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의 광주를 기억하며
오늘로써 두 번째 완독. 읽는 속도는 빨라졌지만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는 느려졌다. 이 책을 처음 읽었던 때보다 더 많은 것들이 내 안에 들어왔기 때문일까. 잔인함이 예전보다 더 강하게 다가왔지만, 내가 참을 수 없었던 것은 그보다 더 잔인했을 현실이었다. 첫 번째로 이 책을 완독 했을 땐 마지막 장 <꽃이 핀 쪽으로>가 가장 기억에 남았었다. 두 번째로 이 책을 완독한 지금은, 각 장을 비교하면서 무엇이 가장 인상 깊었고 어디가 여운이 남았는지 따지고 싶지 않다. 속수무책으로 다가온 현실에 견딜 수 없는 공허함을 느끼던 진수를 보며 나는 울음을 터뜨렸고, 잊히려 하는 살인마의 알량한 술책에 책상을 치며 분노했다. 이 책이 없었다면 지금 내가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었을까.
우선 이 책은 휴지를 무조건 옆에 두고 읽어야 한다. 내용 자체는 어렵진 않아서 분명 마음만 먹으면 2시간 이내로 완독할 수 있는 책인데, 필자는 눈물 닦느라 정신이 없어서 완독 하는 데 오래 걸렸다. 소설이지만 너무나도 현실적인, 사실 그 자체를 담고 있어서 더더욱 힘들게 읽지 않았나 싶다.
이 책의 저자는 국내 유명 소설가이자 한국인 최초로 2016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한 ‘한강’이다. 참고로 한강 작가님은 광주 출신이다. 당시 서울에 살았어서 실제로 그 날의 일을 겪지는 않았지만, 식구들에게 처참한 광경들을 듣고 어린 시절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다고. 그래서 그런지 작가님은 “이 소설을 피해 갈 수 없었다, 통과하지 않고는 어디로도 갈 수 없다고 느꼈다”라고 말했다. 아마도 같은 광주 사람이었기에 더더욱 이 책을 쓰겠다는 그런 책임감을 가지신 게 아닐까 싶다.
필자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한강 작가에 대해 낯선 감정을 갖고 있었다. 채식주의자라는 작품이 어렵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서, 왠지 그분의 작품 자체에 한동안 손이 안 갔다. 이 책의 에필로그를 보고 나서야 저자와 조금 더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필로그에서는 이 책을 쓰기까지 어떤 이야기를 들었고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어떤 생각을 하게 됐는지를 담담하게 담고 있다. 어린 시절에 겪었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기억할 만큼 충격이 컸던 일에 관한 이야기나, 수많은 참고 자료를 읽다 악몽까지 꾸는 이야기 등 이 책에 관련된 저자의 경험이 담겨 있다. 에필로그에서 저자가 고생한 흔적이 여실히 보였다.
줄거리는 사실 많은 분들이 알고 있듯이, 19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잔혹한 학살의 참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 책은 줄거리도 줄거리지만, 당시 사람들이 겪었던 아픔과 상처의 구조를 어떻게 서사적으로 나타냈는지에 초점을 맞춰야 할 거 같다. 필자가 이 책이 개인적으로 와 닿았던 이유는 '1980년 5월 광주’라는 역사적 사건을 전체적인 관점에서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곁에 있을 법한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또 이 책은 살아남은 자들 뿐만 아니라 죽은 자들의 입을 통해서까지 5월의 광주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5월 광주에 관한 소설이라면 이미 나올 만큼 나오지 않았냐는 물음을 종결시키는 작품이라 볼 수 있다. 증언하는 자의 소명의식과 듣는 자의 상상력이 치열하게 어우러지면서, 우리가 놓쳐선 안될 역사적 기억이 무엇인지를 절실하게 환기한다.
동호와 정대라는 중학생 소년 둘은 총을 든 군대가 있음에도 앞으로 전진한다. 누가 봐도 어린 학생이었기에 앞에 서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정대를 포함해 동호는 군인들에게 잔혹하게 총살당한다. 여성 공장 노동자인 성희는 노동법을 배우면서 부조리한 근로 현실을 깨닫고 저항하고 시위한다. 경찰이 이들을 겁주자, 여성 근로자들은 옷을 벗고 건드리지 말라며 항거한다. 그녀들이 지닌 가장 은밀하고 귀중한 것을 내놓음으로써 경찰이 함부로 할 수 없게끔 하려고 했다. 하지만 헬멧과 방패로 중무장한 경찰 백여 명은 속옷 차림의 어린 여자애들을 흙바닥에 끌고 가고, 수십 명의 노조원들을 곤봉과 각목으로 때려 닭장차에 집어넣고, 조사실에서 성고문을 한다.
1980년 5월, 수많은 광주 시민들이 이유도 모른 채 죽음을 당했다. 여기엔 대학생은 물론, 중고등학생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도청에서 마지막으로 저항한 광주 시민들은 결국 총을 쏘지 않지만, 군인들은 총을 버리고 항복하러 내려오는 아이들을 무참히 쏴 죽였다. 국민을 보호하고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국가가 국민을 죽이고 사실을 왜곡시킨 것이다. 죄는 국가가 저질렀는데, 올해 여든일곱 살, 멀쩡히 살아있는 학살자가 저질렀는데, 온갖 피해와 고통은 당사자와 그의 유가족들이 겪고 있다. <소년이 온다>는 이러한 아픔들을 무척이나 담담하게 설명한다. 그래서 더더욱 슬프다.
필자는 인간 실존에 대해서 고민했다. 이유를 모르고 죽이는 사람들과 이유를 모른 채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인간의 잔혹함은 어디까지인지, 인간이 인권을 유린하고 파괴하면서까지 얻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한참을 고뇌하고 힘겨워했다. 채 성인이 되지 못한 채 죽은 아이들,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죽어간 젊은 학생들을 함부로 도륙하고 살해한 사람들이 과연 인간인가? 이런 사람들이 지금도 살아있을 텐데, 과연 그들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걸까? 유가족을 포함해 독자들은 이렇게 분노하고 있는데, 아직도 가해자들의 사과나 해명이 없는 이 현실이 개탄스러웠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 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p135)
우리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소년이 온다>라는 이 작품이 없었다면 아마도 우린 또다시 그 역사를 망각했을 것이다. 광주를 잊는 것은 곧 인간의 존엄을 망각하는 것이고, 광주를 기억하기 위해서는 고통스럽더라도 이 책을 통해 광주의 상흔을 정면으로 봐야 한다. 그리고 이런 진실을 깨부수고 왜곡하려는 악의 조작에 저항해야 한다.
<소년이 온다>는 더 이상의 이야기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수많은 자료들과 텍스트들을 뛰어넘는 가장 비극적인 이야기였다. 작가가 이 책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이 공부했는지 알 수 있었고, 또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여실히 보였다. 1980년 5월의 광주에서 미처 듣지 못한 목소리를 이 책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필자가 여태껏 읽은 책 중에 가장 여운이 강했던 작품이고, 또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