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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한나 Aug 05. 2020

그 가을에 만난 사람들

한국 가을의 품에 안기다

 일본을 가려고 예약했던 비행기 티켓을 급하게 취소하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갑자기 일이 생겨서 계획에 없던 한국을 가게 되었다. 도착해서 시부모님이 계신 속초로 향했다. 그 전에도 속초에 몇 번 간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몇 주 동안 머물면서 지낼 기회는 없었는데, 이번에 속초를 보게 되면서 한국의 가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설악산의 단풍은 내가 본 단풍 중에 단연 최고였다. 한국에 살았을 때는 왜 이런 풍경을 놓치고 살았을까 싶을 정도로 설악산의 절경은 놀라웠다. 새빨간 단풍부터, 주황색 빛깔, 노르스름한 단풍까지 여러 색깔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설악산의 단풍을 감탄하며 바라봤다. 한창 걸어 올라가니 보였던 한옥 카페에서 야외 테라스에 앉으니 멍하니 바라만 봐도 절로 미소 짓게 만들었던 설악산의 모습에 푹 빠졌다. 그 카페를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보이는 절에 들어가 조용히 구경을 하고 나와서 길을 계속 올라가다 형님과 남편을 보느라 뒤를 돌았는데, 그 순간 그 둘 뒤로 펼쳐진 풍경이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흙길과 오른쪽에 자리한 묵묵한 절, 뒤편과 왼편으로 촥 펼쳐진 설악산의 모습에 우리가 걸어왔던 길을 뒤돌아 한참을 쳐다보게 되었다. 남편, 아들, 형님과 조카, 부모님과 다 같이 설악산에 한 번 가보고 너무 좋아서 나중에는 형님네와 우리 가족 셋이 한 번 더 가기도 했다. 우리가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모르는 설악산의 단풍에 미련이 많이 남아서였다. 그렇게 속초에서 지낸 3주 정도의 시간 동안 천천히 설악산과 속초해변, 청초호수, 천진해변, 영금정을 둘러보았다. 10년 넘게 한국의 가을을 본 적이 없었는데, 그것도 속초에서 한국의 가을을 보낼 수 있어서 더 특별했다.


우리가 반해버린 설악산의 가을


장기 여행을 하면서 그리웠던 건, 무엇보다 날 잘 아는 익숙한 사람들과의 ‘관계’였다. 그런 면에서, 한국에 오게 된 건 어쩌면 우리에게 꼭 필요했던 시간이었다. 초등학교 친구부터, 중고등학교 친구들, 대학교 친구들을 만나면서, 깔깔거리며 웃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저 나를 있는 그래도 봐주고, 잘하고 있다고 무조건 응원해 주는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니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 된 거 같다. 그들을 만나니 과거의 내가 생각나고, 그들이 과거에 나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생각하니 절로 눈물이 날 것 같다. 지금 내가 나일 수 있는 건, 일일이 이름을 나열하지 않아도, 지난 내 세월 속에서 나를 아껴준 사람들의 큰 마음들 덕분이다.

6개월 안에 3개의 다른 대륙에서 만난 친구들도 있었다. 바로 또 다른 디지털 노마드 가족인 지희 언니네이다. 운명처럼 언니네가 제주도로 떠나기 딱 하루 전에 우리 두 가족은 서울에서 한 번 만날 수 있었다. 유럽의 크로아티아, 미국의 워싱턴에 이어서 한국의 서울까지 세 번째 만남 또한 우린 계획하지 않았다. 계획하지 않아도 이렇게 만나게 되니 더 반가웠다. 아이들이 구경하기 좋은 코엑스 아쿠아리움에서 시간을 보내고, 한국음식을 실컷 먹을 수 있는 뷔페에도 갔다. 한국에서 이들을 보니 자다르에 갔던 시간이 오래전 일인 듯했다.

 

영금정과 속초해변


한국에 가면 꼭 하고 싶은 일 중에 하나는 바로 남편과 아들을 데리고 내가 다녔던 대학교를 가는 거였다. 남편은 결혼하기 전에 가봤지만 이번처럼 아들과 함께 가는 건 처음이다. 아들이 내가 늘 걸어 다녔던 광장을 뛰어다닌다. 내 청춘이 모두 담긴 이 공간에, 내 몸에서 나온 또 다른 생명이 저리 뛰어다니는 걸 보니 묘하다. 대학시절 내내 그리고 졸업 후에도 늘 내가 존경하는 교수님을 정말 오랜만에 만났다. 대학교 1학년 때 처음 보았던  교수님의 얼굴에, 머리 색깔에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호주 생활을 하면서도 계속 참고 참다가 견디기 힘들면 그때서야 전화를 드렸던 교수님이다. 교수님은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시고,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위로를 주셨다. 교수님과 대화하고 나면 난 늘 대화하기 전보다는 세상을 상대할 힘이 더 생기곤 했다. 교수님께 엄마로서의 삶은 참 감사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뭔가 채워지지 않는 게 있다고 말씀드리자, 애정 어린 눈길로 정한나로서 할 수 있는 걸 할 날이 올 거라고 하신다. 교수님의 그 눈빛을 보고 있자니 덤덤한 확신이 든다. 나에게도 그런 날이 꼭 돌아올 거라고. 2005년, 한국을 떠나는 모험을 앞두고 복잡한 마음으로 교수님께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때 교수님께서 해주신 말씀 중에서 아직까지 내가 기억하는 한 문장이 있다.

 “성실히 하되, 조급해하지는 말아라.”

이 한 문장은 그 이후에도 오래도록 내가 마음으로 늘 생각하고 기억하는 말이 되었다. 성실히 해도 조급할 때가 무척 많았고, 때론 조급하지 않지만 성실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성실과 조급하지 않음의 균형을 잡는 게 쉽지 않지만, 이 균형이 얼마나 더 건강한 삶으로 이끄는 지도 조금씩 알게 되었다. 아직은 갈 길이 멀었지만, 언젠가 교수님께 자랑스러운 제자가 되는 그 날까지 조급하지 않지만 성실히 살겠다고 교수님의 인자한 미소를 보며 마음속으로 다시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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