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나에게 '좋은 연애'란, 굳이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변해 가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드는 연애'다.
이제껏 몇 번의 관계를 맺어 오면서 나는 연애가 나에게 끼치는 영향이 좋은 한 연애를 지속시켜 왔다. '마음 떼기 연습'을 통해 내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관계는 점차적으로나마 -의식적으로- 끊어낼 수 있게 되었다고나 할까. 간혹 끈끈한 자국이 남았지만 그 위는 새로이 덧칠을 했다.
사랑에 열정적인 한 친구는 이런 내가 신기하다고 했다. 나는 전에 사귀었던 남자들을 떠올리는 일도 없을뿐더러, 잠깐 있다 해도 '그래, 그땐 그랬었지.' 정도의 짧게 스치는 생각에서 그치곤 하기 때문이다. 물론 다시 시간을 되돌리고 싶지도, 언젠가 한 번 스치듯 그를 -그들을- 지나치고 싶은 생각조차 없다. 하지만 이는 내가 쿨하다거나 연애 고수라서가 아니다. 유독 관계에 내 일상이 휘둘리는 일이 많은 성격 탓인지 마인드 컨트롤에 대한 강박이 있는 듯도 하다.
연애는 온도에 민감해서 조그만 온도의 변화도 쉽게 감지하고 금세 변질되어 버리고 만다. 상대의 온도가 낮아지기 시작하면 나는 초조해졌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상대의 행동과 말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가장 힘들었던 건, 이 모든 걸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거였다. 반대로 내 사랑의 온도가 낮아지기 시작했을 땐 매일 관계에 대해 고민했고 마음처럼 되지 않는 마음에 지쳐갔다. 그리고 노력해도 더 이상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때 서서히 관계의 끝이 보였다.
사랑이 아름다운 건 조심히 다루어야 유지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찌 보면 단지 연인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는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것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연인 사이처럼 일대일의 관계가 될 수도 있고 다대다, 혹은 다대일의 관계가 될 수도 있다. 감당하고 있는 관계가 많아짐은 곧 짊어져야 할 감정의 무게가 상당해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모든 관계를 내 마음대로 맺고 끊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종종 한다.
돌이켜 보니 첫 직장을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인간관계를 맺고 끊음에서와 마찬가지의 이유였다. 점차 변해가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로 나는 조금이라도 건들면 터져버리고 마는 시한폭탄과 같은 감정선을 가지게 됐고, 매번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불똥이 튀었다. 매일매일이 즐겁고 신나지는 않았어도 미래에 대한 기대감은 가지고 있었는데 당장 내일부터가 기대되지 않았다. 좋은 에너지를 뿜어내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쉬는 날만 되면 매가리 없이 침대에 누워 하루를 겨우 보냈다.
이 일을 하는 의미를 찾지 못하니 몸과 마음이 따라 주지 않았다. 잘 해내고 싶은 욕구가 없으니 그저 '해야 하는' 일만 쓴 약 삼키듯 억지로 해치워버리려는 내가 있었다. 이 모든 부정적인 영향은 돌고 돌아 악순환을 만들어 냈다. 내가 아니면 어느 누구도 대신 끊어낼 수 없는 불의 고리였다.
특별한 재능이나 열정을 쏟아붓고 싶은 일이 없는 것에 대한 대가 치고는 크고 시렸다. 학창 시절 미술을 좋아해 미대 진학을 꿈꾸었던 적이 있었지만 불안감과 걱정-주위 사람들이 심어준-에 그 꿈을 결국 접었었다. 당시의 나는 대부분의 친구들처럼 공부를 해서 일반 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남들과 조금이라도 다른 길을 걷는 것에서 오는 불안감을 덜었다. 그때부터 나는 겁쟁이였다.
결국 성적에 맞춰 대학에 갔고 영어학을 전공했으며 취업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상경 계열로 복수 전공을 했다. 고학년이 되어서는 취업 문이 점점 바늘구멍만 해진다는 주위 말에 덩달아 조급해져 원서를 되는 대로 휘갈겼다. 그 결과 한 곳에서 합격 통보를 받아 직장인이 되었지만 나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어영부영 지원한 회사가 나와 찰떡궁합일 리는 만무했다. 그리고 지금은 소속된 곳, 타이틀 하나 없이 그저 나로 존재할 뿐이다.
다들 똑같아. 다들 그렇게 살아. 조금만 더 버티지. 좋아하는 일을 해도 나중엔 그조차 싫어진다잖아.
'버티지 못한' 나는 한때 내 첫 직장생활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쓸모없는 경험은 없듯 돌이켜 보면 당장의 실패는 온전한 실패가 아니며 성공 또한 마찬가지다. 실패라고 생각했던 일이 지나고 보면 나에게 꼭 일어났어야만 하는 고마운 일이 되기도 한다.
대한민국 거의 모든 청춘이 겪는 거절의 시절. 대학 졸업과 동시에 마주하게 된 거절의 문 앞에 섰던 허리가 잘린 스물넷부터 스물다섯의 시기. 지독히 외롭고 침울했던 그 시기조차 지금에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에게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나 자신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어야 할 건 나였는데도 '나'라는 사람에 대해 깊게 고민해본 적 없이 살아왔음을 깨달았다.
검은 커서가 깜빡이는 하얀 화면을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는 시간이 하루의 대부분을 잡아먹었다. 유독 힘이 들었던 시간이었다. 나의 색깔에 대해 하염없이 고민하고 촉박한 시간에 쫓기듯 스스로를 정의 내려야 했던 시간들. 이명이 들릴 정도로 조용하고 좁은 방 안에 누워 있으면 밀려드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생각의 첫 대가리가 무엇이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아무도 대신 알려줄 수 없는 답을 얻기 위해 몇 시간이고 굳어버린 석고상처럼 앉아 있을 때, 주위의 소음은 큇바퀴 부근 어딘가에서 조그만 소용돌이가 되어 나의 무의식 너머로 아득히 빨려 들어가곤 했다.
하지만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나 그렇듯 결국엔 지나갔고 그 시간이 나에겐 전환점이 되었다. 그 후 내겐 나에 대해 곱씹어 보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그것을 글로 풀어내는 습관이 생겼다.
지난 직장 생활도 그렇다. 막연했던 직무를 실제 체험해 보았고 직장 생활 그 자체로 인생에 있어 꼭 필요했던 경험이었다. 막연히 내 성격과 맞을 것이라 생각했던 일이 실제 경험해 보면 다를 수 있음을 알았으며 적어도 다음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취업 전선에 뛰어들 때는 과감히 걸러낼 업종과 직무가 생겼다. 이 모든 것들은 내가 겪지 않았으면 결코 몰랐을 것들이다.
따라서 그만둔다는 것은 결코 포기나 회피가 아니다.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길을 튼다는 것은 적극적으로 내 마음을 들여다봤다는 것이고, 그 결론은 오롯이 나만을 위한 것이다. 이전보다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서툴지만 가열찬 날갯짓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만둠'을 실패라고 규정지을 필요도, 그만둔 스스로를 나약하다고 자책할 필요도 없다. 손에 꼭 쥐고 있던 걸 놓아야 비로소 다른 것을 잡을 수 있는 여유와 힘이 생기듯이, 지금과 다른 길을 가기 위해서는 가지고 있던 것을 놓아야 할 필요도 있다.
오히려 자랑스러워해야 할 일일지도 모른다. 다른 것을 잡기 위해 갖고 있던 것을 기어코 놓았다는 건 다른 길을 걸어보기 위해 이전에 자신이 얻어낸 것을 기꺼이 포기할 용기를 지녔다는 것이다. 반대로 누군가가 자기 손에 꼭 쥐고 있는 어떤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자기가 가진 것이 소중하기에 그것을 끝까지 지켜낼 용기가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충분한 용기를 지니고 있다.
'그만두다'의 동의어는 '다시 시작하다'이다. 당신이 그만두고 싶은 '관계'가 무엇이든 준비가 됐다면 용기를 내자. 다시 시작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