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밤 괴한 침입으로 배운 것
6년 전 10월 어느 토요일 새벽 3시,
마포경찰서 성폭력피해자전담조사팀 상담실 안
40대가량 되어 보이는 여경이 조심스레 묻는다.
"그 사람이 폭행을 가했나요?" "가하려고 했어요."
이 와중에도 정확한 어휘를 고르려는 나.
말 그대로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순간이었다.
대학 1학년 때부터 시작된 혼자살이의 다채로운 경험 중 정점을 찍는 순간이기도 했다.
일단 사건에 놀랐고 이 새벽, 경찰서에 이런 이름의 팀이 수사하는 사건 안에 내가 놓여있는 상황이 그저 비현실적이었다.
친구와 집에서 맥주에 야식을 먹고 있었다. 자정이었나, 맥주가 떨어져 친구는 편의점에 간다고 나갔고, 곧 현관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당연히 친구겠거니 하고 확인도 안 하고 문을 열었다. 문 앞엔 키 크고 안경 쓴 회사원 같은 낯선 남자가 있었다. 이 남자는 양손으로 내 어깨를 꽉 잡았다.
"아악~~~~~~~~~~~~~~"
'사람 살려', '강도야' 이렇게 문장으로 된 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외마디 악 소리만 지를 뿐이었다. 다행히 그 사람은 황급히 계단을 내려가 도망쳤다. 눈물이 나기 시작했고, 옆집에 사는 부부 중 남편 분이 나오셨다. 18분쯤 지났을까 마포경찰서 형사라면서 두세 명의 아저씨들이 왔다. 옆집에서 신고를 한 것이다.
그 길로 마포경찰서를 가서 상황에 대해 기억나는 대로 답했다. "분명히 현관으로 들어왔나요?" "네." "몸에 손을 댔나요?" "네." "그럼 이건 심각한 범죄예요." 충격을 받으면 당장은 침착해지는 맏이 성격의 나는 스스로 생각해도 놀랍도록 차분히 진술을 마쳤다. 소식을 듣고 경찰서로 온 친구가 나를 다시 집으로 데려간 건 새벽 4시였다.
"요즘은 CCTV로 10명 중 7, 8명은 잡아요."
다음날 전화를 한 국선 변호사의 말이었다. 애석하게도 그 범죄자는 CCTV가 못 잡는 2, 3명 중 하나였지만.
"1층 유리문에 찍힌 지문으로 나온 사람 사진을 보낼 테니까 잘 보세요, 그 사람이 맞나."
며칠 뒤 형사가 문자메시지로 사진을 하나 보냈다.
"네. 맞아요." 맞긴 뭘 맞아? 간신히 제정신인 척했지만 정신줄을 놓았던 거다. 사진의 남자는 경찰서에 신고해준 옆집 젊은 아빠였다. 아무것도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렇게 그 가택침입, 성폭행미수범은 끝까지 찾지 못한 채 나는 그 좋아했던 동네를 떠났다.
이 집은 홍대권이라고 할 수 있는 동네로 부동산 시세에 크게 관심이 없는 미국 교포 집주인 덕에 6년간 살았던 착한 전셋집이었다. 1층 현관의 도어록은 없었지만, 나의 집은 3층이었기에 그 위까지 범죄자가 올라오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보통 홍대 근처 원룸주택이나 빌라, 다세대주택의 저층에서는 이런저런 범죄 소식이 들려오곤 했다. 자전거를 한 번도 도둑맞지 않으면 홍대 주민이 아니었다. 자전거는 애교고, 창문을 통해 들어오려 한 괴한을 직접 맞닥뜨린 친구도 있었다. 내가 이사한 다음 달에는 그 동네의 어느 출판사 에디터가 매일 퇴근할 때마다 집 창문이 열려있는 등 누군가 지켜보는 낌새가 느껴져 휴가를 내고 지방 부모님 댁에 내려갔다는 소문도 들었다.
수상한 사람이 있는 것이다. 동네의 CCTV 사각지대를 잘 아는.
어쩌다 한 번씩 취재하던 여성치안범죄의 내용을 이 일로 단번에 배울 수 있었다. 그렇게 내가 내린 이 사건의 원인은
1. 한 집에 너무 오래 살아서 혼자 사는 여자의 집이라는 것이 노출되었다.
배달음식도 실컷 시켜먹고 택배도 실컷 시키고. 집 앞 공원 놀이터에서 놀 때도 꽤 있었고, 매일 저녁 운동복 차림으로 한강도 자주 나갔다. 침입 타이밍도 절묘했다. 밖에서 지켜본 것이다.
2. 오랫동안 평화롭게 살아서 방심했다.
3층이라고 특히(보통 이런 범죄자는 퇴로가 긴 집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전에도 간간이 유쾌하지 않은 일은 있었다. 아래층 남자가 자정 넘어 음악 소리가 시끄럽다며 소주 냄새 풍기며 올라온 적도 있다. 그때 내 집에서는 PC에서 블로그 배경음악으로 깔아놓은 이적 노래가 나온 게 고작이었다. "이거 거기다 기독교 노래 아니에요! 내가 그래서 머리가 아파!" 생짜로 억지를 피웠다.
3. 빌라, 다세대주택이 많은 동네는 위험하다.
원룸, 빌라, 다세대주택이 많은 동네는 1인 가구가 많다. 이사가 빈번한 1인 가구가 많은 동네에는 신분을 알 수 없는 다종다양한 사람이 들고난다. 한 마디로 뜨내기가 많은 동네는 위험하다. 원래는 단독주택가였는데 7년여 사이 동네가 뜨는 바람에 그렇게 변했다.
4. 정말 위급한 순간에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그나마 '악' 소리라도 나와서 다행이었다. 진심으로 당부한다. 이런 순간을 대비해 시뮬레이션을 해보라고. '사람 살려' '도와주세요'라고 소리 지르는 건 반드시 연습이 필요하다.
5. 현관 잠금장치, 걸쇠를 꼭 잠가야 한다.
디지털 도어록은 너무나 우습게 열린다고 한다. 오히려 아날로그적인 이 고리 하나가 문을 뜯지 않는 이상 절대로 안 열린다. 빌라 1층에 도어록이 있다고 해도 이것도 쉽게 열린단다. 외부인에게 문을 열어줄 때는 무조건 이 고리가 걸린 상태에서 확인 먼저 할 것.
알고 보니 서울에서 성범죄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곳이 강남구 다음으로 마포구였다. 대학이 많아 대학생도 많고, 시청, 광화문, 여의도 등 오피스 밀집 타운에 가깝기 때문에 직장인 1인 가구들이 선호하는 동네. 그러나 위의 교훈대로 보자면 '정체를 숨긴 위험한 이웃'과 가까이 살 확률이 높은 동네.
통계청과 여성가족부가 지난해 7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8년 일반가구는 1975만 2000가구로 이 중 1인 가구는 전체의 29.1%인 573만 9000가구에 달한다고 한다. 이중 여성 1인 가구 수는 전체 1인 가구 수의 절반 수준인 284만 3000가구(49.5%)이다. 현재 10개 집 중 1.5개 집이라는 이야기. 통계청은 혼자 사는 여성의 숫자가 매년 증가해 오는 2025년에는 혼자 사는 여성이 323만 4000명까지 늘어날 거라 한다. 그렇지만 혼자 사는 여성을 위한 사회적 치안 시스템은? 과연 늘어나는 가구 수만큼 보강되고 있을까?
이 사건을 겪은 후 내린 결론은 '아무도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였다. 언제나 개인보다 사회는 천천히 변한다.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경험만한 스승이 없다더니, 다음 집을 구할 때는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체크리스트가 이미 머릿속에 들어와 있었다. 어차피 20, 30대 1인 여성이 갖고 있는 예산이란 빤하다. 방범이 잘 되는 아파트는 선택지 안에 들어오기 힘들다. 한 출입문으로 한정된 사람만 드나드는 단독주택이 많은 동네를 찾았다. 단독주택은 관리가 불분명한 공동공간이 적기 때문에 위험한 구석 또한 적고, 서울서 아직도 단독주택이 많은 동네라면 당연히 오래 거주한 주민이 많은 동네다. 그리고, 최우선적으로 알아본 곳은 파출소 근처. 안 되면 상대적으로 CCTV가 많이 설치되어있는 초등학교 근처. 전철역도 가깝고 파출소, 초등학교 근처인 데다 오로지 대문을 나 혼자 쓰는 주택 1층이 마침 공사 중이었다. 엄마는 "차라리 이런 대로변 1층이 밤늦게까지 사람이 많이 다니고 보는 눈이 많아서 안전해."라고 했고, 창문도 아직 안 단 상태에서 얼른 전세 계약을 했다. 막상 알려고 하니 안전한 집을 위한 노력은 더 있었다.
1. CCTV 설치 렌털 하기
단독주택이라면 4, 5군데 설치를 하고 매달 4~5만 원가량 요금을 내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 안 되면 궁여지책으로 'CCTV 녹화 중' 스티커와 모형을 사다 달으라는 조언도 있었다.
2. 여성치안범죄 뉴스를 열심히 체크하기
결국 집세란 안전을 사는 비용이라는 것을 알았다. 가장 안전한 동네는 집값이 비쌌다(ex. 동부이촌동. 뉴스에서 찾은 가장 유명한 사건사고는 아파트 지하실에 들어간 길냥이 사건이었다.) 뉴스를 보면 시세가 비슷해도 여성치안범죄가 더 일어나는 동네가 있고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는 동네가 있다.
3. 파출소 전화번호를 단축번호로 저장하기
경찰 출동이 얼마나 걸리는지 실제 사건으로 배웠다. 112에 전화하는 것보다는 파출소에 전화하는 것이 빠르다.
4. 택배, 배달 앱 이용할 때 한번 더 생각하기
혼자 사는 여자의 가장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은 택배기사 아닐까? 혼자 사는지 둘이 사는지,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는지, 몇 시에 집에 있는지. 현관에 남자 신발을 두거나 택배 주문할 때 남자 이름으로 주문하는 등의 팁은 많이 알려져 있다. 배달음식도 마찬가지다. 난 아예 배달음식을 시키지 않는다.
5. 여성안심귀가서비스&생활안전지도 앱 이용하기
여성안심귀가서비스는 120에 전화하면 밤 10시~새벽 1시에 여성봉사자가 2인 1조로 집 근처까지 동행해주는 서비스이다. 안심이 앱을 깔고 신청해도 된다. 생활안전지도 앱으로는 현재 있는 지역의 치안사고 발생현황(성폭력)을 확인할 수 있다.
6. 믿을 수 있는 이웃과 친해두기
사실은 치안 앱들보다 이걸 더 믿는다. 정말 모르는 것이다. 겪기 전에는 뉴스에서나 보는 일이 나에게 일어날 줄은 몰랐다. 평상시 음료 몇 캔, 과일 몇 개라도 드리며 '여행 가서 집이 며칠 비니 전단지 떼실 때 같이 떼 달라'라고 부탁하거나 마주치면 눈인사하고 아이에게 덕담을 건네는 일. 진짜 방범 효력은 이런 데서 나온다는 걸 배웠다. 도시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누가 도와줄지 모른다.
트라우마가 컸다. 내가 뭘 잘못했길래 이런 일을 겪나 싶어서, 놓았던 정신줄이 돌아온 1주일 뒤 신촌로터리 한가운데서 대성통곡을 했다. "너무 힘들어. 하나도 안 괜찮아."라면서. 3년이 지나도록 자다가도 무슨 소리가 들리는 착각에 깨고, 창문이 열리는 꿈을 꿨다.
그 와중에도 좋은 일이 있다면 정말 나를 위해주는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남자들은 혼자 사는 여자의 공포에 공감을 못한다(밤길에 혼자 걷는 여자를 놀라게 하는 장난을 쳤다는 모 가수가 떠오른다). 신체구조부터 이것을 이해할 수가 없단다(나는 이 논리를 이해할 수 없지만). 아는 오빠에게 대강 얘기했더니 "니가 뭐가 예쁘다고 스토커가 붙냐?"라고 대꾸했다. 음... 죽일까? 했다.
이 부분도 정확히 짚고 넘어가자. 프로파일러에 따르면 “성폭력 범죄자들은 여성이 처한 상황, 즉 범행을 저지르기 쉬운 대상인지에 더 많이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피해 여성의 미적 조건이나 연령 등은 실제 성폭력범죄와 큰 연관관계가 없다”라고 한다.(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5&artid=201812101539161&pt=nv)
즉, 복불복이라는 말이다. 그놈들은 '안 잡히겠다' 싶으면 덤빈다.
반면 혼자 살아본 경험이 있는 도시 여자들은 훨씬 큰 힘이 되어주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사건 며칠 뒤 톱스타의 인터뷰가 있었다. 일을 쉬고 못하겠다고 할 처지가 아니었다. 다시 그 집으로 들어가 지낼 수는 없었고 '있을 때까지 있으라'는 선배의 집에서 지냈다. 어떤 선배는 함께 집을 보러 다녀줬고, 누군가는 좋은 정신과 의사를 추천해줬다. 적지만 남자 지인 중에도 공감해주고 위의 가짜 CCTV, 공공서비스 등을 추천해준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한 이야기가 진리였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끈다.
여성성, 모성, 두려움과 상처를 다독이는 위로. 이것이 없었으면 이렇게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 치안 위기 만렙을 찍고 나니, 은근 세상 무서울 것이 없다. 그러나 밤 11시 이후에는 편의점에 나가지 않고, 여름에도 웬만하면 창문을 닫아놓고, 집안에 있어도 택배는 '두고 가세요'라고 하고, 현관문 걸쇠는 꼭 건다. 지난주에는 가입만 하고 이용은 안 한 '배달의 민족' 회원정지 알림메일이 왔다.
그렇게 용감한 겁쟁이가 되었다. 사회가 지켜주지 못하니 내가 날 지킬 수밖에. 혼자 사는 여자에게 안전한 도시는 없단 걸 알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