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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살롱 Feb 18. 2019

싼 옷을 버린다

저렴한 옷들과 관계를 청산할 때

결국 중요한 날 입는 건 좋은 옷임을 알게 됐다. 알지만…

사실 이건 서른이 넘으면서 느끼고, 다짐했던 것이다(이걸 십 년째 숙제 내지는 쇼핑의 방향성으로 잡다니 참…). ‘결국 중요한 날 중요한 사람이랑 만날 때 집어 드는 옷은 싼 옷이 아닌 ‘좋은 옷’이다. 중요한 순간에 제 몫을 하는 것은 비싼 옷이고, 그런 경험이 쌓이면서 결국 비싼 옷은 결코 비싼 게 아닌 게 된다고 저렴한 옷들과 안녕해야 할 때’라고, 그때 이미 ‘새해 할 일’에 또박또박 적어놨다.


하지만 실천은 쉽지 않았다. 그 후로도 10년간 끊임없이 SPA 브랜드에서 옷을 사서 모은, 나는 싼 옷 부자였다. 그사이 공정무역과 착한 소비가 전 지구적 관심사로 떠오르면서 SPA 브랜드에서 제3세계 아동과 여성의 노동착취로 만들어진 옷을 외면해야 할 이유는 더욱더 늘어났다. 메이드 인 방글라데시, 터키, 베트남, 인디아 등 라벨에 적힌 원산지를 볼 때마다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샀다는 건 그 착취를 계속 장려하는 것이니까. 심지어 어떤 매장에 들어갈 때면 옷들의 무덤에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새로운 계절을 맞을 때면 자라, 유니클로를 꼬박꼬박 들렀고 계절의 말미에 세일을 하면 한번 더 들르는 모범생이었다. 요즘은 또 직구다. 블랙프라이데이, 연말 클리어런스 세일의 파격적인 할인율에는 낚이는 게 돈버는 거라며 주문했다. 사실은 안 사는 게 100% 핫딜인데. 착한 소비를 생각하는 뇌와 결제하는 손은 그렇게도 달랐다.


옷 잘 알, 한국 남자

잡지사에 있을 때다. 소개팅을 하고 온 패션팀 후배가 아침부터 열을 올리며 어제 만난 남자 얘기를 한 적 있다. “세상에, 내 가방이 지미 추인 걸 알아보는 거예요. 심지어 지난 시즌 거라는 것까지. 이게 구찌도 샤넬도 아니잖아요? 겉에 로고 하나 없잖아요? 아무리 유학 갔다 막 돌아왔다지만, 이건 좀 심하게 알지 않아요? 게다가 업계도 아니고 음악 엔지니어라는데.” 후배는 진심으로 겁먹었다. ‘패션업계 종사자도, 게이도 아닌, 지미 추 백을 알아보는 남성을 이제 서울에서 만날 수 있구나!’ 하고 나 역시 조금 놀랐다.

그즈음 홈쇼핑에서 일하던 남자 친구는 길에서 마주 오는 여자를 보고 대놓고 말하곤 했다. “저기, O마켓이 걸어오네.” 획일적인 패션 스타일을 비판하는 나름 업계인으로서의 평가이긴 했지만 저렴하고 개성 없는 옷을 무시하는 전제가 깔려있었다.


보세 옷 생활자였던 20대

“O마켓이 걸어오네.”라고 했던 그 남자 곁에서 여유롭게 ‘난 O마켓이 아니야’라고 안심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쌀지도 모르는 이태원 시장표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20대의 5년을 이대 근처에 산 덕분에 안 그래도 보세 옷 생활자였다. 집에 들어가다 티셔츠 한 장, 우울하니까 한 장, 약속시간 뜬다고 한 바퀴 돌다 한 장. 그렇게 쌓인 티셔츠들로 옷장은 무지개, 또는 패턴의 향연으로 무당 옷장 같았다. 어엿한 직장인이 되었어도 쇼핑 장소만, 당시 기자들의 쇼핑 핫 플레이스였던 이태원 시장이랑 SPA 브랜드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물론 진정 센스 있는 여자라면 명품과 그것들을 잘 섞어 입는다고 무수히 많은 케이블 패션 프로그램에서 얘기했고, 가끔은 유명인을 취재해 스타일 팁 기사 같은 걸 쓰는 게 내 일이었지만, 애석하게도 나 스스로는 그런 여자가 못 되었다. 이태원은 이태원 표일 뿐이고 자라는 자라로 보였다.


나이가 들면 싼 옷이 비싸 보이는 매직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젠 싼 옷이 어쩌다 비싼 옷으로 보이는 경우도 별로 없다. 과거엔 젊음이라는 아우라로 보완되던 부분이 슬슬 사라져 싼 옷이든 비싼 옷이든 그냥 제 값으로 보이는 것 같다. 안타깝지만 내 눈에 그렇게 보이면 남의 눈에도 그렇게 보인다. 혹시나 싶어 물어도 봤다. 그렇게 보인단다. 스트(st, 명품 '스타일' 가품)도 스트로 보인다. 패션 문외한인 나도 어딘지 모를 가짜의 어색함은 집어낼 수 있다. 소재에 있어서 '좋음'의 분별은 더 쉬운 것 같다. 캐시미어를 만지면 촉감으로 혼방과 100%의 차이가 바로 느껴지는데 남이라고 다를까.  “비싼 게 반드시 좋지는 않지만, 좋은 건 비싸긴 해.”라고 읊조리면서 만지작거린다.


경험치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평범한 직장여성이지만 옷을 쇼핑하고 입어보고 한 경험치가 쌓여 좋은 거, 보통, 별로인 거 3가지 정도는 아는 수준이 됐다. 최근엔 불필요한 요소를 다 버리는 미니멀 라이프가 유행하면서 적용해본다고 또 옷장을 뒤집었다. 알겠더라. '어라, 이거 예전에 입었을 땐 진짜 마랑 같았는데? 스트네.' ‘이옷을 살 때의 나에게는 어울렸는데 지금의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구나’

 

지미 추 가방을 알아보는 남자가 귀하던 시절에서 서울은 더 많이 변했다. 그 ‘지미추’ 남이나 ‘O마켓’ 남이 아니어도 패션에 관심 많고 아는 것도 많은 한국 남자들이다. 프레피 룩, 마린 룩 각종 룩에도 지식이 해박하고, 핫플, 힙플, 미술관에 가면 죄다 패션쇼 모델이고 인스타그램만 봐도 다들 셀렙이다. 그렇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입으면 내 기분이 좋아지고 힘이 나는 ‘좋은 옷’

누구의 시선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아껴 입을 만한 좋은 옷은 필요하다. 결국 평범한 여자일수록 제 값을 하는 좋은 옷이 필요하다. 잘 만들어진 옷 자체가 지닌 힘을 빌려야 하기 때문이다. 좋은 옷이란 뭘까? 언제 옷장에서 고르더라도 기본을 해주는 옷이 좋은 옷이다. 엄마가 손님 치르는 날, 아껴두었던 좋은 그릇을 꺼내 쓰듯이 면접날, 클라이언트와의 중요한 미팅, 경쟁 프레젠테이션 날에는 지원군처럼 힘을 빡 주는 좋은 옷을 입게 된다.

그렇게 가치 있는 날 빛을 발한 옷은 입은 횟수가 거듭될수록 카드값을 차곡차곡 고스란히 돌려주고, 더불어 인생의 중요한 하루하루를 덧입는다. 좋은 옷은 효용성, 내구성 같은 기능적 가치만 있는 게 아니라 인생의 멋진 추억을 선물해준다. 내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함께 한 동료 같은 느낌? 이건 교복을 버릴 수 없는 것과는 또 다른 애착이다.


굳이 거창하게 인생까지 갈 것도 없이 하루를 입어도 좋아하는 옷을 입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좋은 옷을 입으면 기가 산다. 마음에 썩 안 들고 불편한 옷을 입고 나가면 그날은 기운이 빠지고, 저녁 약속이고 뭐고 그냥 빨리 집에 가고 싶어 지는 경험을 누구나 해봤을 거다. 한 마디로 옷에서 힘 빨을 못 받는다(이런 날 어떤 패션 기자는 외근 중에 어디든 가서 사 갈아입는 것도 봤다). 물론 ‘싼 옷=나쁜 옷’이라는 등식은 아니다. 다만 습관적으로 세일이라서, 1+1이라서 ‘양’으로 하는 쇼핑은 지양할 때가 온 것 같다. ‘양’으로 하는 쇼핑은 자신의 스타일을 찾기 위해 여러 가지를 시도하는 20대 때의 선택이지, 어느 정도 자신의 스타일을 찾은 이후의 쇼핑법은 아니다.


질 좋은 기본에 투자할 때다. 그래서 올해도 새해가 되면서, ‘스트 살 돈 아껴 계절에 한 번씩, 일 년에 좋은 옷 네 벌을 사자’고 마음먹었다. 일단 앞으로 안 입을 것 같은 옷부터 ‘버림용’ ‘기부용’으로 정리했다(미니멀 라이프 책도 봤지만 그 정도는 못한다고 스스로를 판단한 결과). 패션 센스가 나처럼 평범할수록 이건 효과가 있다. 당장 좋은 옷을 사 입지 않더라도 싼 옷을 솎아내는 것만으로도 나아진다. ‘그래도 한번 입어볼까'하고 마음이 약해지는 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를 대비해, 적어도 미래에 힘없거나 이제 더는 어울리지 않는 그 옷을 입고 있는 나를 예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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