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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한나 Aug 21. 2024

어제의 추억이 오늘의 미소가 되니까

우리는 변했지만 또 그대로이다

"욕망의 목적은 바닥까지 소비하여 자극만 취하는 것이 아니다. 욕망은 광기나 과음과 다르다. 욕망은 현재 경험하는 것에 두는 관심이다. 공감, 오랜 우정을 소중히 하는 따뜻함, 생각지 못한 대화, 칭찬, 실제로 경험한 소중한 찰나에서 얻은 짜릿함의 음미는 강렬함과 부드러움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로랑스 드빌레르, 모든 삶은 흐른다)


태국 다음으로 간 한국에서 지내던 동안 읽은 책 내용이 마음에 와닿아 기록을 해두었다. 특히 저 말, "오랜 우정을 소중히 하는 따뜻함"이란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정말 오랜만에 한국 친구들을 만나니 그저 너무 좋았다. 만나는 동안 보기만 해도 행복해서 눈으로 마음으로 친구들의 표정과 주름과 눈물과 미소를 담아두었다. 다들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해 아쉬움이 컸다. 친구들과 가족과 함께한 그 소중한 찰나들이 모여 나에게 엄청난 에너지가 되었고, 앞으로 더 나갈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속초에서



아들들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어, 여기저기를 다녔다. 첫째 아들 생일에는 롯데월드에 갔다. 아들이 원하던 생일 파티는 해주진 못했지만 그래도 놀이공원에서 좋아서 방방 뛰는 아들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나와 너무 달라서 알아가기 어려울 때도 많지만, 한편으로 나와 많이 달라서 배울 게 참 많은 아들이다. 무뚝뚝한 나와 달리 표현을 자주 하고 잘한다. 엄마 좋다, 사랑한다, 아름답다 등등의 말들을 자주 하는 아들을 보며 어색하지만 그 질문에 대답하면서 조금씩 알을 깨고 나오는 기분이다. 아들을 키우며 어렵다 어렵다 하는 육아이지만 결국에는 그 너머의 가치가 있다는 걸 아들을 통해 느낀다. 내가 어렸을 때 누리지 못했던, 생일에 가족끼리 놀이공원 가는 추억을 만들 수 있어서 축복이구나 싶었다. 롯데월드에서 10시간 반 동안 있으니 온몸이 쑤시지만 행복해하는 아들들을 보니 그거면 됐다 싶다. 찌든 더위였지만 애들을 데리고 서울 곳곳을 구경했다. 청와대, 경복궁, 아쿠아리움, 한옥마을, 동물원을 다니니 다시 여행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들들이 기억할 수 있는 나이에 한국에서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어 감사했다



지난 몇 달 장기 여행을 하면서 사람을 만나기도 했지만, 날 설명하지 않아도 그 누구보다 날 이해해 주는 옛 친구들을 만나는 건 다르다. 대학 졸업 후, 호주에 간 게 2007년이니 한국을 떠나 산 지 벌써 16년 째이다. 처음 몇 년은 새로운 나라에서 모국어가 아닌 말을 하면서 공부하고 일하느라 정신없이 지내느라 향수병을 걸릴 틈도 없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한국에 있는 내 사람들이 그리워졌다.


내가 태어난 곳이고, 대학생 때까지 지낸 나라인데도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다시 찾아간 한국은 아주 많이 낯설었다. 이건 아마 나도 변했고 한국도 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내 인생의 거의 반을 호주라는 나라에서 살았고,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려 노력하면서 자연스레 내 생각도 많이 변하게 되었다. 그래서 겉으로 보면 완벽한 한국사람인데도, 뭔가 내 자신이 이방인처럼 느껴지는 경험을 종종 했다.


난 원체 아날로그적인 사람이어서 기계에 약하다. 4년 만에 돌아간 한국은 당연히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고, 그 간단한 음식 주문도 키오스크로 해야 할 때면 등 뒤에 땀이 나기도 했다.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면 어찌나 눈치가 보이는지 모른다. 남편이 일하는 동안, 시끄러운 두 아들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도 다른 나라에 비해서 더 힘들었던, 더 눈치가 보여서다. 식당에서 난 죄인이 되어버리는 것 같고, 뭔가 옥죄이는 것만 같았다.


한국을 너무 좋아하는데, 나이가 들수록 한국 음식이 최고로 맛나지는데, 애틋한데 어려운 존재가 되어버린 기분이다. 그래도 나에게 한국은 사람 덕분에 다시 가도 또 가고 싶은 나라이다. 나의 학창 시절을 함께 한 친구들은 만나면 난 그대로 그 시절로 돌아간다. 내 친구들도 나도 너무 많이 변해버렸는데, 우리의 소녀 같은 마음은 그대로인 걸 어쩌나. 예전에 어른들이 하시던 말씀, 흔하디 흔한 그런 말들이 사실인 걸 부정할 수가 없다. 나이가 들수록, 추억을 공유하는 일이 현재의 오늘에게도 희망을 준다는 걸 말이다. 중학교 친구와 아기자기한 익선동에 가서 엄마들의 휴가를 즐겼다. 둘 다 처음 가 본 그곳을 같이 걷고, 애들이랑은 같이 가긴 힘든 고기 구워 먹는 식당에서 저녁 먹고,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술 한잔을 마셔본다. 우린 둘 다 너무 변했지만 우리 둘 다 그대로이다. 서로를 향한 애정과 믿음은 더 확고해졌다. 자주 연락을 못했다 한들 그게 서운함도 아니요, 그러려니 하면서 서로 헤아려주는 마음결이 느껴져 든든하다.


밤의 익선동, 오랜 친구와 다시 새로운 추억을 만들었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만나 정말 배가 아프도록 깔깔 거리며 웃었다. 실없는 농담에, 지난 이야기에, 그리고 지금 살아가는 이야기에 이렇게 까지 웃어재낀게 얼마만인가 싶다. 시간이 흘려가는 게 아쉬울 정도로 헤어지는 아쉬운 녀석들이다. 대학 친구들과 이제는 각자 아들, 딸까지 함께 만나면 시끌 복적 하지만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20대에는 꿈과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던 우리는 이제 엄마, 아빠가 되어 육아의 고됨에 대해 신세한탄을 하고 있다. 그래도 이렇게 그 자리에서 여전히 내 이야기를 귀 기울여 주고, 누구보다 내 삶을 응원해 주는 존재임을 알기에 그들을 바라만 봐도 마음이 뭉클해진다. 친구들 바라보며 이 아이들과 같은 나라에 살고 있다면 얼마나 더 행복할까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솔직히 전에는 한 적이 없다. 호주라는 나라의 매력에 푹 빠졌기도 했고, 그곳에서 살아남으려고 애쓰기 위해 내가 뭘 그리워하는지도 틈을 주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40대에 돌아온 한국은 나에게 매섭게 굴기도 했지만 결국엔 이런 마음을 선사해 주었다. "오랜 우정을 소중히 하는 따뜻함" 말이다. 20대에는, 30대에는 미처 더 깊이 느끼지 못했던 오랜 우정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이번 한국 여행을 통해 내 안에 들어왔다. 떠나고 나면 마음 아리도록 그리울 사람들의 얼굴을, 목소리를, 미소를 내 속에 담는다. 마치 한여름 밤의 꿈만 같은 2023년의 뜨거운 여름은 그렇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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