퍼맨이 건재하면 좋을 텐데, 그건 어디까지나 내 상상이자 그냥 무턱대고 비는 소원일 뿐이다. 그러니 내가 쓸 수 있는 이야기의 결말은 그저, 우리 가족이 '우리'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시간을 공유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남은 시간을 후회 없이 써야겠다고 다짐하는 것뿐이다. '사는 동안 평범하게,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내 스스로 쓸 수 있는 최고의 해피엔딩이다.






겨울일기

/ 담쟁이캘리




간밤에 온 집안에 서리가 내렸다



어둠 짙게 깔린 동짓날 밤

깜박 잊고 열어둔 창 너머로

하얗고 시린 눈발이 날려

당신의 감은 눈 위로 소리 없이 내렸다



희끗희끗한 눈발만 남기고

눈 깜짝할 새 겨울이 다녀갔다



코끝을 찡하게 만드는 시린 바람에

굽이굽이 굴곡진 오르막길마다

구슬픈 시간의 골짜기가 패였다



종일 꿈꾸느라 잠 깬 적 없는 아이는

제 한 몸 가누기도 어려워

온몸으로 막아서도, 성큼 다가온

겨울을 당해 낼 힘이 없다



무적일 것 같던 당신의 뒷모습은

한눈에 담길 만큼 작아졌고

또랑또랑하던 눈매는 세월의 무게에 눌려

애꿎은 그림자만 길게 늘어졌다



뒤늦게 열린 창을 꼭 닫아봐도

이미 내려앉은 눈발은 가실 줄 몰라

마음속까지 한기가 들었다



간밤에 당신을 찾아온 겨울이

도무지 갈 생각을 않는다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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