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면지

물건백써 #15 물건 백 가지에 대해 써 봄.

by 숲일생활


얼마 전, 출장을 갔을 때의 일이다.


방위 산업과 관련된 비딩에 참여하게 돼 프레젠테이션차 모 국방 관련 시설을 찾았다. 이미 한 주 전에 제안서 접수를 위해 방문했던 곳이라 그다지 어렵지 않게 건물 주변에 주차를 하고, 동료와 함께 1층으로 들어섰다. 지난 접수 때는 대부분의 절차가 로비에 마련된 별도의 대기실에서 진행됐던 터라, 그날은 건물 내부의 업무동에 처음 들어가 보는 날이기도 했다.


출입을 위해 신분증을 내고 이런저런 등록 절차를 밟고 있는데, 보안을 담당하시는 분으로부터 예상치 못한 안내를 받게 되었다.


“건물 내부에서는 항상 방문증을 착용해 주세요. 그리고 갖고 오신 전자기기는 뒤에 보이는 보관함에 꼭 넣고 들어가세요.”

“네? 사전에 그런 안내를 받질 못했는데요.”


나의 당황스러운 반응에 그분은 시설 성격상 사전에 승인과 등록을 받지 않고서는 스마트폰은 물론, USB 메모리와 같은 저장매체도 반입이 불가능하다며 입구 옆에 떡하니 세워진 배너를 가리켰다. 지난 제안서 접수 때는 미처 보지 못한 배너와 거기에 적힌 문구들이 그제야 눈에 띄었다.


‘저장 기능이 있는 전자기기와 저장매체는 정보 유출의 위험을 막고자 반입을 금지합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일순 바보 모드가 되면서, 저장 기능이 있는 전자기기가 뭐가 있지, 하고 잠시 멍해졌다. 하지만 이내 그럴 필요도 없이 배너 하단에 사실적인 아이콘으로 그려진 스마트폰과 태블릿 PC, 노트북, USB, CD 등이 눈에 들어왔다.


난감할 따름이었다. 대부분의 프레젠테이션 자료와 오늘 말할 주요한 내용들이 정리된 문서가 태블릿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프레젠테이션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사람은 아니라서, 보통은 평가 전날에 내가 말할 내용들을 따로 정리해 놓는 편이다.


특히나 그날은 첨단 기술을 매개로 한 각종 방위 산업과 같은 전문적인 분야를 설명(물론 심사위원들이 나보다 더 전문가들이겠지만, 해당 분야에 대한 우리의 충분한 이해를 어필해야 하므로)해야 했고, 무엇보다 최근에 프레젠테이션이 여럿 겹치면서 시장 현황이나 정량적인 수치, 관련 산업의 특수한 용어들까지 일일이 외우기에는 시간이 많이 모자란 상황이었다.


당황스러움으로 주저하고 있는 우리 뒤에는 마찬가지로 출입하려는 사람들이 적잖게 있었기에, 우선은 건물 밖으로 다시 나왔다. 그리고 잠시 어수선한 마음을 다잡은 후, 이번 평가의 진행을 담당하는 실무자에게 전화부터 걸었다. 상황을 설명하고 이곳을 처음 출입하는 입장으로서의 이런저런 난처함을 최대한 어필해 보았으나, 예의 공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이들 특유의 점잖고도 건조한 답변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오늘 PT를 위한 자료는 전날 보내주신 제안자료로 이미 세팅을 해뒀습니다. 저희 업무 특성상 보안을 위한 조치고, 모든 제안사들한테 동일하게 적용되는 부분이니, 양해해 주세요.”


동행한 동료의 우려 섞인 표정을 보자, 이건 내가 괜히 길게 억울해할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다시 건물로 들어와 대기 줄로 들어서니, 이미 출입 수속을 마치고 대기실에 앉아 있는 다른 제안사 관계자들이 보였다. 그들은 우리와 달리 이곳 출입이 처음이 아닌 듯, 나와 같은 당황스러움이나 곤란함을 나타내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침착하고 무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 입구에 떡하니 배너까지 세워뒀는데, 지난번에 못 발견한 내 잘못이지, 뭐. 이제 와서 따져본들 어쩌겠어.’


한편으론 자기들 건물에 처음 출입하는 이들에게 친절함과 섬세함은 다소 떨어질지언정, 그들 업무의 근간이 되어야 할 보안과 안전, 방어적 체계만큼은 견고하게 세워져 있구나, 하는 이 난감한 상황에 어울리지도 않는 관조적인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결국 체념하곤 신분증과 각종 전자기기를 하나둘 내어놓았다. 스마트 워치도 두고 가야 한다는 말에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까지 풀어야만 했던 우리는 그렇게 졸지에 한 칸짜리 대기실 안에서 예정에도 없던 디지털 디톡스 체험에 나섰다.




하지만 내가 마주한 진짜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스마트폰 없는 지금이 너무 어색하다는 동료의 소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대기실에 앉아 묘연하기만 한 오늘의 발표 내용을 하나씩 되새겨볼수록, ‘이거 큰일인데’하는 생각이 엄습해 왔다. 내가 아무리 임기응변을 발휘한다고 한들, 동료들이 일주일 내내 어렵사리 준비한 모든 내용들을 충실하고도 임팩트 있게, 그리고 후회 없이 제대로 다 말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몰려왔다.


이대로는 안 되겠단 생각에 머릿속 이야기들에 대한 정리가 좀 필요하겠다 싶어, 필기를 하려는데 아뿔싸, 볼펜도 노트도 다 차에 두고 왔음을 알아차렸다. 내 손에 남은 건 혹시 몰라 출력해 온 제안요청서, 다시 말해 이면지뿐. 그나마 다행히도 함께 간 동료가 볼펜은 갖고 있었다. 이제 확인해야 할 것은 남은 시간이었다.


그날 우리는 세 번째 순서였고, 우리 앞의 두 팀 중 첫 번째 팀이 방금 먼저 올라간 상태였다. 그렇다면 대략 40, 50분 정도가 남은 셈이었다. 주저할 시간이 없었다. 제안요청서를 뒤집어 뒷면의 백지를 펼쳐놓고 생각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차분히 도입부부터, 특히 입에 잘 붙지 않았던, 기관 현황과 시장 변동 상황, 이번 제안의 핵심 요소 등을 키워드 중심으로 적어 내려갔다. 적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며 이제 올라가야 된다고 할까 봐 중간중간 대기실 문을 훔쳐보면서.


그렇게 A4 네 장 정도를 부랴부랴 쓰고 있는데, 뭔가 이 상황 자체가 웃기기도 했고, 이렇게 헐레벌떡 손으로 무언가 적는 게 얼마 만인가 싶기도 했다. 그리고 이 순간, 내 눈앞의 이면지가 수영 못하는 나의 튜브이자, 보일러가 고장이 난 집의 한 장뿐인 이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판에는 문장이라기보다는 단어와 도형들이 난무하는 일종의 낙서가 펼쳐지기도 했는데, 그렇다 보니 정말 중요한 내용 위주로만 이야기해야겠다는, 이를테면 어떤 불가항력적인 요약, 정리가 머릿속에서 급속도로 이뤄지기도 했다.


휘뚜루마뚜루 이면지에 생각들을 난타하고, 속독하듯 눈으로 훑고 있는데, 그 순간 문이 열리며 우리를 호출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마치 계체량을 간신히 통과한 복서가 링에 오르기 전 이제야 겨우 이온 음료 한 모금을 삼키려 하는데, 눈치도 없이 이제 올라갈 시간이라며 채근에 채근을 거듭하는 레프리의 음성과도 같은 것이었다.


모든 전자제품을 다 제출했기에, 체내의 전기신호 말곤 우리가 몸에 지닌 전자적 요소는 전혀 없었지만, 그럼에도 보안 검색은 이뤄졌다. 마치 공항에 온 것만 같았다. 게이트를 통과하고 실무자 분의 안내로 엘리베이터에 탔다. 삼엄한 경비 탓인지 우리를 안내하는 그도 근엄한 침묵을 유지했다.


내 딴에는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본답시고 주변 지리와 날씨 이야기를 넌지시 던졌지만, ‘아, 네’ 정도의 짤막한 대답만이 이어져서 나 또한 금세 입을 다물었다. 생전 하지 않던, 갑작스러운 수기(手記)로 잔뜩 뻐근해진 손가락 마디마디를 주무르면서.


그리하여 시작된 프레젠테이션은 생각보다 맥이 빠지는 분위기였다. 생각 이상으로 심사위원들의 반응이 무미건조해서(물론 우리가 준비한 내용이 무미건조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반나절 동안 우리 같은 사람들로부터 엇비슷한 내용을 들어야 하는 그들 아닌가.), 나도 그토록 어렵게 적어간 이면지의 내용들을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내려놓고 하고 싶은 말을 편안하게 했다. 프레젠테이션이 끝나고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에는 몇 나오지도 않은 질문에 절박함과 의욕을 가득 담아 답변을 했다. 그렇게 정해진 시간을 모두 마치고, 나와 동료는 평가장을 나왔다.


건물을 나와 결과가 어떨 거 같냐는 동료의 질문에 난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대신 오늘은 사무실에 바로 들어가지 말고 어디 가서 시원한 커피라도 한 잔 마시자고 제안했다. 다른 어떤 출장 때보다도 진이 많이 빠져서 아주 차고 단 것이 당긴다고 덧붙였다.




다음날 출근해서, 가방 안에서 태블릿을 꺼내다가 잔뜩 구겨진 그 문제의 이면지를 발견했다. 나 아니면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못난 글씨들이 종이 한가득 빼곡히 적혀 있었다. 진땀을 뺐던 어제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어릴 때, 나는 이면지의 이면이 ‘얼굴이 둘(二面)’이라는 뜻인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내게 소묘를 처음 가르쳐주신 선생님께서 첫 수업 때 알려준 것이, 종이의 앞뒷면을 구분하는 방법이었다.(아는 분도 있겠지만, A4 용지를 포함한 세상 모든 종이에는 앞뒷면이 있다. 보통 앞면이 조금 더 보드랍고, 손의 촉감으로 구분이 어려울 땐 불빛에 비춰보면 뒷면이 조금 더 요철이 보인다.) 이면지의 이면(裏面)이 바깥에 드러나지 않는 부분, 겉으로 나타나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뒷부분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아무튼 그렇게 뒷면에 쓰인 못난 내 글씨를 잠시 보다가 앞장에 적힌 제안요청서를 다시 들여다봤다. 이 문서의 앞 얼굴이라 할 만한 것들이 적혀 있었다. 돈과 시간, 장소, 그리고 이 일의 중요성과 막중함이. 나도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할 때는 그 앞 얼굴 앞에서 무척이나 경직되고 무거워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그것이 그렇게 솔직한 감정이었는지, 그리고 책무라는 사실 외에 나한테 어떤 큰 의미였는가에 대해서는 대답할 자신이 없다.


다시 뒷장에 적힌 악필을 들여다봤다. 긴장과 걱정, 미숙함과 치열함이 휘갈겨 쓴 단어와 문장들 사이에서 모락모락 김을 피우고 있었다. 늘 애써 태연한 척을 하고 있지만, 남들에게 보여준 적이 없었던 그런 감정과 기분이 거기에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그건 심지어 나조차도 자주 들여다보지 못했던 무엇들이었다.


퇴근 무렵, 다른 이면지들과 함께 그 흔적을 정리하려다가, L자 파일에 그것을 잘 넣어 도로 가방에 집어넣었다. 능숙한 척, 괜찮은 척만 하는 얄미운 나에게 이따금 이것이 너의 진짜 얼굴이야, 하고 보여줘야겠다는 심산으로.


그리고 앞으론 어디를 가든지 볼펜 한 자루와 자그마한 노트 한 권쯤은 꼭 챙겨 다녀야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면서.

keyword
작가의 이전글반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