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에서 우리가 마지막으로 머문 곳은 쿠타이다. 유명하지만 워낙 사람이 붐비는 곳이어서 머물 생각은 없었는데, 떠나기 전 발리에 Nyepi Day라고 있는 데, 모든 가게들이 문을 닫고 사람들도 밖에 나가는 게 허용되지 않는 공휴일이라서 시설 많은 큰 호텔을 찾다 보니 쿠타로 오게 되었다. 사누아에 있던 우리 숙소는 서비스 아파트 같은 곳이라, 음식 배달까지 안되면 하루 종일 있기는 힘들 곳이어서 말이다.
그렇게 오게 된 쿠타는 생각 이상으로 좋았다. 쿠타가 힘들었던 건 교통체증 때문인데, 막상 쿠타에서 차를 타지 않고 다니니 나쁘지 않다. 길도 새로 정리돼서 유모차 끌고 다니기 좋았고, 걸으면 바로 코앞에 있는 비치와 레스토랑, 마사지 샵까지 웬만한 건 다 있어서 가족들에게 편리했다. 그중에서 가장 좋았던 건, 호텔에서도 보이고, 길거리를 걷다 보면 볼 수 있었던 쿠타 비치의 선셋이었다. 선셋도 신기하게 지역마다 다르다. 이건 나만 느끼는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사누아에 봤던 선셋은 분홍빛과 보랏빛이 뒤섞인 색이었는데, 쿠타는 그런 색깔도 있지만 보다 더 강열한 붉은빛을 띤다. 선셋이 시작될 땐 연한 오렌지색이었다가, 보랏빛을 거쳐, 결국에는 붉은색이 된다. 시간에 흐름에 따라 색이 그렇게 바뀌어 가는 걸 멍하니 보고 있노라면, 자연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그걸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게 너무나 감사하다. 비록 옆에 징징거리는 아들 두 녀석이 있을지라도 잠시나마 자연을 보면서 경외감을 느끼는 그 짧은 순간이 얼마나 큰 힐링을 선사하는지.
쿠타 비치의 선셋 컬러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졌다. 나도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색깔을 나타내겠지
이번 여행에서는 그 찰나의 순간이 나중에 얼마나 그리워할 걸 미리 알게 되는 기분이어서 참 신기하다. 첫 번째 장기 여행을 떠났을 땐, 이 정도로 느끼지 못했는데 이번 두 번째 여행에서는 내가 마주하고 있는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바로 그때 알게 돼서 감사하다. 이게 나이가 들어서 더 느끼는 걸 수도 있고, 저번 여행 끝나고 여행 후유증 비슷한 걸 앓은 기억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나중에 그토록 그리워할 거면, 지금 온전히 즐기고 누리자는 마음이 깊어진다.
예를 들면, 해변에 있는 길가 식당을 지나가는데 불과 며칠 전에 우리가 거기서 햄버거를 먹던 기억이 나서 순간 울컥했다. 며칠 전이 벌써 과거가 되어버렸고, 그때가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져서. 과거가 이렇게 빨리 된다는 게 새삼스레 느껴져서 말이다. 마흔이 돼서 그런가.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이렇게 문득문득 올라올 때가 있다. 친구가 언급했던 사십춘기를 나도 겪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머지 않아 그리워 할 그 찰나의 순간들
발리는 저번에 왔을 때도 그렇지만 참 매력적인 곳이다. 그래서 두 번 왔어도 언젠가 또다시 올 곳이라고 느껴지는 여행지이다. 그렇게 두 달을 보냈다. 첫째 아들이 처음 서핑레슨도 해보고, 태권도도 처음 배웠다. 둘째 아들은 짧지만 처음으로 데이케어도 가봤다. 5주 정도 머물렀던 숙소의 직원들과 정들었고, 어딜 가도 친절한 발리 사람들 덕분에 기분 좋게 여행할 수 있었다. 느리게 여행하니 한 곳에 오래 머물면서 여행한다기보다는 발리 생활을 해볼 수 있어서 좋았고, 거기서 우리만의 루틴을 만들어 생활하니 아들 온라인 학교 수업도 더 수월해져서 다행이었다. 여러모로 고마웠던 발리를 떠난다.물론 다른 나라에 가면 힘겹게 만들어 온 루틴이 또 달라지겠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환경에 들어간다는 것에 대한 설렘이 더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