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필름과 박수남

by 수웊





처음 사용한 흑백필름의 사진들은 기술이 부족해서인지 아득하고, 불투명하다. 사진 속 배치를 한참을 또렷하게 보려고 애써보다, 흐린 채로 그렇게 두는 것이 맞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난시로 인하여 영화관 스크린이 또렷하지 않아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 영화관에 갈 때 하나의 장비를 챙기는 행위로 인해 마음이 두둑해진다. 안경으로 또렷하게 보게 될 거란 그 사실 하나로. 난시 안경을 쓰고 난치병으로 시력을 점점 잃어가는 감독의 삶을 본다. 나이가 들고 시력을 잃고, 분명 약해져 가는 육체일 텐데 전혀 약해 보이지 않는다. 감독의 기개는 148분이라는 러닝타임을 방심하지 못하도록 영화를 이끈다. 은근하게 찾아온 감기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음에도. 흐린 눈으로 영화를 보는 것을 힘들어하는 나의 상태가 가소로워졌다. 영화를 보고 강한 바람을 뚫고 감성적인 인테리어를 갖춘 식당에서 곰국 한 그릇을 비운다. 따뜻한 것을 채우니 멍하던 머리와 코가 제법 촉촉해지며 부드러워진다. 하지만 눕고 싶다. 여전히 드러눕고 싶다.












<되살아나는 목소리>를 생각하며 목정원 작가의 사진 산문집 글이 떠올랐다.






인류 최초로 기억의 기술을 고안한 사람은 그리스의 시인 시모니데스다. 그는 한 연회에 참석했다가 두 소년이 찾는다는 소식에 밖으로 나갔고, 그 직후 땅이 흔들려 저택이 무너졌을 때 홀로 목숨을 건졌다. ... 유일한 생존자가 된 시모니데스에게 파도처럼 사람들이 밀려왔다. 죽은 자의 흩어진 몸을 찾을 수 있게 도와달라고. 혹은 적어도, 그가 있었음을 확인해 달라고. 그가 있었어야만, 그를 애도할 수 있기 때문에. ... 삶에는 장면이 되는 순간과 채 장면이 되지 못하는 순간들이 있어, 허다한 얼굴이야 희미해져도, 장면 속 당신이 어디에 앉아 있었는지, 그때 당신의 왼쪽 뺨으로 겨울 한낮의 햇살이 쏟아지던 것을, 나는 잊을 수가 없는 것처럼.

_<어느 미래에 당신이 없을 것이라고> 목정원 사진 산문


앞이 점점 보이지 않게 되지만 늙어가는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발군의 기억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안심하세요."




영화관 근처에 있던 분향소에 들러 애도의 시간을 갖는다.


무의미에 자꾸 빠지는 나에게 삶을 챙기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다. 어떤 죽음 앞에선 과분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갑자기 소리 내어 말하고 싶은 충동이 안에서 일어난다. 무대에서 단단하게 서며 말을 내뱉고 싶어 진다.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 도착점이 의미 없음이 될지라도 진중한 의미를 갖고 싶다고.




내가 가장 두려운 것은 내일의 나이다. 지금의 의욕이 무색하게 무기력한 아침을 맞이하는 나를 여전히 두려워한다. 감독보다 몇십 년을 뒤에 태어난 내가 더 연약하다고 느껴진다. 적어도 타고남으로 길에서 돌도 맞아보지 못한 내가 고작 내일의 나를 두려워하다니 말이다. 젊은 감독의 얼굴로 만들어진 작은 포스터를 침대에서 잘 보이도록 붙여둔다. 아침의 두려움이 줄어들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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