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나의 첫 '남사친'

머리 짧은 그와 영영 헤어지던 날

by 담쟁이캘리


모두가 손님처럼 드나드는 병실 안으로 그가 불쑥 들어왔다.


칠삭둥이로 날 때부터 여섯 살 때까지 이어진 병원생활. 유년기 시절 나의 세상은 병원이 전부였고 머무는 사람 없이 모두가 손님처럼 드나드는 나의 병실은 외딴 방 같았다. 2인실이지만 홀로 쓰는 탓에 내 옆자리 빈 침대가 도드라져 보여 수시로 외로웠다. 이따금씩 부모님이 누워 쉬기에는 널찍하고 좋았지만 비어 있을 경우가 더 많아, 빈자리를 볼 때마다 왠지 모르게 휑한 마음이 들었다.



"언니, 제 옆자리 침대 쓰는 친구는 언제 와요?"

"침대가 커서 이만한 친구가 오려면 좀 더 기다려야 해."



간호사 언니는 백 센티미터 남짓한 내 키를 훌쩍 넘는 침대 길이를 손바닥으로 재 보이고는 아직은 좀 더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내 병실을 찾는 사람이라고는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세 번 꼬박꼬박 들러 뇌성마비로 굳어버린 근육을 이완시키는 주사를 놓는 간호사 언니와 회진을 도는 의사 선생님 그리고 휠체어 없이는 움직이지 못하는 나에게 식판을 날라주는 아주머니가 전부였다.


하루 중 대부분이 혼자인 나에게 '놀이'는 병실 창밖으로 뛰노는 아이들이 사각 프레임 안으로 들어왔다 사라지는 모습을 구경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놀이도 좋게 말하면 '관중', 다르게 표현하면 가만히 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는 '붙박이 신세'라 금세 싫증 났다. 혹여 재미난 볼거리를 발견해도 대꾸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하는 모든 말은 주로 혼잣말로 끝났다.


내가 머문 병실이 외딴 방 같았던 이유 중 또 하나는 하물며 가족들도 오래 머물지 못하고 떠났기 때문이었다. 집에 있는 한 살 터울의 연년생 오빠를 돌보러 가야 했으므로 만나자마자 이별이었다.


돌이켜 보면 내 생애 첫 '남자 사람 친구(이하 남사친)'을 만나기 전 나의 일상 중 별일은 기껏해야 '어제는 참을만했던 주사가 오늘은 유독 아프다'거나, 병실 창밖으로 뛰노는 아이들의 수가 날마다 다르다는이 전부였다. 그를 만난 것은 나의 일상에 예기치 못한 즐거운 변수였다.







어느 날, 그가 짧은 커트머리를 하고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멋쩍게 인사하며 내 옆자리 빈 침대 위에 짐을 풀어놓을 때, 그토록 기다려 온 '옆자리 친구'라는 것을 알아챘고 반가운 마음에 수개의 말들이 쉴 새 없이 삐져나왔다.



오빠는 이름이 뭐야?
나도 우리 집에 오빠 있는데….



오빠는 집, 나는 병원. 이산가족처럼 떨어져 지내는 나의 친오빠 이야기를 시작으로 그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처음 만나자마자 갖가지 질문을 쏟아내는 내가 성가실 법도 한데, 그는 배시시 웃으며 모든 말에 답해주었다. 매번 혼잣말로 끝나던 나의 말들이 대화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는 내 이름을 물으며 자신을 S라고 소개했다. 나는 그의 이름을 몇 번이고 발음하며 '오빠'라고 연호하듯이 불렀다. 그러면 그는 '응, 왜~'라며 살가운 투로 답했다. 드디어 내게도 부르면 바로 대답해 줄 친구가 생겼다. 보내는 사람만 있고 받는 사람은 없었던 나의 말을 건넬 곳이 생겼다.


형언할 수 없는 기쁨에 젖어있을 때, 이제 막 입원 수속을 마치고 온 듯한 그의 부모님이 나를 향해 말했다.



"오빠 아니고 언니야, S언니."

"아녜요, 머리 짧으면 남자예요. 오빠 맞아요."



나의 다섯 살 인생에서 머리 짧은 여자를 마주한 것은 생전 처음이었다. 날 때부터 유년기 대부분을 병원에서 보냈으니 내게는 이곳에서 본 사람과 세상이 전부였다.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어 생활 반경은 더욱 좁았다. 때문에 나에게 병원은 유독 '작은 세상'이었고 홀로 머문 병실은 '외딴 방'이었다. 나의 세상에서 마주한 남자들은 모두가 짧은 머리, 여자들은 긴 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레 머리 길이로 성별을 구분하게 되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 비슷한 머리 길이를 보고 '머리 길이를 성별 구분표' 쯤으로 이해했다.


그야말로 우물 안 개구리식 구분법이었다. 그러나 그는 나의 엉터리 호칭에 한 번도 싫은 내색하지 않았다.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 무엇이든 상관하지 않고 대답해 주었다.



"아무렴 어때, 네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

"그럼 오빠니까, S오빠라고 부를게."



그는 내게 처음부터 끝까지 '오빠'였고, 변치 않는 나의 첫 남사친이었다.







고요한 일상에 나와 함께 떠들어 줄 사람이 생겼다는 것은 큰 위안이었다. 하루 전체를 그에게 말 거는 시간과 잠드는 시간으로 나눌 수 있을 만큼 빈틈없이 말을 걸고 또 걸었다. 마음만 앞서느라 끝없이 이어지던 질문 폭격에도 늘 웃는 낯으로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천천히 대답해 주었다. 내 머리를 쓰다듬을 때마다 재잘대던 나의 말도 절로 숨을 고르게 되었다. 그 덕분에 친구와 대화할 때 상대방이 답할 때까지 숨 고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깨쳤다.


그 역시 나와 같은 뇌성마비를 앓고 있었는데 그것마저도 운명의 짝꿍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나와 다르게 손이 불편했는데, 덕분에 내게도 역할이 생겼다. 나는 그의 불편한 손 대신이었고, 그는 나의 다리가 되어 주었다. 사이좋게 도움을 주고받으며 둘도 없는 단짝이 되었고 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친구 생긴 게 그렇게 좋아?



쉬지 않고 재잘대는 나에게 모두가 물었다. 그렇게 좋냐고. 그때는 '당연하지!'라고 외마디로 대답했는데 생각해 보니 그가 진짜 좋았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와 함께 한 모든 시간이 '신기한 변수'이자 선물 같았지만 그중에 제일은 그는 떠나보낼 채비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나와 한 공간에서 먹고 자며 동고동락했으므로 헤어질 필요 없이 매 순간 함께 한다는 사실이 내게는 가장 큰 기쁨이었다. 그가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눕던 날 밤, 가족처럼 나와 함께 잠드는 그를 보며 깊이 안도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혼자서도 잘 지내는 줄 알았다. 태어나자마자 가족과 헤어져 인큐베이터에서 홀로 한 달을 보내고, 유년기 시절의 전부를 병원에서 보내며 부모님을 기다리는 일이 익숙해진 줄 알았다. '울지 않고 잘 참으면 선물을 준다'는 말에 잘도 울음을 참았다. 그런 나를 보며 모두들 어른스럽고 의젓하다고 말하길래, 나는 일찍이 헤어짐을 몸소 익혀서 혼자서도 잘 지낸다고 착각했다.


그날 밤, 그동안 그저 참고 견뎠을 뿐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이 아무리 어른스럽다고 말해도, 늘 집과 가족이 그리운 영락없는 고작 다섯 살배기 어린아이 일 뿐이었다.


그가 내 옆자리 빈 침대에 몸을 뉘었을 때, 누운 키가 침대에 딱 맞아떨어졌다. 그제야 간호사 언니가 말한 '이만한 친구'가 드디어 왔다는 생각에 또 한 번 안도했다.


간호사 언니 말처럼 내게 있는 빈자리를 채워 줄 '이만한 친구'는 없었다. 참으로 기다린 보람이 넘치는 밤이었다.







세상 일이 다 그렇듯 손꼽아 기다리는 아침은 더디 와도, 잠 못 이루는 아쉬운 밤은 늘 쏜살같이 지났다. 영영 헤어질 일 없으리라 믿었던 그와 이별하는 날도 가까워 오고 있었다.


회자정리라고 했던가. 사람은 누구나 만나면 헤어지기 마련이라더니 별안간 이별이 찾아왔다. 그가 오랜 재활 치료에도 차도를 보이지 않자, 그의 부모님이 통원치료를 권하게 되면서 갑작스레 맞이한 이별이었다.


어렴풋하지만 그와 헤어지는 순간에도 슬픈 내색을 하지 않았다. 괜찮은 척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간 나의 외딴 방을 드나들던 우리 부모님이나 수많은 손님처럼 그 역시 잠시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과정이라고 믿었다. 나의 외딴 방 같은 병실을 찾는 모든 이들이 밀물과 썰물처럼 밀려왔다가 갈 때는 뒷모습을 보였으므로. 나의 일상 중에 가장 예상치 못한 변수였던 그가 떠날 때는 익숙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오빠, 혹시 멀어서 못 오면
그때는 내가 찾아갈게.



부모님 차에 올라탄 그를 마지막으로 배웅하며 말했다. 무슨 이유였는지 모르겠지만 곧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나는 재활치료로 상태가 호전되는 중이었다. 보조기를 한 채로 잠깐이나마 설 수 있게 된 때였고, 뒤늦은 걸음마를 시작한 시기였다. 혼자서 그를 찾아간다는 것은 턱도 없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생전 처음 휠체어 없이 디딘 땅의 감각은 금세 걷고 뛸 수 있을 듯한 환상에 젖게 했다. 행여 그가 못 운다고 해도 내가 가면 그만인 마음이었다.



"마지막인데 오빠라고 부를 거야?"

"우리 또 만날 건데? 마지막 아니야. 오빠, 잘 가."



엄마 말에도 아랑곳 않고, 마지막까지 그를 '오빠'라 불렀다. 고집부린 것은 아니었다. 그때까지도 머리가 짧으면 모두 남자라고 생각했고 '마지막이니 언니라고 부르라'라던 엄마 말에, '언니'라고 부르면 영영 헤어질 듯했으므로 호칭은 끝까지 오빠여야 했다.


그를 태운 차가 눈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한참 동안 손을 흔들다, 엄마가 끌어주던 휠체어가 방향을 틀어 다시 병원 안으로 향할 때에야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잘 배웅해 놓고 왜 울어?"

"그냥, 벌써 보고 싶어서…."



높이 띄운 그네를 타며 실컷 허공에 발을 구르다,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작은 세상 속 병실 문을 열고 외딴 방으로 들어온 그가 다시 그 문으로 나갔다.


그날 이후, 내가 퇴원하던 날까지 옆자리 침대는 다시 빈자리로 남았지만 전처럼 휑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가 내 옆자리 침대에 머무는 동안 '마음의 빈자리'를 채워주었기 때문일 것이리라.


그렇게 한낮의 꿈처럼 불쑥 나타났던 나의 첫 남사친과 영영 헤어지던 날, 나는 그제야 정말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는 마음이 되었다.





뇌성마비로 태어나 평생 못 걸을 거라던 나는 여섯 살 때 뒤늦은 걸음마를 뗐고, 재활을 통원치료로 전환하며 기나긴 병원생활의 마침표를 찍었다. 머리 길이를 '성별 구분표' 쯤으로 이해하던 우물 안 개구리 세상은, 아홉 살 무렵 같은 반에서 커트머리 여자 아이를 만나면서 깨졌다. 그제야 나의 첫 남사친이 여자였다는 것도 알았다. 그것도 모르고 그를 끝까지 오빠라 부르던 기억이 말할 수 없이 부끄럽기도 했다.

반 친구들에게 말해도 그 시절, 병원에서의 일상을 공감하지 못했고 늘어놓는 말이 길어질수록 '이상한 나라'에서 온 사람처럼 비칠 뿐이었다. 그래서 꽁꽁 숨겨두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숨겨 두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 세상이 아무리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작았다 해도, 내가 살던 그곳도 사람 사는 '세상'이었다. 외딴 방 같던 병실에서 깨고 잠드는 동안 나에게도 똑같은 희로애락이 있었다. 수없이 벗어나고 싶었던 쳇바퀴 같은 일상이었지만, '살 가망이 없다'던 비보를 뒤엎고 살아난 곳이었다. 평생 걸을 수 없을 거라던 그 말에도 기어코 걸어서 퇴원하던 것도 모두 병원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단언컨대 내 생애 가장 많은 기적을 만난 곳이 나의 작은 세상이자 외딴 방에서였다. 친구가 된다는 것은 '마음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일임을 배운 것도 그곳에서였다.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보통의 일상이라도 그만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세상에는 사소한 사람도 사소한 일상도 없었다. 그저 나만의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가 있을 뿐. 사람 사는 풍경은 모두 같은 모양으로 흘렀다.








보통날

/ 담쟁이캘리




다 소화하지도 못할 거면서

괜한 욕심부리고 싶은 날

평소라면 탐내지도 않을 것을

양껏 시켜놓고 욱여넣는 날이 있다



보통이 딱 적당한 줄 알면서도

괜한 욕심이 곱빼기로 불어

욕심 낸 마음마저 더부룩한 날이 있다



딱 그쯤에서 멈췄어야 했는데

앞뒤 없이 허겁지겁 달려들어

탈이 나고 마는 날이 있다



모자란 듯 풍족하고

넘치는 듯 아쉬워지는

딱 그만큼의 미련이 좋다



속에서 퉁퉁 불어

종일 더부룩한 마음보다

적당히 불어, 때 되면 자연스레

소화되는 보통날이 좋다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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