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쓸모의 쓸모, 가끔은 가성비 없게
“체중계에 오를 때 다 벗고 올라가지 않아요?” “화장실도 꼭 다녀오고!” “머리카락도 다 말리고 재잖아요~” 까르르 까르르. TV에서 20대 여배우, 여자 아이돌 멤버, MC 셋이서 서로 마주 보고 눈을 3자로 그리며 웃는다. 배시시, 매일 아침 딱 요렇게 체중계에 오르는 나도 웃음이 난다.
어라, 좀 즐겁네? 재미난 일도 아닌 흔한 일상인데 이게 뭐라고 왜 웃음이 나지?
공감이 가니까. 공감만 해도 이 평범한 얘기가 이렇게 즐겁다. 내가 이런 단순한 공감에도 잘 웃는 사람인데! 요즘은 이런 내가 세상 우울한 사람이다. 명랑한 기운을 도둑맞은 히키코모리다. 일단 도둑은 바로 사회적 거리두기. 아마 나뿐 아니라 코로나19 시국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웃음이 줄고 코로나 블루에 시달리고 있겠지. 한국인이 얼마나 어깨춤을 잘 추고 명랑한 흥의 민족인데! 우리가 집에 있는 사이 명랑은 집을 나갔다.
사람이 쓸모 있는 짓만 하며 가성비 있게 살면 명랑함이 떨어진다. 멍 때리며 시간을 무용하게 보내고 쓸데없는 데 돈도 써야 일로 쌓인 독이 풀리고 밝아지는 법인데 재택근무로 밖에 안 나가고 친구끼리 모일 수가 없으니 원. 정말 먹고사는 데 필수적인 활동과 당분간 참아도 되는 잉여 활동이 확연히 나눠졌다. 참을 수 있는 잉여 소비의 대표가 바로 예술소비가 아닐까 한다. 예술이 밥 안 먹여주니까. 페스티벌 안 간다고 영화, 공연 안 본다고 죽는 거 아니니까. 덕분에 이 분야 지인들이 올해 1순위로 백수가 되었다. 그런데, 전시와 공연 보기를 즐기는 소비자인 나 역시 정서가 곤궁해져 우울하다. 랜선 콘서트? 방구석 1열? 미안하지만 단어만 들어도 지겹다. 모든 무대는 콘택트지 무슨 언택트야, 어거지!
쓸모 있는 짓만 하다 보니 기쁨이 사라지는 건 필연이다. 달고나커피니 와플이니 다 만들어 봤지만 명랑지수는 올라오지 않았다. 본디 집순이가 막상 강제로 집에 있게 되자 슬럼프에 빠졌다. 한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대로 집에서 혼자 DKNY, 독거노인으로 지내면 팬데믹이 지나가도 명랑하기는 쉽지 않을 거 같다. 의식주에 꼭 필요한 것에만 에너지와 돈을 쓰며 살다가 고독사 하는 삶? 아 최악이야.
어떻게 하면 명랑을 유지할 수 있을까?
마음이 슬럼프에 빠지니 가장 먼저 스포츠 선수의 슬럼프 극복법이 떠올랐다. 특히 멘털 게임(mental game)이라고 부르는 야구 선수들은 특별한 걸 찾기보다 자신이 가장 잘했을 때의 영상을 다시 보며 컨디션을 끌어올린다. 스포츠에선 예쁜 폼이 예쁜 성적의 시작이다 보니 폼 찾기가 1번인 것이다. 비슷하다. 가장 명랑할 때의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되새겨본다. 나는 눈 뜰 때부터 잠들기 전까지 음악을 듣는 사람이라 스트리밍뮤직 앱과 유튜브의 폴더 리스트를 꽤 공들여 관리하는 편이다. 어쩌면 청소년기 방송반 시절부터 생긴 버릇일 수도 있고 집착일 수도 있다. 이 리스트가 나의 기분 업 루틴이자 우울한 증세를 다스리는 약장인 셈이다.
일단 이 약장의 ‘always, 씐난다, 꿀보컬언니들’ 폴더를 열어 집이 떠나가라 크게 음악을 듣는다. 지금 사는 집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이렇게 해도 층간소음 안 해도 되는 단독주택이라는 점이다. 거대 바선생에 깜짝 놀랄 때도 있지만 장점이 단점들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맑은 일요일 아침, 창문을 다 열고 환기시키며 좋아하는 음악을 순서대로 듣고 있으면 어느 이웃이 영화 <라라랜드> ost나 아이유의 <love poem>을 서툰 솜씨로 피아노로 연주할 때도 있다. 그러면 나도 그런 취향의 청취자가 좋아할 만한 선곡으로 바꿔 듣기도 한다. 네, 이 구역 방구석 DJ입니다. 이러고도 집 나간 명랑이 아직 안 돌아왔다? 그러면 온갖 카드와 쇼핑몰의 쿠폰을 다운로드한 뒤 지금 문턱에 온 계절 준비용 쇼핑에 나선다. 쇼핑 테라피, 돈질만큼 효과가 즉각적인 건 없으니까. 어느 병원보다 용한 병원, 백화점도 간다. 쇼핑백 로고만 봐도 왠지 증상이 낫기 시작하는 기분이다 후후.
우리가 노력 없이도 명랑했을 때는 언제였을까? 청순한 활력이 넘치는 20대도 떠오르지만 최고는 어린 시절 아닐까? 어린이처럼 놀면 기분이 좋아진다. 어릴 땐 일단 친구를 별명으로 부른다. 몸을 쓰며 논다. 가끔은 단짝들끼리 옷을 맞춰 입고 논다. 그리고 유난히 의성어나 의태어를 많이 썼던 것 같다. 동글동글, 몰캉몰캉, 빠지직, 뿌지직, 뿌웅~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완화되고는 친구들과 다 같이 후드티 차림에 자전거 끌고 한강공원에서 만났다. 우리는 한갓진 구석에서 음악을 틀어놓고 맥주를 마시며 덩실덩실 춤추고 성대모사를 하며 놀았다. 난 언젠가 80년대 방화에서 보았던 “그러는 언니는 왜 밤마다 이태원에 나가는 거지?” 배우 조용원의 대사를 따라 하고 친구는 인도인 상사의 영어를 따라 한다. "아렙마끼인더까~가 뭐게? I left my key in the car." 그날 찍은 사진은 아무도 인스타그램에 올리지 않고 단톡방에서 우리끼리 ‘누가누가 추한가’ 못볼꼴 대결용으로만 썼다. 얼마 전 올해만 두 번 퇴사한 옛 직장동료을 만났을 때는 내내 ‘네네요정’이라고 불렀다. ‘네네요정’은 똑똑하고 성실하고 겸손한 그녀가 워낙 착해서 막 외근을 나가야 하는 타이밍에 온 전화를 끊지는 못하고 마음이 급해 ‘네네네네네네네’ 7번 연속으로 답하는 걸 보고 내가 지어준 별명이었다. 1주일에 곱창 세 번 먹는 친구는 곱린이, 우아한 취미가 많은 백수 친구는 비단잉어, 여자 셋 모임은 우아미 자매라는 둥 유치하게 별명을 지어 부르며 논다.
별명을 부르면 신난다는 건 요즘 TV에서 <놀면 뭐하니>의 환불원정대를 보면 알 수 있다. 유산슬로 시작해 유두래곤을 거쳐 지미 유가 된 유재석 씨는 이미 흠뻑 빠져 즐기고 있고, 나이 때문에 주눅이 들어 자신이 무대에 서면 후배들에게 미안할 거 같아 참았다는 엄정화 언니는 만옥이라는 부캐에 빠져 전과 같이 섹시발랄한 매력을 뽐낸다. 어느새 어쿠스틱 라이프의 아이콘이 된 제주도 민박집 주인 이효리도 천옥이 되어 블링블링한 그 스타성을 다시 과시하고 있다. 부캐로 놀기. 부캐라는 가면을 쓰면 용기가 생기고 뭐랄까 좀 더 자유롭게 그리고 콘셉트가 있으니까 더 엣지있게 논달까? 셀럽들의 인터뷰 화보 촬영을 하다보면 늘 이런 장면을 목격했다. 메이크업과 의상 콘셉트의 변화에 따라 카메라 렌즈 앞에서 확확 표정 연기가 달라지는 인터뷰이들. 그래서 정말 잘 찍고 싶은 콘셉트의 착장과 장면은 후반으로 배치한다. 우리도 꼭 같다. 매일매일 일상 화보를 찍는 셀럽이라고 생각하고 같은 옷도 다르게 입어보고 다른 장소에 가보다보면 표정과 몸이 풀린다. 비록 올해는 축소되었지만, 많은 20대들이 핼러윈 데이 분장에 그렇게 목숨 거는 건 이런 이유일 것이다. 1년 동안 착한 사람으로 살다가 이날 하루의 한풀이를 위해 소품을 쟁이고 긴 시간 설레어하는 헤어 디자이너를 본 일이 있다. 그렇게 나의 부캐를 만들어보는 거다. 삶의 다양성은 이런 장난 같은 작은 시도로 생겨난다.
그 밖에도 내가 명랑을 찾고 싶을 때 하는 것들은 사놓고 택도 안 뗀 새 물건 뜯어 쓰기, 이유 없이 개멋내기, 좋아하는 펜으로 아무거나 낙서하기가 있다. 앞의 것들과 맥락은 다 비슷하다.
유머까지 더하면 금상첨화다. 직장에서 인생의 해병대 캠프 같은 시기가 3개월이 있었는데 그때의 나는 <다이하드> 시리즈의 존 맥클레인 형사, 브루스 윌리스 같았다. 죽을 것 같은 순간에 농담을 던지는 모양새가 꼭 그랬다. 모두가 책임감만 강조했고 나에게 농담을 던져줄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힘들 때 웃는 사람이 일류라고 했나. 그 자조적인 농담을 징검다리 삼아 개고생길을 건너갔다. 아무리 최악의 순간에도 나 자신이 있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그리고 무용한 짓이 꼭 필요하다. 내 반려견, 반려묘가 돈을 벌어다주지는 않지만 내 삶을 구원하는 하나의 존재가 되듯, 시트콤 <프렌즈>의 반백수 배우 조이가 친구들에게 늘 신세지는 것 같지만 모두의 힐링을 책임지는 친구이듯 가장 무용해 보이는 시간, 무쓸모의 존재가 우리의 가장 쓸모 있는 것들을 가능하게 해 준다.
뭘 하지 않아도 그날이 끝나기 전에 우울한 기운을 벗을 수 있었던 시절. 친구들과 술집에 가면 들어갈 땐 멀쩡하게 들어가 나올 땐 토하고 나오던 시절의 명랑. “인생의 전성기는 외박이 잦을 때지!”라며 호기롭게 놀던 시절이 떠오른다. 지금은 그 말이 다 맞지도 않고 행복의 다른 카테고리도 생겼다. 놀기에 늙은 나이란 없다. 아직은 그리워하기에 이른 나이. 이렇게 계속 인생에 높낮이를 주며 명랑한 리듬을 만들며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