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절만 권하는 세상에 그게 어려운 사람에게
"야, 손절해 손절."
오래된 친구가 자꾸 선을 넘고 이기적으로 행동해서 상처 받을 때. 요즘은 인연을 끊으라는, 손절하라는 조언이 더 많은 것 같다. 숙크러시 김숙 씨가 인구가 60억인데 굳이 왜 안 맞는 사람을 만나냐고, 좋은 사람과 내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기에도 인생은 짧다고 절연을 권하는 강연도 보았다. 맞지, 다 맞는 말이고 백번 옳다. 그런데 행동으로 못 옮기는 나 같은 사람은? 저 고민만으로 몇 년을 끈 관계도 있다. 해보려 했지만 손절이 잘 안 되는 미련 많은 애매한 사람, 그게 바로 나다.
실은 이렇게 애매한 사람이 많지 않을까? 손절을 해도 스트레스받을 거면 그것도 답은 아니잖아. 다른 방법은 없을까? 한 때 유행하던 오프라 윈프리의 성공학 10계명 중 '당신에 버금가는 혹은 당신보다 나은 사람들로 주위를 채워라'라는 문장이 있었다. 이 또한 미국식 실용주의라고 할지. 친분을 쌓기 위해 다가오는 사람이 무수히 많을 윈프리라면 자기만의 인맥관리법이 필요할 테니 분명 가치 있는 기준일 텐데... 머리로는 아는데 따르기엔 어렵다. 그러다 자연스레 생각지도 않은 대응법이 찾아졌다.
반손절. 반만 손절하는 거다. 신묘한 발상은 아니다. 하지만 인연을 끊는 손절보다는 마음이 편하면서 만나서 받는 상처가 주는 건 확실하다. 일단, 시간을 두고 당분간 내 삶에 집중한다. 오래된 친구일수록 둘 다 처음 친구가 된 때로부터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되어 왔을 수 있다. 마찬가지 이유로 지금의 나는 친구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미래의 나는 친구를 이해할 수도 있고, 친구 역시 미래에 다른 사람이 되어있을 수 있으니까.
만남 약속을 잡게 되면 1대 1로는 만나지 않는다. 단체톡으로 약속을 잡아서 여럿이 만나는 것. 완충제 역할을 할 다른 친구를 둔달까. 만나서도 정치나 시사, 패션과 예술 등 의견이 갈릴 수 있는 주제는 피하고 드라마나 예능 프로, 화장품이나 생활용품 추천 같이 가벼운 이야기로 대화의 무게를 던다. 둘이 함께 아는 제삼자에 대한 이야기도 피한다. 굳이 그런 이야기 필요 없다는 거 경험상 잘 아니까. 그리고 만나는 시간대를 저녁 술 모임보다는 주말 브런치로 잡으면 자연스럽게 경량패딩 같은 만남이 가능해진다. 따스한 햇살 아래 맛있는 음식을 가운데 두고 이야기를 나누면 남 욕이나 상사 욕, 회사 욕은 생각이 안 난다. 그렇게 식사도 대화도 한결 산뜻해지는 걸 몇 번이나 느꼈다.
인생에는 내일이면 돌아오지 않을 흥을 불태우며 청춘을 낭비하는 밤도 필요하다. 하지만 마음에 자꾸 생채기가 남는 사람과는 덩치 큰 이야기, 무거운 이야기가 안 어울리는 브런치나 티타임이 나았다. 이렇게 하고도 자꾸 감정이 엇나가면 그때 가서 손절해도 늦지 않다. 최소한 노력했다는 마음은 남으니까.
몇 년 전부터 전에 없던 유당불내증이 생겼다. 1000ml 우유도 금세 마시던 몸이 어느 순간 카페라테에 든 우유만으로도 화장실로 직행하기 시작했다. 이래서 세상에는 ‘절대’는 절대 없는 거라고 했나.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몸만 소화력이 떨어지는 게 아니다. 마음도 소화가 잘 안 된다. 마음의 운동량이 줄고, 소화력, 면역력이 약해진다. 결국 만나는 모든 이들과 계속 친하기 힘든 때가 온다. 나를 위해 취해야 할 관계, 버려야 할 관계의 구별이 필요해진 것이다. 하지만 아예 밀쳐두지 말고 우리 모두가 완벽한 존재는 아니라는 걸 떠올렸으면. 가끔 편협한 내 마음이 스스로 상처를 만들기도 한다는 건 기억했으면 좋겠다.
인간을 생각하면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작품이 떠오른다. 자코메티는 소조도 아니고 조각도 아닌 중간 선상의 독특한 방식으로 인간을 빚는다. 찰흙 소조 방식을 띄면서도 살떼임 기법을 활용해서 소조와도 조각과도 달리, 예술가의 손길이 어떻게 닿았는지 더 적나라하게 느끼게 한다. 루브르 미술관에 갔다가 너무나 한심하게 느껴져 뛰쳐나왔다는 그에게 아름다움이란 '살아있는 생명력'이었다. 그의 작품을 접하고 가슴에 쿵하고 다가온 사실은 단 하나였다. '인간의 약함, 추함, 쇠락까지 아름다움으로 바라보았구나'.
그의 작품에는 두 명이 있다. 순수한 눈빛에 반해 애정을 준 술집 여인 까롤린. 무조건적으로 돈을 퍼주고 탕진해서 자코메티의 돈을 가져가려 왔을 때에도 그저 다 가져가라 했던 그의 뮤즈였다. 전쟁 후 술에 빠져 폐인이 되자 자코메티가 모델료로 도움을 준 사진가 엘리 로타르. 삶의 고독과 결핍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그의 마지막 작품 로타르 상의 주인공이었다.
자코메티는 일찍부터 거장이었다. 피카소가 유일하게 질투했던 예술가가 그다. 살아서 부와 명예를 누린 자코메티에겐 역설적으로 부귀영화가 중요하지 않았다. 죽기 직전까지 7평 낡은 작업실에서 작업을 하고도 마지막 순간 "죽음이 나를 맞이하려고 준비하고 있어. 내가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서 고생했는지 모르겠어."라고 한 완벽주의 예술가의 작품에서 나는 이상한 각성을 했다.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의 우리의 멍청함, 실수, 추함, 오만 모두 우리가 살아있는 존재라서 가능한 것들이구나. 밝음, 선함, 영리함 만이 아니라 실패 또한 인간다움이며 우리를 아름답게 하는구나. 그러므로 계속 걸어가는 것, 그 자체가 아름다운 거구나. 부끄럽지만 눈물이 흘렀다.
더러움이 묻었다고 모든 옷을 버릴 수는 없다. 빨아서 햇볕에 말리고 툭툭 턴 뒤 다림질해 그 옷을 입는다. 누군가가 실패하고 초라해져서 또는 성공하고 으스대서 연을 끊는다? 사실 그것 또한 인간다운 것 아닐까? '나도 언젠가는 실패할 수 있고, 잘 나갈 때 거들먹거리지 않으면 또 언제 해보겠어?' 하고 조금 관대하게 보면 어떨까? 과도하게 과시적인 사람이 알고보면 결핍 때문에 그랬던 걸 알게 된다. 가끔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좋아지는 일도 경험한다. 그때는 나와 안 맞는 친구였는데 지금은 가장 소중한 친구가 되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나도 성숙하고 상대도 성숙해졌기 때문이다.
나는 불편한 마음이 생긴 사람과 빠르게 손절하고 싶진 않다. 세상이 패배자라고 무시하고 피하는 존재에서 순수한 생명력과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고귀한 예술혼으로 묘사한 자코메티의 시선을 떠올린다. 자코메티의 실존주의까지 말하는 게 너무 거창하다면 그저 내 마음에 빨래할 시간을 준다는 이야기가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