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싶지 않다면, 태연한 척 해.

2018 젊은 작가상 - 《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

by 수빈 Soobin

일단 저는 양입니다. 스포를 하자면, 제가 양인 이유는 제가 미술을 모르기도 하고, 그걸 자본으로 활용할 능력도 없거든요.


늑대는 양을 잡아먹습니다. 이 책은 그런 내용입니다. '자본과 미술은 연결되어 있다', '각 영역을 갖고 있으면서도 서로를 끊임없이 침투한다.'


가난한 무명 시절을 보내야 할지 모를 신인 작가에겐 나름의 화려한 데뷔였으며, 평론가는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할 기회였고, 구매자는 돈을 벌었다. (중략) 어차피 대부분의 사람은 어떤 그림이 좋은 그림이고 어떤 그림이 나쁜 그림인지 알지 못했다. (61p)


Summary

「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의 '나'는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 미술과 자본 사이를 방황하는 인물입니다. 그러다 파텍 필립(고급 시계 브랜드의 정점)시계를 찬 선배로부터 브로커 제의를 받게 되고, 그림 볼 줄 아는 자신의 안목과 선배의 자본으로 성공가도를 달리게 되죠.


하지만 어느 재벌의 비자금 수사로 인해 미술계를 긴급 진단하는 기사가 나오면서, 미술 시장은 차갑게 식습니다. 그로 인해 '나' 역시 쇠퇴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죠. 주인공은 한국의 미술을 전 세계적으로 알리겠다며 뉴욕으로 도망(?)갔지만, 마땅한 성과 없이 아내로부터 이혼 서류까지 받게 됩니다.

사진 : Unsplash.com

그러던 중 '나'는 어느 파티에서 노신사를 만나게 되고, 그로부터 팸플릿을 건네 받습니다. '금세기 최고의 공포 퍼포먼스, 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 놀랍게도 그것은 자신이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큰 손들의 비공개 퍼포먼스였죠.


턱시도를 입은 사내가 플라스틱 늑대 가면을 쓴 채 나타나면서, 퍼포먼스는 시작됩니다. 자, 여기서부터 심장이 쫄깃한 스릴러로 장르가 바뀝니다.


한 가지 주의 사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중략) 다소 무섭거나 불쾌해 보이는 상황이 일어나더라도 어디까지나 공연의 일부임을 명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여러분이 이 상황을 오인해 겁을 먹고 패닉에 빠질 경우, 공연 전반의 안전은 물론 여러분의 안전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주시고 침착한 대처 부탁드립니다.


회랑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리자, 긴 복도가 펼쳐집니다. 복도 안은 완벽히 검은, 무(無)의 공간으로 사람들을 압도합니다. 각 홀에는 슬라이스되어 허공에 걸린 양, 반쯤 해체된 채 갈비뼈를 드러내고 있는 짐승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관람자 대부분은 헛구역질을 하거나 고개를 돌려버리죠.


양으로 보이는 짐승이 반쯤 해체된 채 갈비뼈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 앞에서는 역시나 턱이 없는 플라스틱으로 된 하이에나와 독수리 가면을 쓴 턱시도들이 생고기를 게걸스럽게 먹고 있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양을 살폈다. 탁한 눈을 하고 허공을 보고 있는 양의 얼굴은 아무리 봐도 진짜 같았다. (중략) 어딜 봐도 늑대가 먹다 남긴 양을 두 턱시도가 뒤처리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진짜라면 충격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는 좀 다릅니다. 비릿한 피냄새 따윈 신경도 쓰지 않고, 머리를 빠르게 굴리기 시작합니다. 비슷한 퍼포먼스를 국내에서 할 수 있을지 계산하기 위해서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겁에 질리거나 혐오감을 가졌지만, 주인공은 서울에서 열릴 퍼포먼스를 구상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는 돈을 벌 생각에 가슴이 뛰기 시작합니다.

사진 : Unsplash.com

그러는 사이 '나'는 홀로 남겨집니다. 그는 다른 걸 놓칠까봐 초조한 마음으로 복도를 따라 달립니다. 그가 모퉁이를 도는 순간, 갑자기 벽 쪽에서 "끼익"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주인공은 반사적으로 발걸음을 늦춥니다. 천천히, 모퉁이를 완전히 돌자, 앞서가던 미대생이 보입니다.


그 순간, 눈앞의 검은 공간이 움직입니다. 주인공은 그것이 타이트한 검은색 옷을 입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본능적으로 문 뒤로 숨습니다.


그 검은 사람은 둔기처럼 보이는 검은 몽둥이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는 미대생 뒤로 다가가 그것을 뒤통수에 휘둘렀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미대생은 무너지듯 쓰러졌다. (중략) 무언가 질질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보지 않아도 쓰러진 미대생이 끌려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중략) 검은 문을 사이에 두고 피비린내가 훅 밀려왔다.


주인공은 그제서야 퍼포먼스를 자본이 아닌 '미술'로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왜 다른 관람객들은 보이지 않는 걸까? 왜 이곳의 복도들은 길고 빙빙 돌게 만들어졌을까? 왜 이 돈도 되지 않는 퍼포먼스를 무료로 보여주는 것일까? 왜 휴대폰은 터지지 않는 것일까? 왜 이 공연의 제목은 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일까?


주인공은 현실과 쇼 사이에서 방황합니다. 너무나 현실 같지만 이것도 잘 계산된 퍼포먼스의 일부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끊임없이 반복하죠.


그가 다음 홀에 들어선 순간, 턱시도를 입은 늑대 가면과 열두명의 비둘기 가면이 긴 테이블에 앉아 있습니다. 겁에 질려선 안된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애써 침착하게 대응합니다. 주인공은 이 자리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과 같은 구도로 앉아 있음을 깨닫습니다. 열네번째 자리는 없었죠.


"그런데 제 자리는 없는 거 같은데요."
"알고 계셨군요. 쇼는 계속되어야 하니까요."
비둘기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손가락으로 날 지목했다. 어디까지가 쇼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일까? 저들은 관람객일까? 공범일까? 아니면 또 다른 양일까?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뒷걸음을 쳤다. (중략) 등뒤로 발소리가 들렸다.
늑대는 미소 지었다. "괜찮아요. 아픈 것도 모를 겁니다."
경고. 결코 겁에 질리지 말 것.

위기의 순간, 주인공은 노신사의 말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으며 말합니다.



Review

개인적으로 소설은 잘 읽지 않는데, 엄청난 흡입력에 순식간에 읽었습니다.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상상하다 보니, 한 편의 스릴러 영화를 감상한 느낌이었어요. 뉴욕에서 비공개 퍼포먼스로 가는 과정이 다소 늘어지는 감이 있었지만, 후반부에서는 한 문장 한 문장, 긴장하면서 읽었습니다.


주인공이 미술과 자본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모습이 저에게는 흥미로웠습니다. 보통 '선배' 같이 부자지만 미술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책 속에서는), 주인공은 그림도 볼 줄 아니까요.


주인공은 처음엔 회랑의 모든 것들을 상업적으로 인식합니다. 이 퍼포먼스의 상업성만을 따집니다. 그러다 누군가 미대생을 쓰러뜨리는 장면을 보며, 주인공은 그제야 그 공간을 '미술'로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온통 미술로 가득한 공간 속에서, 주인공은 두려움을 느끼죠.


"아시다시피 현대미술에 무지한 사람들은 이 예술적인 모임을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이렇게 은밀한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대중들은 아무것도 모르니까요."


늑대 가면은 이 쇼를 예술적인 모임이라 말하며, 그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은 배제(?)했습니다. 현대 미학은 잉여의 돈과 시간이 없는 사람들은 결코 들어올 수 없는 장벽 너머의 세계였으니까요(82p).


현대 미학은 이 너머에 있습니다. 넘고 싶다면 충분한 돈과 시간을 지급하세요.^^


결국 늑대와 비둘기들은 '현대 미학을 사랑하는 금수저'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기존에는 미술이면 미술, 자본이면 자본 이런 식으로 두 계층이 나뉘어 있었고, 그 중간에 브로커들이 있었죠. 그런데 여기서 미술과 자본, 둘 다 '잘 아는' 집단이 생긴 것입니다. 즉, '미학적 감수성'이라는 개념 하에, 새로운 계층을 만들어 낸거죠(82p).


새로운 계층을 위한 공간(=쇼)은 오직 미술로 가득합니다. 그렇기에 양 역할을 맡은 '나'는 미술을 완성시키기 위해 죽어야 하겠죠. 최후의 만찬에 열네번째 자리는 없으니까요. 늑대 가면을 쓴 자도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며" 주인공을 포식하려 합니다.


주인공은 무슨 말을 했을까요? 살았을까요, 죽었을까요? 만약 살아남았다면, 어째서 살아남았던 걸까요? 그 반대는요? 순수한 미술마저 '돈'의 문제일까요? 책에서 말한 것처럼 미술은 오직 자본에 의한 것일까요? 노신사가 말하는 '진짜로 무서운 것'이 무엇일까요? 어째서 그는 주인공을 공포 퍼포먼스에 초대한 걸까요? 퍼포먼스는 진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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