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

물건백써 #16 물건 백 가지에 대해 써 봄.

by 숲일생활


필자는 대략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안경을 써왔다. 그리고 엄살이 심한 성격 탓에 다들 애용한다는 그 흔한 렌즈조차 끼지 않는다. 주변에 숱한 이들이 라식과 라섹의 강을 담대히 건너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2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꿋꿋이 안경인의 삶을 살고 있다.


아래는 그런 내가 몸소 느낀 안경의 좋은 점과 나쁜 점들이다. 덧붙이자면, 각자의 해석을 존중해 무엇이 좋은 점이고 나쁜 점인지는 따로 표시하지 않았다. 아울러 이 명단은 추후에 충분히 수정, 변경, 보완, 철회될 수 있음을 밝힌다.




1. 원래 못생긴 것임에도 '안경을 써서 그래', 라고 말할 수 있다.


2. 원래 못생긴 것임에도 '안경을 벗어서 그래', 라고 말할 수 있다.


3. 목욕탕에서 모르는 이에게 반갑게 아는 척을 할 수 있다.(의도와 상관없이)


4. 마찬가지로 목욕탕에서 의도와 무관하게 아는 사람을 무시하게 될 수도 있다.


5. 축구하는 날, 안경 탓을 하며 골키퍼 제안을 거부할 수 있다.


6. 농구 경기 중, 팔꿈치에 얼굴을 맞으면 훨씬 더 큰 리액션과 함께 반칙까지 이끌어낼 수 있다.


7. 눈앞에 보기 싫거나 거슬리는 것들이 있으면 안경을 벗는 것만으로도 시각적 뮤트, 이를테면 '시소거(視消去)'가 가능해진다.


8. TV, 극장, 공연장, 결혼식장, 각종 행사 등에서 잠시 안경을 닦다가 눈앞에서 결정적인 장면을 놓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9. 아주 가끔, 공부 잘할 것 같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10. 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11. 안경테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꽤 큰 기분의 전환을 만끽할 수 있다.


12. 라고 하지만, 매번 쓰던 디자인만을 고집하는 어떤 굴레에 갇힐 수도 있다.


13. 남들보다 큰 얼굴을 어느 정도 커버할 수 있다.


14. 그래서 항상 큰 안경을 골라야 한다.


15. 안경을 쓰는 연예인들과 닮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16. 그것이 어떤 연예인인지는 스스로 정할 수 없다.


17. 누군가 내 이름이나 얼굴을 잊었을 때, 나를 특정하는 매개체가 된다.


18. 반대로 안경 낀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나를 찾기가 어려워진다.


19. 무리에서 유일하게 안경을 쓰는 사람일 때는 나만의 개성을 가지게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20. 반면에 친구가 나와 너무 비슷한 안경을 쓰고 있으면 어쩐지 기분이 묘해진다.


21. (본인은 싫다고 하셨지만) 안경을 쓰시는 어머니의 특성을 물려받은 것 같아 우쭐해질 때가 있었다.


22. 딸이 눈이 나빠져 안경을 맞췄을 때, 내 탓, 혹은 내 유전자 탓인 것만 같아 침울해졌다.


23. 일하는 와중에 안경을 벗고 마른세수를 하고 있으면, 사람들이 먼저 말을 잘 걸지 않는다.


24. 자기 전에 안경을 벗으면 책이든 스마트폰이든 잘 보이지 않아 쉽사리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


25. 사실 나는 안경을 쓰든 벗든 베개에 머리를 대면 바로 잘 수 있다.


26. 모든 자연 풍경을 두 가지 모드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믿기 어렵겠지만 둘 다 볼만하다.


27. 달리기처럼 움직임이 많거나 땀이 많이 흐르는 활동을 할 때, 안경을 벗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해방감과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28. 땀으로 소금기가 묻은 안경을 닦을 때면 안경 세탁기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발명가적 발상을 얻을 수 있다.


29. 거울 속 내가 보기 싫을 때는 그냥 안경을 벗고 욕실에 들어가면 된다.


30. 안경 없이 여드름을 짜려고 할 때, 자칫 여물지 않은 것을 건드려 화근을 키울 수 있다.


31. 아이들에게 안경을 쓰고 벗는 것만으로도 웃음을 유발할 수 있다.(아, 이건 안경이 아니고 내 얼굴 때문인…)


32. 아이들과 갑작스러운 몸놀이를 할 때, 늘 ‘아, 잠깐. 안경’이라고 말하며 벗어두어야 한다.


34. 얕은 물에서 물놀이를 할 때는 수경이 따로 필요 없다.


35. 대신 나와서 평소보다 두세 배는 열심히 닦아야 한다.


36. 미세먼지나 꽃가루가 심할 때 눈을 보호할 수 있다.


37. 그 시기에는 여분의 안경 닦이를 항상 구비해두어야 한다.


38. 모르는 사람과 처음 만나야 할 때 안경 낀 사람이라고 말하면 나를 쉽게 찾는다.


39. 하지만 그 사람은 대개 안경보다 수염으로 나를 기억한다.


40. 아내가 받고 싶은 생일선물을 물어보면 고민할 필요가 없다.


41. 삼겹살을 굽거나 기름이 많이 튀는 요리를 할 때 눈을 보호할 수 있다.


42. 고로, 요리가 끝난 후에 설거지와 함께 안경을 공들여 닦는 시간이 필요하다.


43. 책갈피가 없을 때, 책을 뒤집어 놓고 싶지 않을 때면 잠시 책갈피로 쓸 수 있다.


44. 볼록 렌즈와 오목 렌즈의 원리를 직접 경험할 수 있다.


45. 하지만 그것은 과학시험 성적과는 무관하다.


46. 못된 눈매를 그나마 순하게 보일 수 있도록 도와준다.


47. 햇볕이 강한 날에는 자외선으로부터 눈을 보호할 수 있다.


48. 얼굴까지는 보호할 수가 없어서 여름에는 항상 관자놀이에 하얀 선이 있다.


49. (딸은 싫어할 수도 있겠지만) 어머니와 나의 공통점이, 이제는 나와 딸의 공통점이 되었다.


50. 안경이 피부에 닿는 부분은 트러블이 쉽게 생긴다.


51. 하지만 안경으로 트러블을 가리기도 한다.


52. 눈물이 날 때, 안경에 가려져 남들이 잘 모른다(고 착각할 수 있다).


53. 눈이 부었을 때 꽤 유용하다.


54. 그러나 나는 눈이 원래 작아서 보기에 큰 차이가 없고, 다른 이들도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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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 of list. 결정적으로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좋은 핑계가 되어준다.




한도 끝도 없이 쓸 수 있지만, 쓰는 이에게도 읽는 분에게도 그다지 건설적인 시간이 되지는 않을 것 같아, 오늘은 이만 줄이도록 하겠다.


아마도 나는 남은 생 또한 늘 안경을 쓰고 살 것이다.


그러니, 다음에 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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