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숲피 Mar 24. 2019

#02. 들녘에서 모래 바람이 불어오는 곳

방비엥으로부터

굿 모닝, 방비엥!


라오스 여행에서의 실질적인 첫날이 밝았다. 전날의 '여행 내내 한 번 일찍 일어나 보자'는 패기는 어디 가고 우리는 여덟 시가 넘어서 겨우 눈을 떴다. 원래 같았으면 '아직 여덟 시 밖에 되지 않았다'며 다시 두 눈을 꼭 감았겠지만, 이번엔 달랐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한쪽 벽에 가득 드리워진 하얀 커튼을 걷어 젖혔다.


"와-"


미쳤다. 뷰가. 끝내준다. 전 날 늦은 새벽에 도착해 미처 보지 못한 뷰가 창 너머로 펼쳐졌다.


폭이 좁은 쏭강 건너 산들이 병풍처럼 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양 옆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산을 보고 있자니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다. 누군가 이 거대한 산자락을 차곡차곡 접어 뒀다가 모두가 잠든 밤 몰래 펼쳐놓았을 것만 같다. 이른 아침이라서인지 거리에 인적은 드물고, 저 아래 강가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서 아침 식사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듬성듬성 보일 뿐이다.


들뜨는 마음으로 동생 팔을 잡아끌며 조식을 먹으러 식당에 내려갔더니, 쌀국수가 있다. 세상에. 내가 동남아에, 라오스에 왔다는 것이 실감 나는 순간이다. 뜨끈한 쌀국수 한 그릇에 계란, 팬케익을 접시에 담고서 강가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앉아 여유롭게 즐기는 아침.


으음- 무슨 말이 더 필요하리.


방비엥 숙소 풍경과 조식 @여름의 무늬




한국의 가평이라 불리는 방비엥


오늘의 첫 일정은 환전과 액티비티 예약하기. 수중에 낍(kip)이 한 푼도 없었기 때문에 우선은 환전을 하러 달러를 들고 숙소를 나섰다. 숙소가 조금 외진 건 알고 있었지만(오로지 뷰를 위해 선택한 곳이었다.) 지도로 보던 것보다 직접 걸어보니 생각보다도 더 멀게 느껴졌다.


"윽, 더워…"


신음이 절로 나왔다. 아침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꽤나 뜨거운 날씨에 나시를 입은 어깨가 금세 뜨끈해졌다. 더위에 저절로 발걸음이 빨라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처음 마주하는 방비엥의 거리엔 죄다 투어사나 식당이 자리 잡고 있다. 액티비티와 휴양으로 유명한 곳인 만큼 이 마을이 여행객을 상대로 벌어들이는 수익은 아마 상당할 거다. 심지어 방비엥은 한국인들 사이에서 '가평'이라 불릴 만큼 청춘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정평이 나있기 때문에, 한국인 여행객을 끌기 위해 한국어로 쓰인 간판을 내건 곳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심심찮게 볼 수 있는 한국어 간판 @여름의 무늬


눈에 띄는 투어사에 대충 액티비티 가격을 물어보며 걷다 보니 방비엥의 중심에 있는 은행에 도착했다. 고시된 환율에 맞춰 환전을 하고 나서 현금은 모조리 동생이 맡았다.


"백만, 이백만, 삼백만…"


"잘 셌지? 돈 맞아?"


"엉. 근데 단위가 너무 큰데?"


몇 장을 건네고 수십 장을 받았다. 두툼해진 지갑을 들고 본격적으로 투어 예약에 나섰다. 카약킹, 짚라인, 튜빙, 버기카 등등. 할 수 있는 액티비티도 수 개며, 그 조합도 다양하다. 대부분의 투어사에서 비슷한 상품을 비슷한 가격에 팔고 있기 때문에 어디서 예약하면 좋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 땐, 그저 끌리는 곳에서 하는 게 최고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안녕하쎄요-! 투어 여기, 여기! 버기카? 버기카?"


길을 지나다 들려온 서툰 한국말에 홀린 듯 발을 들인 한 투어사. 그곳에서 우리는 필요한 것들을 모조리 예약해 버렸다. 버기카 렌트와 내일의 풀데이 투어, 그리고 다음 목적지 루앙프라방으로 가는 미니밴까지. 우연이 인연이 되고 그런 거지 뭐.


그렇지만 흥정은 필수 중의 필수다!




울퉁불퉁, 버기카 드라이빙


점심을 먹고 시간에 맞춰 숙소 앞에 나오니 우리가 탈 버기카가 와 있다. 가이드에게 버기카의 조작법에 대한 대략의 설명을 들었다. 조작은 간단했다. 그저 기어만 잘 넣고 밟기만 하면 끝이다.


"자, 이거. 꼭 써야 돼. 모래바람, 장난 아냐."


가이드가 일회용 마스크를 건넨다. 모래가 그렇게까지 날린단 말이야?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야? 속으로는 의구심을 가득 품고 마스크를 받아 들었다.


운전대는 동생이 잡았다. 뭐, 사실 내가 운전해도 좋았을 법했지만 남자들이 으레 가지고 있는 오프로드를 힘차게 달리는 로망을 동생에게 양보했다. 낼 수 있는 속력이 한정되어 있는 버기카로 충족이 될 성싶긴 했지만. 그래도 오프로드 아닌가!


처음에는 불편하게 차가 덜커덩거린다 싶더니 버기카 작동에 익숙해질 즈음 다리를 건너 마을을 벗어났다. 본격적으로 양 옆으로 펼쳐진 들판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는 길을 달릴 타임이다.


"부와아아아아아아앙-"


속력에 비해 요란한 소리다. 포장되어 있지 않은 길 위에서 차는 앞뒤로, 위아래로 마구 요동쳤다. 엉덩이는 마구 들썩이고 아드레날린이 끓어올랐다.

 

하지만 주위에 아무도 없는 흙길 위를 홀로 질주하느라 신난 것도 잠시, 맞은편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려오던 버기카가 지나가자 모래바람이 회오리바람처럼 흩날렸다. 오, 마이, 갓. 눈을 한껏 찡그리며 옆을 돌아봤더니 동생의 선글라스가 모래 먼지로 노오랗게 뒤덮였다.


"크크크- 노랭이 됐네, 노랭이."


부릉부릉, 시동을 끄고 결코 짧지 않았던 첫 번째 드라이빙을 마쳤다. 우리는 옷이며 모자며 할 것 없이 온몸에 노오란 모래를 뒤집어쓴 서로의 꼴을 보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그냥 주는 건 다 이유가 있네. 필템이네 필템."


동생이 어느새 노래진 일회용 마스크를 흔들며 말했다.


버기카 @여름의 무늬




방비엥의 푸른 눈동자 속으로


오늘 버기카로 갈 곳은 총 세 군데. 블루라군 2와 3, 그리고 스프링 라군이다. <꽃보다 청춘 라오스> 편에 방영된 후 유명해진 블루라군 1은 내일 투어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오늘은 투어로 가닿지 않는 곳들을 가 보기로 했다.


숙소에서부터 50분 정도 달려서 첫 목적지인 블루라군 2에 도착했다. 기대감을 안고 들어선 곳에 비단 한국인뿐 아니라 사람 자체가 많지 않았다. 의외였다. 방비엥 시내에서 자주 보였던 한국인들은 다들 어디 흩어져 있는 걸까?


푸르게 빛나는 물웅덩이가 거대한 산맥의 품 안에 안긴 듯한 모양이다. 현실세계와 단절된 어떤 공간에 들어선 듯 주변의 공기가 소리 없이 조용히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그 잔잔한 고요함을 깨지 않으려 살금살금 그늘이 드리워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람이 있긴 한 듯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블루라군 2 @여름의 무늬


다음으로 향한 곳은 규모는 제일 작았지만 가장 마음에 들었던 스프링 라군. 이 곳 또한 거대한 산맥이 보호하듯 양 팔을 그러안고 있다. 작은 라군 가장자리를 따라 둘러싸고 있는 정자 중 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런 곳에 이처럼 프라이빗한 공간이라니.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벌러덩 드러누워 버렸다.


2월 초의 라오스 날씨는 한낮의 뙤약볕이 뜨겁기는 하지만 땀이 줄줄 흐를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늘 아래 가만히 누워 있으니 잠이 솔솔 쏟아졌다. 못 이기는 척 눈을 감으니 몇 명의 무리가 물속에서 장난치며 노는 소리가 귓바퀴에서 아득히 멀어져 갔다.


스프링 라군과 블루라군 3 @여름의 무늬




방비엥에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방법


하늘 높이 떠있던 해가 눈높이까지 내려오는 시간. 한낮의 눈부시게 뜨거웠던 태양이 그 기세를 한풀 꺾고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시간. 세상이 온통 따뜻한 빛깔로 물드는 시간. 감히 하루 중 가장 아름다운 시간. 일몰이다.


태양의 고개가 산들 틈 사이 툭 하니 걸렸다가 이내 고개를 떨구고 아래로 아래로 저물어갔다. 내내 푸르렀던 하늘은 타들어갈 듯이 붉게 물들었다가 짙어진 산자락 너머에서 번져온 어둠에 이내 잡아먹히고 만다.


해질녘 @여름의 무늬


해가 완전히 다 지고 주변이 온통 깜깜해지고 나서야 야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야시장 입구를 찾는 법은 쉽다. 방비엥을 가로지르는 큰길을 따라 새카만 어둠 속을 걷다 보면 온갖 조명으로 불 밝혀져 있는 곳이 있으니, 그곳이 바로 야시장이 열리는 곳이다.


한낮의 더위가 가신 후 짙게 깔린 어둠 속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낮에는 볼 수 없는, 밤마다 찾아오는 풍경. 차량은 다닐 수 없게 통제해 둔 거리에 좌판이 깔렸다.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아 걸어서 금방 둘러볼 수 있을 정도이지만, 온갖 투박하지만 화려한 것들을 구경하면서 걷다 보면 지갑이 열리는 건 순식간, 수만 번이다.


결국 '여행 중에 갖고 싶은 게 있으면 그때 사야 한다'는 지론 아래 지갑을 열 대로 열었더니 팔엔 주렁주렁 봉지 열매가 열렸다. 팔찌며 자석이며 파우치며…. 그런 나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동생 등짝을 가열차게 때려주고는 야시장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야외 노점을 향해 홀린 듯 달겨들었다.


야시장, 비어라오 @여름의 무늬


우리를 포함하여 허기진 배를 채우는 사람들로 시장은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찼다. 군것질을 끝으로 분주했던 야시장 구경은 끝이 났고, 우린 숙소를 향해 피곤한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잠들기엔 이른 시각, 이대로 잠들기 아쉬워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슈퍼에 들러 사 온 비어라오를 땄다.


"딱-"


시원한 맥주 한 병에 고단함은 가시고, 흐물흐물 나른해진 몸을 얼른 침대에 뉘었다. 밤이 빨리 찾아오는 이 곳, 방비엥에서의 또 다른 하루가 저물어 간다.






<여행자들을 위한 작은 Tip>
*버기카 렌트는 4시간 정도면 방비엥의 알려진 라군들은 충분히 다 둘러볼 수 있다. 그에 더하여 전망대에 오를 예정이라면 +α.
*가장 인기 있는 블루라군 1을 제외하고는 사람이 많지 않아 보다 한적한 여유를 즐길 수 있기 때문에 <꽃청춘>에 나온 블루라군을 꼭 가봐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다른 라군을 가보는 것을 추천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01. 안녕, 라오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