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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한나 Jun 17. 2020

그 말 한마디 덕분에

슬로베니아 루블랴나

 크로아티아에서 한 달 가까이 머물다가 마지막 도시였던 자그레브까지 여행을 마친 뒤, 기차를 타고 슬로베니아로 떠났다. 슬로베니아 또한 우리 예정에 있던 나라는 아니었지만, 이미 몇 번의 경험으로 계획에 없던 곳을 가는 것이 오히려 더 좋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도착하자마자, 우리가 류블랴나라는 이 작은 도시를 좋아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루블랴나를 주관적으로 설명하자면, 프라하처럼 아기자기하고 예쁜 도시인데 아직 프라하만큼은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동화마을이란 말이 잘 어울리는 도시이고 아마도 그래서 프라하가 생각나지 않았나 싶다. 몇 년 전, 남편과 둘이 함께 프라하를 갔을 때 동화 속 마을에 온 기분이라고 말한 게 생각났다. 이 곳에 오니 그때 우리의 대화가 떠오른다.
루블랴나 성에 올라가서 본 이 도시는 온통 붉은색 지붕으로 덮어진 건물들이 통일된 안정감과 멋스러운 전경을 선사한다. 그리고 카카오라는 아이스크림집은 맛있어서 거의 매일 들리는 우리의 코스가 되어버렸다.


루블랴나 성 위에서


루블랴나의 올드타운에서는 곳곳에서 길거리 공연을 하고 있었고, 어딜 걸으나 어렴풋이 들려오는 음악이 발걸음을 더 신나게 해 줬다. 길거리를 걷다가 공연하고 있는 음악에 맞춰 어린아이들 여러 명이 점프를 하거나 춤을 추고 있었다. 우리 아들도 그 아이들 틈에 끼여서 점프를 하며 한참을 놀면서 즐거워했다. 그런 순간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유명 관광지 이름은 수없이 잊어버려도, 이런 소소한 순간들의 잔상이 아주 오래오래 남는다. 그래서 여행을 하면 할수록 별거 아닌 걸 하는 게 더 좋았다. 그냥 이름 모를 거리를 걷는 거, 책방에 가서 그 분위기를 느끼는 거, 아기가 낮잠을 자면 노천카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게 좋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는 주인공이 이렇게 지나가는 사람 구경하는 장면이 꽤 자주 나오는 걸로 기억한다. 그게 기억이 남아 따라 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생각보다 꽤 흥미로운 일이고 지금까지도 휴식이 허락되면 줄 곧 하는 일이다) 그럴 거면 너 왜 거기까지 갔니,라고 핀잔 들을 만한 일들이 나를 더 즐겁게 했다.


루블랴나의 올드타운


류블랴나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관광안내소 앞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안내소 앞에 있는 조각상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남편과 아들의 사진 찍고 있었는데, 뭔가 기분이 싸해서 뒤를 돌아보니 차가 나를 향해 후진해오고 있었다. 너무 깜짝 놀라 내가 가지고 있었는지도 몰랐던 엄청난 반사신경을 사용해 차를 피해 앞으로 급하게 뛰어갔다. 놀라서 심장이 무척이나 두근거렸고, 진짜 이렇게 허무하게 교통사고가 날 수도 있는 거구나 싶었다. 남편도 너무 놀라고 화가 나서, 차 안에 있는 사람을 향해 왜 그러냐고 물었다. 당연히 사과를 할 거라 예상했던 우리에게 그는 오히려 화를 내며, 자기가 차에서 내리길 원하냐며 윽박질렀다. 그곳은 차가 다니는 도로로 아닌 주차장이었고, 분명히 자기 잘못인 데도 우리에게 오히려 더 화를 내는 것이었다. 굳이 큰 일을 만들 필요는 없어서 그냥 남편한테 참으라고 손을 잡고, 나도 내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 세계 여행하다 보면 별의 별일을 겪는 거지. 그런데 그 순간, 이 모든 장면을 지켜본 슬로베니아 사람이 그 운전자에게 이 나라 말로 뭐라고 소리친다. 그 언어를 알아듣지 못해도, 소리치는 바디랭귀지와 톤만으로도 그 운전자에게 따끔하게 한 마디 하는 거로 느껴진다. 그리고는 우리를 향해 영어로 말한다.

“ 저 한 사람 때문에 다른 슬로베니아 사람들에 대해서 선입견을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차분하게 한 마디, 한마디 말하는 그의 말을 듣고 있는데, 몇 분 전까지 화가 많이 나 있던 마음이 가라앉는다. “네”라고 대답하며 우린 서로 각자 갈 길을 갔다. 저 사람의 그 말 한마디 덕분에 우리 마음은 크게 달라졌다. 신중하고 따뜻한 그의 말 한마디가 어쩌면 그 날 하루 종일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하며 불평했을 우리의 대화를 바꾸어 놓았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는데, 굳이 우리를 위해 한마디 소리쳐 주고, 굳이 우리를 위해 조용히 건넨 그 한마디 덕분에 슬로베니아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달라졌다. 충분히 달콤했다, 거의 매일 밤 먹었던 그 쫀득했던 젤라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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