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박중훈 씨를 보다가
어디서 들었더라? 꼰대란 '청하지도 않았는데 조언을 하는 사람'이라고. 이 말대로면 솔직히 나는 꼰대 기질이 있다. 주변에 후배나 동생들이 많아서 만나기만 하면 '너 그러고 있으면 안 돼. 이렇게 이렇게 해야 해.'라는 식의 조언을 10년 전부터 해버릇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알아서들 나보다 더 잘하는데! 스스로 느끼고부터는 자제하는 중이지만, 가끔 자신의 뺨 좀 때려달라며 청하는 변태 상담 고객들이 있어 아직도 간헐적 꼰대 카운슬러로 활동한다.
그럼 진짜 '꼰대'란 뭘까? 사전적 정의를 보자.
권위적인 사고를 가진 어른이나 선생님을 비하하는 학생들의 은어로 최근에는 꼰대질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어원에 대해서는 영남 사투리인 ‘꼰데기’와 프랑스어 ‘콩테(Comte)’에서 유래됐다는 주장이 있다. - [네이버 지식백과] 꼰대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경상도 사투리냐, 프랑스어냐 어원의 지역 차이가 큰데 프랑스어 유래설은 이거다. 프랑스어 콩테(Comte)를 일본식으로 부른 게 '꼰대'인데, 이완용 등 친일파들이 작위를 수여받으면서 자신을 '꼰대'라 자랑스럽게 칭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일제에 작위를 받은 친일파들이 보여준 행태를 '꼰대짓'이라 하기 시작했다는 설. 글쎄, 그 시절을 안 살아봤으니 진위 여부는 알길 없지만, 솔직히 어느 시대 어느 곳에나 꼰대는 있었을 것이다. 찾아본 김에 '꼰대의 6하 원칙'도 가져와본다.
WHO(내가 누군지 알아)
WHAT(뭘 안다고)
WHERE(어딜 감히)
WHEN(왕년에)
HOW(어떻게 나한테)
WHY(내가 그걸 왜)
동생이 국립공원 사찰 매표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 그렇게 많은 아저씨들이 입장권을 안 사고 몰래 들어가려고 했단다. 왜 돈 안 내고 들어가시냐고 잡으면 대뜸, "야, 너 몇 살이야? 내가 집에 가면 너만 한 아들이 있어!" 이게 고정 멘트. "00살인데요, 저희 아버지는 이런 곳 돈 내고 들어가십니다!"라고 응수했다고. 너~~무 익숙한 장면이다. 이 분들은 몇 문장 안에 꼰대의 6하 원칙을 다 녹이는 재주가 있다. 체크인하는 항공사 카운터, 음식점 대기줄, 붐비는 지하철 안. 나이 물어보기로 시작하는 반말의 오지랖 쓰리콤보는 어디서나 종종 목격된다.
그러다 tvN 예능프로그램 <국경 없는 포차>에서 그간 얼굴을 보기 힘들었던 배우 박중훈 씨를 보았다. 응? 박중훈이라는 사람이 저런 사람이었나? 싶었다. 흔치 않게 꼰대가 안 된 쿨한 중년 남자가 거기 있었다.
<국경 없는 포차>는 파리, 코펜하겐, 도빌 등 유럽 도시에서 며칠씩 포장마차를 여는 단기 프로젝트 예능이었다. 50대 중반인 그에게는 야외에서 육체노동으로 그것도 익숙지 않은 요리를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경험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계절적으로도 추운 때 유럽이라니... 젊은이도 힘들고 그냥 여행도 힘든데 리더로 연예인 후배들을 이끌고 포차에서 모르는 외국인 손님을 맞는다? <윤식당> 아류인가 싶은 눈으로 보다가 이내 호감을 갖고 보게 되었다.
청춘들은 보고 싶었던, 동년배는 되고 싶었던 그런 쿨한 중년의 면모를 그가 갖고 있었다. 부족함 없이 정확한 문장으로 소통하는 영어 구사력과 처음 본 외국인들과 금세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친화력을 가진 중년 남자는 한국에서는 유니콘 같은 존재니까. 알고 보니 스물다섯 뉴욕대 석사 유학 시절, 쿼터(25센트) 동전을 가지고 다니며 미국 친구들에게 영어 한 문장을 가르쳐주면 동전 하나씩 주면서 배운 영어와 매너였다. 하루에 네 개 가르쳐준 친구는 그걸로 1달러짜리 커피를 사 마시곤 했다고.
'그런 20대를 지나왔으니 그 시간이 잘 쌓여 몇십 년이 지나도 윤이 나는 것이구나.'
오랜만에 만난다며 포차를 찾아온 파리지앵 아기아빠는 십여 년 전 파리의 어느 바에서 그를 옆자리 손님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친구가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한국에서 그렇게 유명한 스타인지도 몰랐다고 했다. 에피소드가 쿨하다. 이 이야기가 가진 자연스러운 멋이 사실 수많은 힙스터들이 로망으로 삼고 있는 것일 텐데.
아니, 솔직히 이것도 틀렸다. 어쩌면 20대, 30대, 40대, 50대 이렇게 나이로 구획을 나누고 국적으로 분류해 누군가의 성격을 규정짓는 것 자체가 꼰대적 발상의 시작이다. 박중훈 씨가 세느 강가 포장마차 안에서 금세 다국적 다인종 손님들의 호감을 얻는 건 이런 사고방식으로는 될 수가 없다. 나이와 인종의 경계를 떠나서 자유로운 사람에게는 똑같이 마음이 열린다. 언어로 100% 통하지 않는 사이에서는 본능적으로 이런 비언어적 느낌에 의해 받아들여지니까.
나처럼 그의 '어른의 멋'에 호감을 느낀 시청자가 많았나? 이 프로 방영 이후에 그는 은근히 TV 출연이 잦아진 것 같다. 이번엔 후배인 배우 신현준 씨와 함께 또 다른 예능 <냉장고를 부탁해>에 나왔다. 역시나. 신현준 씨는 그에 대해 ‘선배라고 대접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똑같이 친구처럼 대해주는 사람’이라고 했다. 선후배와 나이를 떠나 리액션을 풍부하게 해주는 이는 역시 살가운 존재다. 두 사람 사이에 29년이라는 시간이 쌓여있어서이기도 했지만 계속 짓궂은 농담에 당해주는 우정이 참으로 유쾌했다. 함께 '포차' 촬영 이후 엄청 좋아하고 따르는 기색인 안정환 씨의 모습도 보기 좋았고. 셋 다 개구쟁이 중년이랄까? 모처럼 나이가 멋지게 든, 꼰대가 아닌 어른남자의 모습을 보았다.
“관객들이 저한테 지쳤을 거예요. 1년에 3, 4번을 10년여를 봐요. 관객들이 지치죠. 저도 지치고 자기 복제가 되고. 그러다 영화배우 같은 배우가 아니라 한석규, 송강호 같이 실제 내 곁에 있는 자기 같은 배우가 나온 거예요. 제가 환골탈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가 온 거예요. 어느 순간 숨소리까지 캐치되는 시기가 온 거예요. 그런데 변화하는 게 쉽지는 않은 거예요.”
<방구석 1열>에서 그가 자신에 관해서 한 말이다. 흔히 남자에게 20대의 성공은 독이 된다고 한다. 20대 초반에 이미 TOP을 찍었던 배우이니, 매너리즘과 내리막길도 일찌감치 경험한 셈이다. 뉴욕 가서 유학도 하고 작품을 하다 에너지를 다 소모한 듯한 생각에 일본에 가서 지내기도 했다. 요즘 흔히 말하는 갭이어(gap year)를 시대를 앞서 가진 것이다. 할리우드에 도전해보고 침체기도 있다가 영화 <라디오스타>로 또 한 번 스타로 회자되고, 그런 자기 인생의 단짠단짠을 담담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멋진 어른은 자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줄 안다. 저 위의 '꼰대의 6하 원칙'이 바로 자기객관화가 안 되니까 나오는 말이다. 누군지 알 길 없는 분이 왕년에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 본인 입으로 말하면... 님아 슬퍼져요... 그런 면에서 자신의 부족한 점을 말하고 결국 변화하지 못했다고 고백하는 건 오히려 당당한 자존감이 바탕에 없이는 힘들다. '저러니까 동생들이 좋아서 장난을 걸면서도 존중해주지.' 단정하고 멋스럽게 나이든 클래식카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
중년은 내면과 외면이 따로 갈 수 없는 나이다. 살아가는 모습의 감정은 얼굴에 드러나고 습관은 체형에 흔적으로 남는다. 박중훈 씨는 유럽 촬영을 갈 때 체중계를 갖고 가서 아침마다 체중을 쟀다. 배우의 연기는 호빵맨 같은 외모보다는 좀 더 샤프해야 잘 표현되기 때문에 관리한다고 한다. 올해 초에는 와인 의존도가 너무 심해져서 1년간 한시적으로 금주선언을 한 것이 화제가 되었다. 치우침이 없는 삶. 내가 내 인생을 컨트롤하는 균형감각. 이것을 놓지 않는 자기 관리도 그의 배울 점이었다.
부드러운 리더십, 형님 리더십.
자주 듣기는 하지만 실제로 보기는 어려운 가치인 것 같다. 모처럼 그에게서 말로 하지 않고 보여주는 어른, 어른의 멋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