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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살롱 Oct 15. 2019

상처 날 걸 알고도 뭘 해보려는 마음

‘부딪혀 보자’가 아니라 ‘부딪쳐 보자’가 필요한 때

“자신이 변화를 시도하지 않으면 사람은 어디에도 갈 수도 없어요. 위로도 갈 수 없고 아래로도 갈 수 없어요.”


유희열 씨가, 어느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나이가 좀 있는 참가자에게 했던 조언이다. 이 얼마나 상냥한 매운 말인가! 내게는 뼈를 때리는 돌직구였고 지난 주말에 만난, 입 퇴사를 매달 반복하지만 계속 미루는 선배와 1년 사이 회사를 관두고 성공적인 전업작가의 길을 걷고 있는 선배가 증명한 말이었다.



가끔 '생계'를 생략한 주제넘은 조언을 하는 나


'생계'라는 단어보다 무거운 단어가 있을까? 지금이야 커리어 브레이크니, 갭 이어니 하는 개념이 생겼다지만 일을 그만둔다는 건 상상조차 못 했던 우리 아버지 세대에게 그 말은 어느 정도의 무게였을까? 어차피 끝이 보이는 회사라며 혹시나 하는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존버'하는 선배에게 아무리 "자기 꺼를 일단 시작하면 너무 잘할 사람인데 선배만 몰라."라고 포텐 터뜨리라고 부추겨봤자인 건 그 무거운 '생계' 때문일 것이다. 난 별다른 사건이 없이 늘 비슷한 모양새로 살고 있다고 푸념하면 그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도 다행이야. 유지만 해도 큰 거야."라는 수세적인 위로를 건넨다. 그러면 나는 또 '아 그럴 수도 있구나?!' 한다.

내가 이렇게 주제넘고 공감능력 떨어지는 조언을 한다. 최근엔 서른넷에 다니던 회사를 관두고 미국으로 간 지 3년 만에 영주권을 취득하고 온 동생에게였다. 이 정도로 단기간에 영주권을 취득한 친구가 없었기에 역시 능력자라고 칭찬하며 앞으로 뭘 하고 싶냐고 물었다(이 친구는 어릴 때부터 봐온 지라 37살이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뭐랄까 둘 사이에선 내가 어른 모드가 된다). 시원찮은 대답에 나도 모르게 "현실의 네가 꿈꾸는 너를 방해하고 있네."라고 말해버렸다. 아뿔싸. 남의 나라에서 신분 없는 외국인노동자로 사는 게 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언니는 얼마나 말도 못 하게 비참한 시간이 있었는지 몰라요. 한 달 동안 라면만 먹은 적도 있고, 지금 내 통장엔 250불이 전부예요. 그런 말이 진짜 지금은 와 닿지 않아요. 꿈이요? 꿈은 한량이요. 꿈을 선택한 적이 없어요. 늘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지 중 가장 나은 걸 골랐을 뿐이에요. 언닌 마치 학비와 생활비 버느라 팍팍한 서울대 법대생에게 '너는 이담에 훌륭한 판검사가 될 거'라고 말하는 친척 같아요." 라며 끝내 곱창전골을 앞에 두고 운 동생. 어쩔 줄을 몰라하며 "미안해. 언니가 잘 몰라서 그랬어. 아무것도 안 되어도 괜찮아. 그냥 돌아와도 아무것도 묻지 않을게."라며 전골냄비 이쪽 편에서 운 나.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이삼일은 이때 일이 미안해서 혼자서도 내내 눈물을 흘렸다.



잡것을 시킨 잡놈 덕에 얻는 굿 잡


그러나 반전. 그녀는 돌아간 지 3주 만에 원래 계획 중이던 회계사 시험 준비 첫 단계로 적합한 전통 있는 중견 회계법인에 취직했다. 미국서 산 적이 있는 남자친구는 "그런 캐릭터면 분명 성공해. 어느 날 아무 일 없던 듯 '저 취직했어요' 할 거야." 하더니 정말 그 말처럼 되었다. "역시 너는 너의 포텐을 몰라."라고 그것 보란 식으로 톡을 보냈다.

다들 자신의 포텐을 모른다. 내가 잘되리라 예측한 이유는 그녀가 똑똑하고 영어 잘하고 일을 잘해서가 아니었다. 흔히 이대 나온 '먹물 든 커리어우먼'에겐 없는 것이 그녀에겐 있다. 바로 '몸으로 부딪치는 무대뽀 정신'. 대학 때도 쉽게 돈 버는 과외보다는 몸 쓰는 알바를 선호했고, 투고를 맞고 한 학기 더 다니더니 졸업 때는 에버랜드 퍼레이드로 지원하네 어쩌네 하던 녀석이다. 그러다 막상 취업은 외국계 금융사에 들어갔지만. 이번에도 첫 회사에서 영주권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 같자 여기저기에 지원해 영주권 취득을 약속한 회사를 찾아 LA에서 마이애미까지 건너갔다. 1년 반 뒤엔 기어이 트럼프의 반이민정책의 시대에 속성으로 그걸 뚫은 녀석이니까. 그리고 영주권이라는 게 따고 나면 별 거 아니라는데 어쨌든 자유를 더 확보할 수 있는 건 사실이었다.

1년 반 동안 회사에서 돈 아끼려고 온갖 회계 업무를 다 시킨 한국인 사장 덕에 단기간에 어느 회사 회계팀보다 할 줄 아는 게 많아진 동생. 들어보니 위법은 아니지만 편법은 무지하게 쓴 눈치였다. 그래서 다시는 그렇게 위험하게 세금 관련 업무를 하고 싶지 않다고.

재밌는 것은 그녀는 온갖 잡것을 시킨 잡놈 덕분에 새로운 좋은 잡을 얻었다는 것이다. "너어무 좋아요. 한국서는 상무 정도 돼야 생기는 My Own Room이 생겼어요. 전 우주가 다 도와준 기분이에요. ㅋㅋ"    바보야, 우주가 도와준 게 아니라 네가 널 도운 거야.



구원은 셀프, 그러니 부딪쳐보자는 마음


구. 원. 은. 셀. 프.


정말 좋아하는 말이다. 드라마처럼 막대한 유산을 남긴 친척이 나타나고 평범한 남자친구가 알고 보니 재벌 3세고 그런 이야기를 기대하기에는 음... 마흔인 걸. 그보다는 두둑해진 통장 잔고가, 낮아진 체지방률 인바디 지수가 더 든든한 걸. 가진 것으로 최선을 다하는 자세 없이는 어떠한 발전도 없다는 걸 이제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사이 잊은 것이 하나 있다. '부딪쳐보자는 마음'.

뭐든지 다 하고 싶고 해야 하고 하려 했던 열정의 시기가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게 도전인 줄도 몰랐는데 도전하고 있었다. 그게 공부인지도 모르고 공부하고 있었고, 자기계발서라곤 한 권도 산 적이 없는데 실은 늘 자기계발 하고 있었다. 패션지 에디터라는 직업은 특히나 더 그랬다. 만나느니 스승, 듣느니 수업이니. 매달 각 분야의 전문가를 인터뷰하며 듣고 정리하며 기사를 쓰는 것 자체가 공부였다는 걸 다른 업계로 이직한 뒤에야 깨달았다. 베테랑 선배들이 다 떠나 갑자기 큰 기획기사를 도맡게 되었을 때나 녹록지 않은 연예인 스태프를 아우르며 해외 화보 촬영을 무사히 마치고 책으로 나왔을 때, 그런 때가 도전하고 성장하는 순간이었음을 뒤늦게 알았다. 게다가 그리 어린 나이에 자신의 이름을 단 결과물을 오롯이 확인할 수 있는 프로젝트가, 대부분의 회사원에겐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몰랐다. 무엇보다 가장 좋은 것은 그게 공부인지도 모르고 즐거워서 했다는 것이다.

그랬던 내가 이건 이래서 안되고 저건 저래서 안되고, 줄곧 걸러내고 주저하는 스스로를 본다. 마음을 먹지 않아도 부딪치는 게 되던 때가 있었는데, 부딪친다? '그거 뭐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지' 할 태세다. 지금 하는 게 도전인지도 모르고 마음을 따라가면 그게 용기이던 때. 지금은 그 능동적인 불나방이 잘 되지 않는다. 도전하면 얻을 때도 있지만 잃을 때도 있고 상처가 남는다는 것도 알기에. 그때는 금방 새살이 돋았지만 이제는 상처가 아무는 데 시간도 배로 더 걸린다. 이 모든 걸 아니 기꺼이 상처 나보자고 맘먹는 게 쉽지 않다. 아는 게 병, 경험은 겁이 되었다.

그러나 상처 날 걸 알고도 새롭게 뭘 해보려 하지 않으면 어제의 나만치도 못된다. 남이 아니라 어제의 나와 비교하라는 뻔한 말, 뻔한 진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세다. 


파울로 코엘료는 작가인 자신을 전면으로 내세운 소설 <알레프>에서 이렇게 말한다.

"고통을 피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가능합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배우지 못할 겁니다.


자기만의 방식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부정당하고 새롭게 도전하는 사람과 아닌 사람의 결과를, 쉽게는 매주 <백종원의 골목식당> 사장님들에게서 본다.  기꺼이 상처투성이, 너덜너덜해져도 감당하겠다고 ‘부딪쳐보자’고 다짐하는 순간. 그 ‘순간’이 인생을 다시금 빛나게 함을 목격한다.

 

나님이여, 다시 덤비게 해 주소서. 

중년이라는 말이 아직은 어색한 마흔의 나는 이렇게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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