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10년의 경험치로 덤비기엔 너무나 새로운 세상
출장으로 인한 자리비움 - 2025.10.09
한 분야에서, 그것도 한 직장에서 10년 일했다고 하면 주변에서 '전문가' 라는 근사한 타이틀을 붙여준다. 그런데 그건 지극히 그 분야에 속해 있을 때 '한정'이라는 걸 체감하고 있다. 브랜드를 만들고자 도전하는 지금, 너네는 집 꾸미기 전문가였다고, 집을 지으려면 맨땅에 시멘트를 붓고 철근 공사 하는 법부터 배우라고 누군가 소리치는 듯 하다.
10년의 경험치로 무작정 덤비기 전에, 한 분야만 보면서 달려온 좁은 시야부터 깨고 있다. (따끔하게 깨지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인정이 빠르고, 적응이 빠르고, 혼자 깨지는게 아닌 같이 깨진 다는 것. 멈추지 않고 가고 있으면 됐지 뭐.
2주간의 튀르키예 출장 (겸 긴 여행)으로 회사를 비우고 추석 연휴가 끝나기 전 출근을 했다. 출장 가기 전날 돌아와서 하자고 칠판 한 켠에 '아이템 3개 정리하기'라고 써두고 갔는데 진선이와 나, 둘 다 또렷하게 기억해내지 못하는 걸 보니 다시 고민이 많이 필요한 단계구나 싶었다. 회사 다닐 때는 늘 속도전으로 일했던 것 같은데, 3無(브리프 없이, 데드라인 없이, KPI 없이)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을 처음 하다 보니 거북이보다 더 느린 달팽이의 속도로 나아가는 기분이 들어 답답하지만 매일이 배움이라고 믿고, 천천히 우리만의 페이스로 소화시키면서 나아가려고 노력 중이다. 이번 주 달팽이 레이스 갈림길에서 마주한 큰 깨달음에 대한 회고를 남겨본다. 이 어려움을 같이 나눌 수 있는 달팽이 친구가 있어서 외롭지 않다. (흑)
마음을 사는 일 VS 제품을 파는 일
브랜딩은 궁극적으로 제품을 파는 일일지 몰라도 우선적으로는 마음을 사는 일이다. 그래서 이제껏 내가 하던 일은 매출 고민보다는 사람들의 시선을 잡거나, 메시지를 전달해 인식을 바꾸거나 하는 마음을 '사는' 일이었다. (브랜딩 광고를 의뢰하며 매출 KPI를 요청하는 고객사에게 브랜딩은 누적이며 다이렉트 매출을 기대하기 어려운 영역이라고 이야기해왔다. 실제로 목적을 불분명하게 운영해 실패한 케이스를 많이 보기도 했고, 목적에 맞게 전략적으로 운영하는 편이 로스를 줄이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제 직접 브랜드를 만들고자 하니 당장의 마음만 사는 일만 고민할 순 없는 일이었다. 시간과 돈을 무한대로 투자할 수도 없는 상황이니까. 뭐 마음만 제대로 사면 물건은 자연스럽게 팔린다고 생각할 순 있지만 그렇게 생각할 만큼의 여유와 깜냥은 아직 없기에 시장에 내놓기 전에 '그래서 수익 모델은 탄탄한가?'에 적어도 우리 스스로는 답을 내릴 수 있어야 다음으로 갈 수 있을 것 같다. 이래서 사업이 어렵구나. 비즈니스 모델, 매출 구조.. 모르는지 조차(알려고 하지 않았던) 몰랐던 일을 하나 둘 알아간다. 갈길이 멀다.
나의 욕망 VS 상대의 욕망
처음 아이데이션을 시작했을 때는 가장 가까운 시니어 페르소나인 부모님을 자주 떠올렸다. 나는 대부분 '우리 엄마가, 우리 아빠가 이랬으면 좋겠어'로 예를 들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그건 그런 부모님이 되었으면 하는 지극히 나의 욕망 아닐까? 마치 어렸을 때 어른들이 정작 나는 원하지 않는데 나를 위하는 거라며 해줬던 일들처럼. 진선이랑 점심을 먹고 걸어오는 길, 할머니께서 아주 화려한 꽃무늬 상하의 투피스를 옷을 입고 계셨다. 진선이는 '어르신들은 정말 저 옷이 예뻐서 입으시는 걸까?'라고 물었다. 잠깐이었지만 어르신들 눈에는 색깔이 화려하니 예뻐 보이는 거 아닐까? 아니면 할머니들 사이에 저런 스타일이 유행일까? 아니면 저런 옷들 특유의 재질이 편하니까 등등 여러 생각이 스쳤다. 답은 할머니만 알겠지. 어쩌면 우리는 그 나이가 되기 전까지 그분들의 마음을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위(爲)'라는 단어를 다시 떠올려본다. 시니어들은 이런 게 불편하겠지, 이런 걸 원하겠지 하며 이야기했던 것들이 정말 시니어를 위한 것이었을까? 위한다는 말 앞에 더더욱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위(爲)선에 취해 나의 욕망을 채우는 실수를 하지 말자.
새로운 눈 VS 그들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는 눈
시야를 넓히고 싶어서 매일 출근길 Chat gpt로 비즈니스 동향을 받아보며 브랜드를 디깅하고 있다. 파면 팔수록 새로운 브랜드들을 알게 되는 재미가 있다. 새로 알게 된 서비스 중 재밌었던 건 똑 부러지는 비서 '똑비'. 챗봇과 같은 채팅 형태의 생활 편의 서비스인데 디지털 활용이 익숙하지 않은 시니어들을 위한 서비스로 콘서트 티켓팅, 온라인 장보기, 카드 만들기 등을 대행해 주는 서비스다. 이 서비스의 독특한 점은 AI보다 사람이 응대해 주는 비중이 높다는 것이다. (서비스에 접속하면 상단에 '사람 비서'라고 서비스를 지칭하고 있다.) 처음에는 AI로 효율, 자동화가 되는 세상에 무슨 인력낭비야 라고 생각했지만, 사람이 응대하니 시니어 눈높이에 맞는 정보 전달이 가능하고 추가 질문이 왔을 때도 맞춤형 답변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시니어 입장에서는 매력적인 서비스 일 수도 있겠다. 딸, 아들은 물어보면 대충 대답하고 마는데 똑비는 늘 잊지 않고 답을 해줘서 좋다는 후기들이 '사람 비서'의 매력을 이야기해 준다. 아너드라는 시니어 전문 여행사 사이트에 들어가면 UI가 요즘스럽지 않게 어딘가 촌스럽게 느껴진다. 큼직큼직한 폰트가 주는 투박함 때문인 것 같다. 반면, 다른 여행사에서는 혜택이나 약관, 정보들이 작게 쓰여있는데 아너드는 주요 정보 위주로 큼직 큼직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시니어 입장에서는 보기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똑비, 아너드처럼 대부분 시니어를 위한 서비스들의 첫인상은 어딘가 투박하다. 아주 새로운 기술을 사용한 것도 아니고, 이미 익숙한 서비스들이다. 그래서 '이런 거 원래 있었지 않아? 이게 왜 매력적이지?'라는 의문이 먼저 든다. 그런데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의 시선에 맞춘 디테일들을 녹여낸 게 보인다. 직관적인 UI, 큼직한 글씨, 복잡하지 않은 서비스, 그 뒤에 브랜드를 만들게 된 이유와 철학. 그제야 '좋다, 잘했다, 엄마한테 추천해주고 싶다'라는 감탄이 나온다. 세상에 없던 새로운 아이템을 찾고 있던 우리에게 필요한 건 넓은 시야, 새로운 시선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들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는 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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