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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살롱 Feb 25. 2019

단아하게 할 말 하기

보통 사람들이 싱글에게 던지는 무례한 말에 대하여

왜 결혼 안 했니?
결혼을 못한 거예요? 안 한 거예요?
이제 포기할 때 안 됐냐?
넌 결혼도 출산도 안 하니까 세금 더 내야 해.


이것은 내 커리어 중 가장 좋은 사람들로만 가득했던 회사에서 들은 말들이다. 첫 면접부터 사람이 미래인 회사에 평생 몸담은 임원 분은 "왜 결혼을 안 했니?"라고 물었다. 당황했지만 자기 객관화를 한 척 "예전엔 안 했고 지금은 못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됐냐?!'라는 기분을 담아 답을 내놓았다. 입사 일주일도 안 되었을 때 이번에는 어이없게도 여자 화장실에서 총무팀의 또래 유부녀 직원에게 비슷한 질문을 당했다. 세면대에서 손을 씻으며 거울 속 나를 향해 "결혼을 못한 거예요? 안 한 거예요?" 응? 님, 나랑 친하니? 저기요, 인트로도 없니? 우리 둘이 가벼운 대화라도 한 적 있었니? 질문의 맥락은? 예의는 어딨니? 둘만 있는 화장실에서 왜 그게 궁금하니? 나 지금 말로 따귀 맞은 거 같은데 맞니?



보통의 선한 사람들이 무례를 저지른다

아재로 가득한 회사의 대표아재이자 동향 선배라 은근히 잘해주신 상사는 "인마, 넌 세금 더 내야 해. 결혼도 출산의 의무도 안 하잖아."라고 하셨고, 늘 몸을 한껏 쭈그리고 자조적인 개그를 (적어도 나에게는) 빵빵 터뜨리는 옆팀 팀장님은 밥을 사주시고는 "니 나이 정도면 포기할 때 안 됐냐?"라고 했다. 서른여덟 일 때였다.

하아. 아버님들. 가장 보통의 선한 사람들이 무례를 저지른다. 회사는 뭐랄까 이제는 사라진 멸종 동물 같은 정다운 기업문화를 갖고 있었다. 스트레스 많은 광고회사임에도 아침이면 일일드라마 속 사무실처럼 어제저녁에 있었던 일로 하하호호 담소를 나누며 커피를 마셨고, 점심이면 경주 최부잣집도 아닌데 백리 안에 끼니 거르는 사람이 없도록 서로의 밥을 꼭 챙겼다. 각자 1인 회사처럼 무시무시한 업무량으로 업무시간에는 딱 업무만 하고 저녁이면 전원 칼퇴를 하거나 칼퇴를 독려하였다. <전원일기> 같은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프로인데 따뜻한 인간미가 있는 회사. 그런데 그렇게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고정관념에 비췄을 때 별종인 나를 보니 무엇보다 신기함이 앞서 '이런 말이 무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은 것 같았다.  

반대로 이전까지 근무한 패션지 업계는 정말 베일 듯한 칼 같은 말도 자주 오갔다. 싱글 여성이 태반이기 때문에 결혼에 관한 이런 식의 질문은 주고받아본 적이 없다. 누구보다 그 답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내 선배와 후배와 상사니까. 서로가 어제의 자신이고 내일의 나인데 뭘 물어? 이 나이쯤이면 대부분 결혼할 뻔한 사람과의 과거 하나쯤은 있다. '어릴 때는 결혼이 싫었고 이제 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을 때는 충분히 사랑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게 내 면접 답변인 셈인데 대개들 비슷했다. 다들 조금씩 별나지만 모두가 별난 곳에선 그게 정상이다. 결혼 따위 안물안궁. 피차 묻지도 않고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다만 어디서 저런 말을 들었다면 다들 동지애가 발동해 분기탱천하여 함께 열을 올려주지.



'빙그레썅년'을 아시나요?

무조건 일을 떠넘기고 사내에서는 늘 성실한 워킹맘 코스프레의 ‘토스의 달인’ 선배도 일종의 빙그레썅년이시다.


단아하게 할 말 다 한다. 내가 자주 듣는 말이다. "OO는 조곤조곤, 할 말 다 하잖아." "세게 말해도 왠지 부드러워서 상대방은 기분 나쁘게 안 받아들일걸요." 방점은 '할 말 한다'에 찍혀있다. 할 말은 한다. 건드리면 가끔 물기도 한다.

우리 업계에는 '빙그레썅년'이라는 용어가 있다. 웃으면서 어이없는 일을 미루거나 다정하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여자를 말한다. 당하는 입장에서야 울화통이 터지고 상황이 반전되면 '빙썅'도 뿌린 대로 거두게 되지만, 어찌 됐든 그 순간에는 당사자와 그 회사 입장에서는 일을 잘하는 것이다. 본인은 손 안 대고 코 풀고, 회사는 같은 돈에 더 많은 서비스를 받게 되니까. 빙썅은 주변 상황이나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감정은 살피지 않는다. 그렇다, 작은 트럼프다. 방식은 따지지 않고 원하는 바를 반드시 얻어낸다.

일반적으로 자기반성을 너무 많이 하는 사람은 크게 성공하기 어렵다. 이 사람 감정도 살피고 저 사람 눈치도 살피며 절충하다 보면 결과가 애매해진다. 또한 여자들에게 학습된 겸손한 태도가 자기 분야에 있어서는 마이너스가 될 때가 많다. 남자들은 우리가 한 것도 '내가' 했다고 하는데, 여자들은 내가 한 것도 '우리가' 했다고 말한다. 결혼에 대한 사적인 공격에도 그저 착하게, 속으로 삭히는 거... 나에게만 나쁜 게 아니라 장기적으로도 좋지 않다. 상대방은 앞으로도 어딘가에서 비슷한 여성들에게 지속적으로 실례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홀로 삼십 대 중반을 지나는 여자들이 부당한 언어폭력에 대해, 자신과 그다음 사람을 위해 안에는 빙그레썅년이되 겉은 달달하게 포장해서 할 말을 다들 했으면 좋겠다. 딱 '단아하게 할 말 하기, 생글생글 시비 걸기, 웃으면서 뼈 때리기' 가 어떨까.

아래는 내가 줄 수 있는 쁘띠 빙그레썅년 팁이다.



단아하게 할 말 하기

말투는 상냥하게, 내용은 단호하게

사실 이건 일하면서 든 버릇이다. "차장님이 이런 거 잘하시잖아요?" 갑중갑이었다. 금액 추가 없이 은근슬쩍 일을 더 맡기려는 클라이언트의 요구였다. '아니, 잘하면 돈을 줘야지, 일을 주는 게 아니에요'라는 말을 꾹 누르고 "거기까지는 저희의 롤이 아니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과장님도 이해하시다시피, 저희도 대부분은 제작원가여서 0억 원은 되어야 이 프로젝트에 동기부여가 돼요."로 견적금액을 사수한 적이 있다. '저희'도 포인트다. '당신은 나 개인이 아니라 이 회사와 일을 하는 것이므로 정식으로 요청하라'고 회사를 끌어들였다. 비슷한 식으로 싱글에 관한 언어폭력에 대응할 때는 "상무님, 요새 유행어 중에 맘충, 개저씨라고 있는데 혹시 아세요?"라면서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드렸다. 물론 말하고 싶었던 건 '개저씨'였다.   


생글생글 시비 걸기

상의하는 척 물어본다

나이 많은 아줌마 부장님이 노총각 클라이언트와 같이 따로 밥도 먹고 그러라며, 대머리 노총각 예민 쟁이 클라이언트를 내게 갖다 붙이려 한 적이 있었다. 아무것도 몰라 진심으로 묻는 척 "제가 그분에게 잘 보여야 하는 거예요?" 했다. 그녀는 놀라서 손사래를 치며 "아니, 아니지." 세상 프로페셔널한 모습의 자신을 사랑하는 그분의 도덕을 건드렸다. 주변에 여러 명이 있다면 더욱 효과적이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못남을 공식화하게 되기 때문이다.   


웃으면서 뼈 때리기

필요하면 위협도 한다

미투 사태로 보듯이 권력관계가 확실한 곳, 폐쇄적인 곳일수록 여성에 대한 불합리한 일이 많이 일어난다. 교사인 친구에게 한 선배 교사 얘기를 들었다. 회식 자리에서 술이 좀 들어간 교감 선생님이 옆자리의 여선생님 손을 자꾸 주물럭거리자, 그 선생님은 두 손으로 교감의 손을 더욱 어루만지며 "아휴, 우리 교감 선생님 왜 이러실까? 돈 많이 모아두셨어요?" 하더란다. 선생님, 리스펙트!



지금 할 말을 해야 언젠가 말 안 해도 되는 세상이 온다

"면접을 보는데 왜 결혼을 안 했냐고 묻는 거예요. 정부 산하 기관에 지원할 때 이제 결혼 유무 쓰지도 않고 언급하지도 않거든요? 왜 물어보시는 거냐고 물으니, 일을 하게 되면 자기네도 그걸 알 필요가 있다고 설명을 하더라고요.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어요."


나와 똑같다. 올해로 마흔을 맞고 이직을 준비 중인 아는 동생이 며칠 전 겪은 일이다. 3년이 지났어도, 사기업이든 비영리기관이든 세상은 똑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 친구는 나와 달랐다.


"면접이라는 것이 기업만 대상자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자인 개인도 기업을 탐색하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저도 이 회사를 충분히 알았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왔다. 멋지다. 평상시 들어본 바로 재단이나 정부 관련 기관은 겉으로는 멀쩡한데 어이없는 일이 많은 것 같다. 클라이언트도 있는 단체 카톡방에서 "조금만 수정하면 되겠어요. 이쁜이 수술처럼."이라고 말하는 상사 얘기를 이미 들었던 터라 이번엔 놀랍지도 않았다(여러분, 이게 2019년에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이 분은 최근엔 아프리카에 출장 다녀온 교수에게 '진짜 아프리카 여자들이 상체를 헐벗고 다니냐'를 집요하게 물었다고 한다(여러분, 무엇을 상상해도 그 이하인 사람들이 세상에는 있습니다).


결혼 안 한 여자에게 하는 말들 중에는 참으로 뭐라 대응하기 힘든 말이 많다. 나 역시 동요했다가는 '노처녀가 예민하다' '저러니까 시집을 못 갔지'하는 말을 듣기 십상이기에 그냥 지나갈 때가 많았다. 자고 나면 잊겠지 하고. 그런데 하루가 지나도 삼켜지지 않는 말이 있다. 곱씹었을 때 나쁜 말은 진짜 나쁜 말이다. 하지만 지나고 나서 뭐라 하는 건 상대방에겐 당황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강아지를 훈육할 때는 잘못한 그 자리에서 바로 혼내는 게 원칙이다. 비슷하다. 꾹 참다가 며칠 지나 사과를 요구하거나 느닷없이 단체 카톡방을 나가거나, 갑자기 입을 꾹 닫는 등의 행동은 이해받기가 어렵다. 무례한 말을 들었을 때는 그 자리에서 대응할 것. 이렇게 '할 말하는 여자' 1, 2, 3이 쌓이고 쌓이면 언젠가 세상도 바뀔 것이다.


모든 사람은 각자 자기 인생의 무게를 안고 살아간다. 내 인생의 무게는 내 몫이다. 결국 그 사람들은 나의 인간적인 성숙을 돕는 사람들이다. 정확하게 할 말은 하지만 솔직하고 여유롭게 대처하려는 태도. 이런 태도에 대한 고민은 결국 스스로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을 성숙시키고 '나다운' 매력을 배가시킨다. 적어도 이렇게 나에게 쓸 거리라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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