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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살롱 Feb 10. 2020

관계도 마음도 상하지 않는 거절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산뜻한 거절의 말이 있다

"제가 하다가 중간에 죄송한 말씀을 드릴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다정도 하지. 한 해 동안 들은 거절의 말 중에 가장 상냥한 거절이었다. 어떤 프로젝트를 맡아 일을 함께할 사람을 찾고 있을 때였는데, 이 말을 한 건 돌이 갓 지난 아기를 두고 재택근무 중인 에디터였다. 첫 통화에서는 친한 친구의 소개라 그랬는지 우선 수락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얼마 전 크게 아픈 아기 건강이 어떨지 모르는 상태에서 컨펌과 미팅이 바삐 돌아가는 일은 어려울 것 같다고 판단했단다. '그렇지. 중간에 못한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변수를 고려하고 처음에 상대가 선택하게 만드는 게 맞지.' 그러면서 지인을 소개하며 이미 내용은 이야기해두었다고 통화해보라고 덧붙였다.

이상하게도 거절당했는데 일을 한 번도 같이 해보지 않은 그녀에게 상당한 호감을 갖게 되었다. 무언가를 알아봐 주는 행동은 상대를 위해 시간을 쓰는 일이다. 그 부분에서 사람들은 진심을 느낀다. 그래서 거절이어도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던 것이다. 동시에 거절 화법을 나도 하나 배웠다.

최근엔 분기로 진행되는 프로젝트를 거절할 일이 있었는데,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지금은 먼저 약속해놓은 일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요. 앞으로 3~4개월은 어렵지만 그 이후까지 거절하는 것은 아니에요."라고 답했다. 뭐랄까 예술 점수는 떨어지지만 기술 점수는 채운 거절의 정석 같은 답이었다.



묘하게 무례한 부탁 & 대놓고 무례한 부탁

살다 보면 기억에 남는, 반드시 거절해야만 했던 부탁들이 몇 가지 있다. 그런 부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일단, 묘하게 무례한 부탁이 있다. 응? 우리 사이 아직 그런 사이 아닌데 선을 넘는 부탁, 거절은 거절한다 식의 무조건 예스라는 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부탁, 들어주기에는 양심에 걸리는 부탁 등. 한번 만나고 청첩장을 주는 사람도 있고 일할 때는 슈퍼갑 모드였다가 사적인 시간이 되면 마치 진동벨이라도 울린 듯 절친 모드로 부탁하는 사람, 자신이 꾸미는 거짓말에 잠깐만 협조해달라는 사람, 아직 어떤 관계가 될지 모르는데 본인 SNS에 함께 찍은 사진(물론 자신이 잘 나온 사진 우선)을 올리는 사람. 인간은 다종 다양하다. 이런 부탁은 안 들어주는 사람이 나쁜 게 아니라 부탁하는 사람이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어려울 것 같다고 그 자리에서 미안하다고 해도 된다. 그게 잘 안 될 때는 거절의 결정 주체를 다른 사람이나 시스템으로 돌리는 것도 방법이다. '~와 상의해보고 나서' '회사의 방향과 맞지 않아서~' '요즘 경기가 너무 안 좋아서~' '우리 아파트 반려동물 규정이 엄해서~'. 안티팬이 없는 범국민적인 셀렙을 살펴보면 은근히 이런 화법을 구사하는 분들이 많다.   

대놓고 무례한 부탁은 여기에 비하면 몹시 쉽다. 대학 때 모두에게 친절하고 사람 좋다는 평을 듣는 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가 과외하는 학생에게 부품값만 받고 조립컴퓨터를 맞춰줬는데 과외를 그만둔 지 1년이 지난 어느날 학생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선생님~ 컴퓨터가 고장이 나서 그런데 수리해줄 수 있어요?" 하아. 할많하않. 친구는 수리는 안 해줬지만 결국 씩씩거리면서도 수리처를 알아보고 연결해줬다. 또다른 친구는 3학년 때였나 너무 소비벽이 심해서 엄마에게 신용카드를 뺏기고 용돈도 1/3로 줄었다. 갖고 있던 명품백을 다 팔고 엄마 몰래 피아노를 팔고도 쓸 돈이 부족했던 친구는 "니 이름으로 신용카드 발급받으면 안 될까? 내가 결제대금은 바로 줄게." 당시 나는 30만 원인가를 빌려주고 부탁은 거절했던 것 같다.

사회생활을 많이 했다고 선을 넘는 부탁을 안 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이번 친구는 가족이 함께 쓰는 호텔 회원권이 있는 친구. 이 친구는 호캉스를 몹시 좋아하는 50대 디자인 실장에게 종종 카드를 빌려줘 라운지 뷔페나 수영장 이용을 도와줬다. 덕분에 그녀는 본인의 생일이나 여름휴가 때 특급호텔에서 보내는 화려한 파티를 SNS에 올릴 수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는 예약 1시간 전에 취소를 해 친구가 번거롭게 호텔에 전화를 하게 만들지 않나 룸 연박을 부탁하질 않나 한 마디로 부탁의 선을 가볍게 넘었다. 이 둘이 만난 총횟수는 열 번이 안 될 정도로 안지 얼마 안 됐다. 그리고 당연히 호텔 멤버십은 금액에 따라 연간 숙박일 수가 정해져 있고 쓰면 차감된다. 가족도 이용하지만 자영업을 하는 친구는 해외서 손님이 왔을 때 투숙 용도로 혜택을 활용하는데...

"친구 부부나 가족이 특별한 날 가고 싶다고 하면 카드 잘 빌려주거든. 뭘 바래서 하는 건 아니지만 그럼 작은 선물이라도 함께 카드랑 돌려주거나 하는데 그 사람은 그런 적도 한번 없어."

"당연해진 거네. 호의가 계속되면 둘리가 된다더니, 컨시어지 둘리가 됐어."



내가 거절할 때 지키는 네 가지

거절은 본질적으로 '불편함'을 견뎌야 한다. 부정적인 답변을 해야 하는 불편, 거절 뒤의 관계 변화를 신경 쓰는 불편. 하지만 이 잠깐의 불편을 피했다가 영원히 불편한 사이가 될 수 있기에 무리가 되는 부탁에는 '다음'을 생각해서 거절하는 것이 현명하다. 거절이 낫다고 생각했을 때는 적어도 몇 가지를 지키려 노력하는 편이다.


첫째, 상대가 납득할 만한 거절의 이유를 꼭 말한다. 인지상정이라고, 누가 들어도 이해 가는 사정이 있으면 거절을 받아들이기 쉽다. 이런 경우 보통은 감정적인 것보다는 상황을 설명하면 서로의 관계를 지킬 수 있다. 사실 대부분의 설득은 이게 가장 큰 요소다. 누가 봐도 납득이 가는 이유면 에너지 쓸 일이 없다.

둘째, 가급적 빨리 거절하려 한다. 마찬가지다. 회사에 퇴사 의사도 여유시간을 두고 미리 말하는 게 좋듯 거절도 상대를 생각해 의사를 빨리 밝히는 것이 좋다. 대안을 찾을 시간을 주는 게 좋으니까. 바로 판단하기 어려울 때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라고 하고 언제까지는 답을 하겠다고 말한다. 제안이나 부탁을 받았을 때는 남에게 어떻게든 맞춰주려는 성격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 내가 손해를 보는 일이 생겼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톡 메시지나 문자보다는 직접 전화로 이야기한다.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는 내 감정을 음성에는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마음이 내키지 않을 때는 무리해서 응하지 않는다. 마흔이 넘어 보니 무리한 부탁을 수락했을 경우는 진행과정서 문제가 생기는 걸 꽤 많이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럴 땐 진짜로 심각하게 관계가 망가질 위험이 있다. 참거나 승낙만 한다고 좋은 사람 되는 게 절대 아니다. 응하기 전 씨앗이었던 위험 요소가 대형 사고로 발아하고 울면서 꾸역꾸역 그거 치우는 호구가 된 적, 설마 나만 있는 건 아니겠지?

마지막으로, 위트가 있으면 좋다. 제안과 수락, 부탁과 수용은 진지한 화제다 보니 대화에 무게감이 있다. 거절은 더 무겁다. 가벼운 말투로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정중하게 거절하되, 대화의 마지막 입가심을 산뜻하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세보증금 수준의 금액을 빌려달라는 부탁에 "고마워. 나를 그 정도 가용 현금이 항상 있는 걸로 봐주는 거야? 그런데 사실 그 정도 능력이 안돼(정말 그 돈이 없었다)."라고 한 일이 기억난다. 또는 투자 제안에 거절하면서 "분명 3, 4년 뒤에 네가 부자가 되면 나는 배 아파하며 이 기회를 놓친 걸 땅을 치며 후회하겠지?!"라고 덧붙이는 식이다.


이리 정리해봐도 거절이란 여전히 입에서 떼기 힘든 말이다. 주위에는 경쟁사 보스의 스카우트 제안에 예술적인 거절 메일을 써서 도리어 호감도가 상승해 나중에 다른 더 좋은 자리를 그분에게 소개받았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도 있지만, 흔한 일은 아니다. 거절하며 이미지에 마이너스만 안 되어도 성공한 거절이지.

부탁과 거절의 원리는 간단하다. 일단 전제부터 생각해보자. 정말 서로를 깊이 이해하는 사이라면 상대에게 부담이 될 만한 부탁은 최소한으로 한다. 수락할 상황이 되고 의지가 있으면 오케이 하면 된다. 그리고 도와줄 때는 선뜻, 거절할 때는 산뜻하게. 수락도 거절도 결국 요령보다는 진정성이 가장 중요하다. 오는 부탁이 고와야 가는 거절도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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