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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살롱 Oct 21. 2020

일하는 나, 노는 나, 배우는 나

아이 대신 나를 키우는 여자들

"아주 나홀로 문센 주부네."

집들이에 놀러 온, 여자 둘이 잘 살고 있는 선배는 내가 도시텃밭에서 키운 딜을 넣어 담근 피클, 샘킴의 이탈리아 요리책을 보고 따라한 요리, 집에서 만든 DIY향초가 놓인 테이블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뭘 배우러 다니는 것도 좋아하고 스트레스가 쌓이면 손을 바삐 놀리는 단순노동으로 푸는 성격이다 보니, 나홀로 문센 주부라~ 말 된다. 남편만 없지 문화센터 열혈수강생 주부만치 솜씨가 좋다는 감사한 한 줄 평인 셈이다.

 

뭐 해먹고 살지?

나를 포함한 주변의 여자들은 항상 뭔가를 배우고 있다. 다들 시간활용 강박인가, 잠시도 잉여시간을 참지 못하고 바지런히 뭘 배운다. 그림책 일러스트, 한식 요리에 이어 캘리그래피를 배우고 있는 후배에게 물어봤다. 왜 배워? "재미있으니까. 그리고 나중에 써먹으려고." 이번엔 레슨이라는 레슨은 다 받아본 또 다른 배움 중독 환자에게 물어봤다. "뭐 먹고살지 고민이어서. 난 절대 재미를 위해서가 아냐.” 그녀는 플라워 스타일링은 숍 오픈만 남은 전문가 수준에 조주기능사 자격증을 보유 중이고 캘리그래피 수업은 수년 전에 배우고, 작년에는 도자기공방에 다녔다. 손재주를 타고났다. 몇 달 전에는 꽤 잘할 거 같다며 타일기능사 자격증까지 알아봤단다. "요즘은 왜 아무것도 안 배워?" "해볼 만한 건 다 해봤고 배운다고 내가 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더라고." "그치. 내 돈을 주고 배울 때는 아직 내 기술이 아니지, 그걸로 돈을 벌어야 내 거가 되지." 배워두고 아직 활용은 안 하고 있는 이 친구들과 달리, 따자마자 바로 써먹을 수 있을 정도로 먹고사니즘에 밀착한 자격증만 따서 이직에 활용한 똑똑한 옛 회사 동료도 있다. "자격증 컬렉팅이 취미예요."라며 반려동물관리사, 공인중개사 등 1년에 하나씩 '사사사'를 모으는, 아주 머리 좋은 친구다.

결국 재미로 배우는 사람, 배워두면 써먹지 싶어 배우는 사람, 이직이나 창업 준비로 배우는 사람. 목적은 다양하지만 우리의 공통된 동기는 ‘불안’이다.

우리는 모두 사는 게 너무 불안해서, ‘뭐 해 먹고 살지?’에서 출발했다.

 

그렇게 시작했어도 배우는 일은 나를 확장하는 일이다보니 더없이 즐겁다. 불안이라는 성장 동력. 불안은 우리를 성장시키는 출발점, 내 삶의 노가 되어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시작이다. 봉준호 감독은 영화를 만드는 일을 가진 모든 이가 ‘내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확신할 수 없는 때’ 같은 궁극적 공포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모든 샷을 직접 그리는데  스토리보드를 그릴 때마다 불안이 가라앉는다고 한다. 아마 실체 없는 공포와 불안을 구체적인 창작으로 치환하며 안정감을 얻었을 것이다. 뜻밖에도 불안의 방향을 틀면 힘이 생긴다. 그래서 불안을 내 편으로 만드는 배움이 중요하다.

 

매일 세 명의 나, 균형 맞추기

나에겐 생활수칙이 하나 있는데 바로 ‘일하는 나, 노는 나, 배우는 나’의 밸런스를 지키는 것이다. 하루 또는 일주일 중 이 세 가지를 균형감 있게 배분하는 걸 늘 염두에 두고 있다.

시초는 몇 년 전 IT제품 광고 카피였던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라는 문구였다. '그래, 이 세가지지, 이렇게만 살아가도 충분히 행복하지.'라며 착안했다. 특히 '배우며'가 맘에 들었다. 때마침 30대였고 30대 미혼이란 아이 대신 자신을 키우는 사람들이다. 일도 손에 익어 어느 정도 정신적,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서부터 뭔가를 배우기 시작한 것 같다. 주중에 열심히 일해 번 돈을 주말엔 즐겁게 쓰고자 했고, 배움에 투자해 미래에 징검다리를 놓고 싶었다. 그때쯤 들인 이 밸런스가 지금도 유효하다. 프리랜서인 지금은 생활이 더 느슨해지기 쉽기에 주로 하루를 이렇게 3가지 용도로 적절히 배분해 쓰는 걸 이상으로 삼는다.

하지만 요새 이 밸런스가 아주 엉망이 되어버렸다. 집에 있는 걸 아무리 좋아해도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강제로 집에 있어야 하다 보니 슬럼프라 말하기도 부끄러운 초절정 게으름뱅이가 되었다. 평소라면 낮에 일했으면 저녁에는 TV 예능프로, 넷플릭스를 보고, 이동하는 시간이나 집안일을 할 때는 잠깐씩 여행이나 스포츠 유튜브 영상을 본다. 그런데 요즘은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 폰을 쥐고 유튜브를 봤다. 매주 폰 평균 이용 시간 신기록을 찍고 있다. 욕실에도 폰을 들고 들어간 지는 오래됐다.


스스로가 한심해 견딜 수 없어 하다가 문득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냐, 공부를 하는 시간이 엄청 길어진 거네. 왜냐하면 요즘은 요동치는 국제정세와 경제를 놓치면 안 될 때라 시사나 경제 영상을 켜놓고 해외 상황, 환율, 금리, 주식 같은 생짜로 모르는 세계를 계속 파고드는 중이니까. 저성장 저금리 시대에 경제 공부는 필수 아니겠어?’라고.

그러나, 이소룡은 '젊어서 고수가 돼라'라고 말했다. 젊을 때는 배움도 빠르고 그 배움으로 클래스에 오르는 과정도 빠르고 몸이 쉽사리 잊지 않는다는 의미로 한 말 같은데 그 말이 절절이 와 닿는다. 뭔가를 공부하다 보면 어느새 딴생각이 파고들어 다른 영상을 찾는 내가 있다. 시험 같은 걸 볼 때도 마찬가지다. 문제를 풀다 보면 정답을 골랐다가 다시 오답으로 고치거나 대충 고르는 내가 있고 배우는 데 투자하려다 보면 돈 걱정을 하는 내가 있다. 내가 나를 방해한다. 나이 든다는 건 이런 내가 커지는 건가. 어설프게 아니까 길을 우직하게 가지 못하고 질러가고 싶은 마음이 치고 나온다.  

 

그냥 해보고 싶었던 내가 진짜 나

하지만 배우는 게 진짜 행복하려면 여기서도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관대해야 한다. 배움에 있어 자책이나 스트레스는 금물이다.

중국어, 수영, 기타, 한국어 교사. 이상은 내가 배우다 만 것들이다.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누군가의 "그거 그래서 땄어?"라는 질문에 답을 못하는 중도포기 종목들. 하지만 우리 자신을 말해주는 메시지는 이런 것들에 있는 게 아닐까? 생계에 꼭 필요하지도 않은데 그냥 배우고 싶어서 배웠고, 신나게 시작했지만 ‘쯩’ 같은 걸로 남기지 않은 것들. 누가 보지 않아도 성장하려고 노력한 순간,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도 열심히 걸어본 기억이 누구나 있다. 그냥 해보려고.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 스쳐가는 관심사를 소중히 끌어올려 뭔가 시도해본 경험들은 삶을 다채롭게 만든다.


스티브 잡스 말마따나 이렇게 찍어 놓은 점들이 훗날 선을 이루고 면이 되어 입체가 될 수도 있다. 또 그게 뭘 이루지 않으면 뭐 어떤가. <게으름을 위한 찬양>을 쓴 철학자 버틀런드 러셀은 자고로 지식인은 무용한 지식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 했다. 써먹지도 못할 기술을 익힌 지식인 놀이, 놀이가 즐거웠으면 그 기능을 다 한 거지. 그럼에도 뭔가를 배운 나는 엄연히 그 이전의 나와는 다른 나인걸. 적어도 나를 그 이전의 사람으로는 남지 않게 해 주니까.

그래서 돈 버는 나, 돈 쓰는 나, 공부하는 나 즉, 일하는 나, 노는 나, 배우는 나 셋은 오늘도 사이좋게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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