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후쿠오카까지는 한 시간 비행이었는데, 둘째 아들이 한 시간 동안 잠들어서 수월하게 후쿠오카 도착했다. 공항에 도착해서 심카드 사고, 택시 타고 숙소에 도착하니 기절할 듯 피곤했지만 저녁식사 시간이라 걸어서 숙소 근처 라멘집으로 향했다. 어두운 밤에 본 후쿠오카 첫 느낌은 오사카와 상당히 비슷한 분위기였다. 간간이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이 걷기 좋은 날씨였고, 우리가 찾은 라멘집도 로컬이 주로 손님인 작은 식당이어서 마음에 들었다. 소스를 이것저것 보다가 내가 잘못 라멘 소스를 만두소스로 착각하고 부으려고 하자, 옆 테이블에 있던 일본 손님들이 날 말렸다. 난 웃으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옆 테이블에 있던 손님이 먹어보라고 선물이라며 작은 반찬 같은 음식을 우리 테이블에 건네주었다. 이미 작은 친절에 마음이 따스해졌는데 엄청난 감동이었다. 자연스레 대화가 이어졌고, 그 손님들은 헤어질 때 후쿠오카를 잘 즐기라고 하길래, 이미 그대들의 친절함으로 후쿠오카에 좋은 기억이 생겼다고 말했다. 식당을 걸어 나와 숙소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몸은 엄청나게 피곤했지만 여행객에게 베푸는 호의 덕분에 기분 좋은 후쿠오카의 첫날밤이었다.
며칠 뒤, 아들들을 데리고 과학관에 갔다. 둘째가 몇 번 소리 질렀지만 그래도 아빠 일하는 동안 우리 셋이 재밌게 잘 놀았다. 아빠 일 끝나고 애들과 그 근처에 있던 놀이터로 갔다. 첫째는 로컬 아이들과 야구를 했다. 어떻게 말이 통하냐고 물어보자, 말은 통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 꼭 말이 통할 필요 없이 서로 같이 뛰놀면 되는 거지. 여행하면서 이렇게 그곳에 살고 있는 아이들과 시간 보내는 게 특별한 추억인 거 같다. 땀 뻘뻘 흘리며 몇 시간 동안 놀이터에서 놀고 근처에 저녁 먹으러 걸어갔다. 저녁은 이탈리안 먹고 싶다고 해서 찾아갔던 자그마한 일본식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는데 너무너무 친절해서 기억에 남는다. 심지어 공짜로 맥주 샘플러 두 잔을 주셨다. 식사 후에 나가면서 식당 앞에서 사진 찍으려고 했는데 상냥한 직원분이 나오셔서 우리 다 같이 찍어주셨다. 여행하면서 이런 친절함이 그리 흔하지 않다는 걸 알기에 참 인상 깊었다. 문득 포르투갈에서 느꼈던 그런 친절함과 비슷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후쿠오카가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왜 그런지 알겠다. 그래서 후쿠오카에 더 오래 있기로 했다.
후쿠오카의 과학관과 동네 놀이터들. 후쿠오카를 가족이 여행하기 좋은 이유 중 하나는 아이들이 즐길 수 있는 관광지가 많다는 점이다.
둘째 아들의 생일기념으로 처음으로 다 같이 오리배를 탔다. 쇼핑몰에서 우연히 후쿠오카 관광 홍보 영상을 보다가 오리배가 있는 걸 보고, 계속 타고 싶다고 하길래 생일이기도 해서 다 같이 처음 해보는 경험에 도전했다. 둘째는 낯을 많이 가려서 이 아이의 본래 성격을 모르는 사람이 많은데 보기보다 엄청 애교도 많고 사랑도 넘쳐서 나에겐 딸 같은 아들이다. 임신초기에 싱가포르에서 위험한 순간들이 있었고, 임신 말기에는 시드니에 다시 정착하는 시기라서 추운 겨울, 침대도 없는 맨 방바닥에서 자기도 해서 왠지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던 아이이다. 제대도 태교 할 새도 없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해서 뭔가 항상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나에겐 둘째가 누구보다 강한 Survivor라는 생각이 늘 들었고, 어쩌면 여려 보일 수 있는 아이지만 속이 단단한 아이로 커가는 걸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나에게 큰 웃음을 주는 아이, 내 표정을 살피며 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애쓰는 아이, 생떼도 잘 부르고 소리도 엄청 지르지만 그래도 너무나 다정한 아이. 유치원 가고 사회생활 시작하면 너 소리는 덜 지르겠지. 그렇게 믿고 있으마.
후쿠오카에서 맞은 둘째의 네번째 생일
드디어 후쿠오카에 유명한 아쿠아리움, 마린 월드에 갔다. 돌고래쇼가 당연 하이라이트였다. 남편과 예전에 골드코스트 씨월드에서 돌고래쇼를 본 적이 있는 데 그게 거의 10년 전이니 정말 오랜만이고, 우리 가족이 다 같이 본 건 처음이었다. 애들도 엄청 집중해서 잘 보고, 돌고래쇼를 하는 장소도 뒤에 바다를 배경으로 하니 더 멋졌다. 조련사가 물에 다이빙하고 돌고래와 같이 수영, 점프하고 춤도 추는 내용이었는데 그중에 한 분이 할아버지셨다. 꽤 연세가 있어 보이셨는데 제일 많이 웃으시고, 춤도 제일 활발하게 추시고, 다이빙도 하시는 걸 보면서, 남편과 나도 나이가 들어도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건 저렇게 멋진 거라고 얘기했다. 우리도 그렇게 늙어가길. 그리고 나중에 우연히 돌고래 있는 곳을 지나갔는데, 돌고래가 가까이 다가오는 장면을 영상으로 남겼는데, 그 순간이 슬로우 모션으로 기억이 남았다. 돌고래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적이 없었는데, 돌고래는 어쩜 저리 선하고 순하고 이쁘게 생겼는지 보기만 해도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다.
돌고래를 이렇게 가까이 본 적은 처음이다. 너무 이쁘다!
예정에 없던 모모치 비치에 가게 된 건, 순전히 보트를 타기로 결정해서였다. 마린월드에서 보트 타는 장소가 1분 거리여서 보트 타러 갔는데 애들이 정말 좋아했다. 보트 타고 20분 정도 되니 비치에 도착했다. 계획에 없던 후쿠오카 타워까지 구경하고, 저녁도 비치에서 애들 놀게 하고 각자 먹고 싶은 거 사 와서 먹었다. 그러다가 소나기가 엄청 내려서 난리 부르스였다. 이 정도면 그냥 숙소로 돌아갈 법도 한데, 엄청난 인파가 모이는 걸로 보아 무슨 이벤트가 있는 거 같아서 보니 가을 축제여서 불꽃놀이를 한다는 거였다. 남편의 열정으로 불꽃놀이까지 좀 보고, 엄청난 인파와 함께 걷고 또 걸어서 전철역 도착해서 전철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웬만한 사람들은 이틀 걸릴 코스를 하루에 끝내버린 하드코어 한 날이었다.
모모치 비치와 후쿠오카 타워
일본에 와서 처음으로 나 혼자 아이들 데리고 유모차 끌고 전철을 타고 실내 놀이터를 갔다. 하카타역에서 유모차 들고 티켓 사고 땀냄새, 파스 냄새 풍기며 전철을 타니 그제야 좀 마음이 놓였다. 붐비지 않고 애들이 앉아서 갈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역에 도착하니, 하카타역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정감 가는 역이어서 너무 좋았다. 역에서 15분 걸어서 실내 놀이터 도착했는데 가는 길에도 별로 사람들도 없고 로컬 사람들만 있는 지역인 거 같았다. 실내놀이터 도착했는데 현금만 받는다고 해서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와 ATM에서 돈을 꺼내려고 했는데 정말 거짓말 안 하고 20번을 시도했나, 카드를 여러 개 시도해 봐도 되지 않아서 완전 멘붕이었다. 옆에서 첫째 아들은 실내 놀이터 못 가는 줄 알고 울기 시작했다. 30분이 지났나, 쇼핑몰 여기저기 걷다가 구석에 있는 ATM에서 겨우 현금 찾아서 실내 놀이터에 갔다. 엄마가 속으로 간절하게 기도했다고 하니까 첫째 아들도 자기도 기도했다며 눈물에 젖은 눈을 닦았다. 우여곡절 끝에 간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고, 저녁에는 일 끝난 아빠랑 만나 하카타역에서 만났다. 디저트는 매번 지나가면서 줄이 너무 길어 가지 않았던 곳에서 포장해서 왔는데, 와 진짜 맛있다. 왜 그렇게 사람들이 줄 섰는지 이해되는 맛이었다.
혼자 생고생한 날이지만 지나보니 그리운 순간들. 그리고 너무 맛있었던 디저트
혼자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카페를 찾았는데 약간 바 같이 생긴 테이블에 앉으라고 하셨다. 그런 바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글을 쓰는데, 그 앞에서 카페 주인이 시끄럽지 않게 본인의 일을 하시는데 뭔가 마음이 차분해진다. 날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용히 일하시는 소리가 들리는데 갑자기 무라카미 하루키가 생각난다. 원체 그의 소설에는 카페는 아니지만 이런 바가 자주 나오니까 뭔가 그 사람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온 기분이다. 후쿠오카는 정말 마음에 든다. 무지하게 깨끗하고 엄청나게 조용하고 이상하게 고즈넉한 분위기가 있다. 가장 인상적인 건, 사람들의 친절함이다. 길 건너다가 차가 양보해 주는 건 당연하고 그러다가 눈을 마주치면 양보해 준 그 운전자가 먼저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어디를 가도 다들 상냥하게 웃고, 본인의 의무 이상으로 선뜻 호의를 베푼다. 그게 당연한 게 아니란 걸 여행하면서 느껴서 더욱더 후쿠오카가 좋아진다. 하카타역 주변에 번화가에서 기찻길을 따라 걸으면 우리 숙소가 나온다. 구글 지도를 보고 걸어도 길을 잃는 길치인 나에게, 기찻길을 따라 걸어가면 숙소가 나온다는 점은 상당히 편리하다. 어쨌든 기찻길을 걷다 보면, 이런데 레스토랑이나 카페가 있을까 싶은 곳에 숨은 그림 찾기 하는 것처럼 이렇게 있다. 식당이 있다고, 카페가 있다고 소문내지 않고 그냥 아는 사람만 왔다 갔다 하는 분위기라고나 할까. 그래서 고즈넉한 동네를 걷는데 번잡한 하카타역 부근이나, 텐진 근처를 걷는 것보다 훨씬 마음이 편해지고 좋았다.
하카타역은 신칸센도 있고 공항철도도 있어 엄청나게 붐비지만 10분-15분 정도 떨어진 숙소 근처는 그리 멀지 않은데 번화한 느낌이 사라진다. 그래서 좋다. 기찻길을 따라가면 기찻길과 그 사이사이에 있는 터널이 몇 개 나온다. 지나가다 터널과 건널목들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기찻길 옆이라 소음이 심한 게 아니라 적당한 소음에, 정감 가는 건널목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뭔가 이런 풍경이 주는 평안함이 있다. 걸어가다 보면 간판도 없는 카페나 조그마한 식당들이 있다. 이런데 이런 쿨한 곳이 있나 싶은 곳들이 곳곳에 숨어있고 그걸 찾았을 때 기쁨이 상당하다. 어느 날, 아이들이 모래놀이하며 놀이터에 놀고 있는 동안 30분의 휴식을 얻어 브라운 슈가 아인슈페너를 마시며 오랜만에 브런치 글을 썼다. 한국에 있었을 때 몇몇의 친구들이 브런치 글 계속 썼으면 좋겠다고 격려와 응원해 준 덕분에 잠시 잊고 지냈고, 게으르고 시간이 없어서 미뤄두었던 글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3주 가까이 지낸 숙소 동네. 걸으면 걸을수록 뭔가 새로운 걸 발견할 수 있었던 곳.
한국에 있을 때 잠깐 서점에 갔는데 그곳에서 브런치 작가들이 출판한 책들의 특별전을 하고 있어서 신기하다, 글을 다시 쓰라는 싸인인 건가 생각도 했더랬다. 근데 생각만 하고 한참을 쓰지 못하고 있었는데 일본에 오니 만날 사람 한 명도 없으니 외로움을 글로 달래고 있다. 모든 일에는 장단점이 있으니, 나의 허한 마음은 결국 글로 채워지고 있으니 다행이다싶다. 글 쓰는 건,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차례로 정리해서 서랍에 딱딱 정리하는 기분이 들어 스트레스도 풀리고, 내 심란한 정서에도 상당한 도움이 된다. 내 주변만 봐도 나보다 글 잘 쓰는 사람이 워낙 많고, 실력이 없는데 글을 쓰는 게 쑥스러울 때가 많지만, 나의 경험은 누군가가 대신 써줄 순 없으니,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연습을 하다 보면 나아질 거란 기대를 갖고 느리지만 천천히 쓰기로 다시 결심을 한 것이다. 여행을 하면서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그 장소를 기억하는 것처럼, 내 마음에 글을 쓰며 오늘을 추억한다. 카메라로 사진을 찍듯이 내 마음에 글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