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좋아하는 것을 느긋하게
바리스타 실기 시험에 떨어졌다. 두 달을 몸에 커피 탄내 풍기며 다녔는데. 60점만 넘으면 되는 건데. 보통 합격률이 70%는 된다는데. 백 명 중에 한두 명 떨어진댔는데. 누가?
시험장 대기실에 뒤늦게 땀을 뻘뻘 흘리며 들어오신 허리가 굽은 어느 70대 할아버지가.
"이건 어지간하면 다 붙어. 나 같은 노인이나 백 명 중에 한두 명 떨어지는 거지."라고 하셨는데 아마 그 둘이 할아버지와 나였나 보다.
그때 어디서 주워들은 부동산 투자 속설이 생각났다. 분양사무실에 아기 업은 엄마가 오면 부동산 경기는 끝물이니 발을 뺄 때라고. 걷기도 힘들어하시는 할아버지까지 응시할 정도면... 할아버지의 도전을 뭐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금 대한민국에서 커피란 무엇이란 말인가. 공급과잉이다. 꼭 그분이 아니더라도 대기실에는 카페 창업을 염두에 둔 듯한 중년 응시생이 많았다.
진즉부터 알고는 있었다. 어서 카페를 열고 싶어서 가게 자리부터 알아보는 초급반 분들(걔 중에는 홍천서 서울까지 와서 듣는 이도 있었다)이나 필기시험 고사장인 고등학교 운동장을 가득 메웠던 응시생 차량을 보았기 때문에. 진짜 전망이 밝은 건 카페가 아니었다. 역대 최고 응시율을 기록했다는 바리스타와 커피 교육시장이었지. 학원은 시험 응시생이 많아 신청 1일 차 오전 10시에 이미 신청이 불가능했고, 강사는 이런 적은 처음이라며 본인 담당 강의를 주 6개로 늘렸다. 그들은 물 아니 커피 들어올 때 노를 젓고 있었다.
솔직히 나는 커피에 큰 관심이 없다. 카페인에 민감해 20대 후반부터나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고 그것도 저녁 무렵에는 마시지 않는다. 반대로 홍차나 허브차, 티 종류는 무척이나 좋아해 즐기는 차도 많고 주변에도 취향이 알려져 있어 선물도 많이 받는다. 무엇보다 마음이 힘들 때 하는 자가치료 중 하나가 홍차 마시기다. 작년 초 마흔 병에 마음이 심란했을 땐 술이 아니라 홍차를 과음해서 카페인 과다로 눈밑 떨림 증상이 올 정도였으니.
그런데 왜 커피를 배우려 했을까?
조급해서. 대중성 때문에. 대중적인 거 먼저 하고 그다음에 내가 좋아하는 걸 배워야지 마음먹었다.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으니까, 홍차는 국민소득 삼만 불 시대부터나 즐기기 시작한다니까(우리나라도 올해 돌파를 하긴 했지만 알다시피 기업과 개인의 체감소득이 많이 다르다), 살다 보면 모르니까 시간 날 때 인기 많은 커피를 배워두면 좋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늘 이렇게 애매하게 살아왔다. 내가 좋아하는 건 따로 있으면서 남들이 좋아하는 걸 해야 하지 않을까 망설이다 결국 시간 낭비하는. 자기계발서라고는 내 돈 주고 산 건 한 권도 없으면서 핀터레스트에서 성공 조언 10가지 같은 게 있으면 잘도 저장하는, 애매한 도전자.
아마 그런 데서 이런 것도 봤을 거다. '매년 새로운 시도를 하고 그 끝에 성취감을 맛보라.' 같은 말.
올해는 새로운 시도를 하긴 했는데 성취감 대신 다른 깨달음을 얻었다. 중년은 무조건 최애(가장 좋아하는 대상)를 선택해야 한다는 거. 제일 좋아하는 것만 하기에도 시간이 많은 게 아니고 달려드는 에너지와 체력이 다른데 차애(두 번째로 좋아하는 대상)가 웬 말? 공교롭게도 커피를 배우러 다니면서 일이 바빠져 몸은 힘들고 하나에 집중하기 힘든 시기가 되었다. 그렇다고 중간에 관두자니 이제껏 투자한 시간이 아깝고.
그놈의 매.몰.비.용.
관심이 없으니 동기부여도 제대로 안 된 채 들인 돈과 시간이 아까워서 꾸역꾸역. 그리고 실패. 본전 생각나서 발을 못 빼면 남는 건 후회와 빚, 상처뿐이다. 재미가 자신을 움직이는 사람일수록 최애를 선택해야 성과가 나는 법인데, 또 남의 말을 듣고 그만...
20대 때 방송작가인 친구와 나는 "소고기 사주는 사람은 따로 기억해요."라고 했다. 초보 예능작가인 친구나 나나 소고기를 내 돈 주고 사 먹기에는 화려한 미디어 업계 속 풋내기일 뿐이었다. 그래서 소고기를 사주는 지인이 부르는 자리에 서로를 불러내거나 강남 대형 갈빗집에서 하는 미디어 행사가 있을 때 참석자 명단에 넣어 함께 하기도 하고 그랬다(때마침 친구는 맛집 소개 프로를 고정으로 하고 있어 명분이 충분했다). 그랬던 친구와 며칠 전 통화.
"내가 소고기를 안 좋아하더라고. 냄새도 느끼하고."
풋내기들이 무작정 비싼 게 좋은 줄 알던 시기가 갔다. 내게 맞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경험치가 쌓인 뒤, 우리는 이제 진짜 자신의 취향을 안다. 물론 나는 여전히 소고기를 좋아한다.
그때보다 더 살아서 소고기의 의미도 더 잘 안다. 힘들 때는 주위에 소고기 사주는 사람이 는다. 맞다. 소고기는 사랑이고 사심이다. 대가 없는 소고기는 없다. 순수한 마음은 돼지고기까지다. 그러니까 더 좋다. 이것이 소고기에 대한 40대의 내 입장이다. 60대에는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지만.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안다는 건 중요하다. 법정스님 말씀도 그렇다. 스님의 법문을 보다 보면 "사람은 현재를 사는 거예요."라는 말씀이 자주 나온다.
삶은 미래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입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살 줄 알아야 합니다. 지나간 과거나 오지도 않은 불확실한 미래에 생각을 팔아 현재에 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몇 번을 보며 마음을 다스리던 말이다. 당연히 여유를 가지라는 이야기도 늘 덧붙이신다.
그중 좋아하는 대목 하나.
이 이야기는 초기 아프리카를 탐험한 유럽인들의 경험담입니다. 한 탐험가가 밀림을 뚫고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었는데, 그는 짐을 운반해 줄 세 사람의 원주민을 고용했습니다. 많은 짐을 가지고 가야 하고 길 안내도 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흘 동안 충분한 휴식도 취하지 못한 채 서둘러서 밀림을 뚫고 앞으로 계속 나아가기만 합니다. 사흘 째 되는 날 짐꾼들은 자리에 주저앉아서 더 움직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잘 가다가 갑자기 짐꾼들이 움직이려고 하지 않자 탐험가는 매우 화를 냅니다. 서양 사람들이 미개인들한테 곧잘 그러듯이 화를 냅니다. 실제로는 미개인이 아니라 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원주민입니다.
탐험가는 화를 내면서 예정된 날짜와 시간까지 목적지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에 어서 가자고 재촉합니다. 그러나 짐꾼들은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윽박지르기도 하고 달래기도 했지만 그들은 전혀 요지부동입니다. 그래서 탐험가는 그들 중 한 사람을 붙들고 잘 가다가 주저앉아서 가지 않는 이유를 말해 보라고 합니다. 그러자 원주민이 대답합니다.
“우리는 이곳까지 제대로 쉬지도 않고 너무 빨리 왔어요. 이제 우리 영혼이 우리를 따라올 시간을 주기 위해서 이곳에서 기다려야만 합니다.”
- 법정 스님 법문집 2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
영혼이 우리를 따라올 시간. 법정스님 말씀처럼 영혼이 우리를 따라올 여유를 주어야 한다. 구불구불 돌아 때로는 길을 잃고 헤매기도 했던 20, 30대. 그 시간을 지나 자기 자신을 더 잘 알게 된 마흔 즈음. 느긋하게, 내가 원하고 잘하는 것이 뭔지를 살펴보고 그것을 하면 된다. 이제는 생각보다 자신의 취향과 능력 파악이 잘 되어있다.
"중년이여, 시간이 있을 때는 제일 좋아하는 걸 하세요. 남의 말에 휘둘리지 말고 조급해하지 말고 여유 있게 지금 바로 최애를 하세요."
이렇게 요즘 나는 최애전도사가 되었다. 나쁜 일이 도리어 좋은 경험이 되는 경우가 많다더니 이번 낙방이 그랬다.
명함에 있던 회사명이 없어지고 쫓기듯 급하게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자격증을 준비하거나 뭐라도 해야할 것 같은 불안감에 무작정 자기 일과 무관한 수업과 활동에 열심인 사람들아. 내가 그 드물다는 백 명 중에 한두 명 떨어진 사람 자격으로 말하는데, 중년은 완전히 다른 새 사람이 되려고 하는 거 아닙니다. 없는 걸 꺼내 쓸 수는 없어요. 자기가 관심이 있고 원래 갖고 있는 걸 꺼내 써야지.
두 달을 주고 산 경험. 내겐 바리스타 학원에서 산 4장의 행주와 앞치마, 그리고 이 깨달음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