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백써 #14 물건 백 가지에 대해 써 봄.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더위 먹어도 난 몰라.”
아침부터 어수선한 소리가 들려 거실로 나와보니, 웬일로 아들과 아내가 실랑이 중이다. 뭔가 싶어 둘 사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역시나 예상했던 물건, ‘반바지’가 놓여 있다.
순하디 순한 아들 녀석은 이제껏 키우면서 크게 목소리 높일 일이 별로 없었는데, 당연한 일이겠지만 열 살이 넘은 무렵부터는 그 나름의 고집 같은 것들이 마음 여기저기에 싹을 틔우면서, 생활 사이사이에 크고 작은 ‘하지 않겠다’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게 바로 외출할 때 ‘반바지 입기’다. 내 기억으로 우리 아들이 5부나 7부 정도 되는 반바지를 그나마 잘 입었던 건, 어린이집을 다니던 시절쯤이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옷 자체를 자기 손으로 온전히 입기조차 어려워했었고, 실제로도 대부분의 옷을 나와 아내 손으로 입혀줘야 했던, 그런 미숙하고도 귀여운 한때가 있었다.
그러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본격적으로 스스로 옷장에서 옷을 꺼내 챙겨 입게 되면서부터는, 반바지라 불리는 옷의 한 종류는 차츰 아들의 취향으로부터 멀어져만 갔다. 그리고 열 살 정도에 이른 순간부터는 냉정하고도 철저하게 그의 선택에서 배제되는, 이상 고온이 거듭되는 최근의 날씨 속에서 부모로서는 몹시 안타까운, 그러한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물론 잠시만 뛰어놀아도 머리카락이 흠뻑 젖곤 하는 딸아이와 달리 아들은 더위도 많이 타지 않고, 체질상 땀도 그다지 많이 흘리는 편이 아니다. 기질 또한 차분하고 점잖아서 또래 아이들과 같이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주는 편도 아닌지라, 내가 보아도 녀석은 어쩐지 반바지보다는 차라리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도 우아한 몸짓을 드러낼 수 있는 나팔바지나 삼복더위에 양반네들이 입을 법한, 삼베로 된 통이 너른 긴바지가 어울리겠다 싶을 때도 있다.
지금 녀석이 반바지를 거부하는 명확한 이유(그냥 싫어요, 라고 말하긴 했다.)를 나로서는 알 수 없다. 한편으론 보기에 답답하다고 해서 마냥 나무랄 수도 없는 것이,
나 또한 그랬다.
그 또래에는 나도 반바지를 입지 않았다.
아니, 무척 싫어했다.
아들과 마찬가지로 부모님이 내 옷을 고르고 입혀주시던 시절엔 나도 당연히 반바지를 입었다. 그러나 열한두 살 무렵, 딱 우리 아들 나이 정도가 되고서부터는 반바지에 점점 거부감을 느꼈다. 아무리 무더운 날씨라도 어지간하면 발목까지 내려오는 청바지나 면바지를 고집했었는데, 아마 우리 부모님도 그런 내가 못내 못마땅하셨을 거다. 그렇지만 지금 나와 아내가 아들에게 별도리 없음을 느끼듯, 본인이 괜찮다는데, 그리고 덥지 않다는데 어쩌겠는가.
여하튼 반바지에 거부권을 행사하는 아들의 공식 입장을 한번 헤아려 보고자, 당시 나의 거부 사유를 곰곰이 되돌아보았다.
첫 번째는 아마도, ‘안전하다는 느낌’ 때문이었을 거다. 누구나 그렇듯 코흘리개 시절엔 함부로 놀고, 함부로 뛰고, 함부로 오른다. 그렇다 보니 무릎이 성할 날이 많지 않은데, 여름에 반바지를 입고 놀이터나 운동장에서 뛰어놀다가 시원스레 자빠지고 나서는, 무릎에 얇은 격자무늬의 출혈과 그 위로 내려앉은 모래 먼지를 바라보며, 크레셴도로 동네가 떠나가라 ‘엄마!’를 외쳤던 기억들이 다들 한 번쯤은 있으실 거다.
내 유년의 기억 속엔 그런 이미지의 파편들이 꽤 많은데, 어느 날은 드물게도 평소 답답해서 입기 싫었던 빳빳한 청바지를 어머니의 강요로 입고 나갔다가,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술래잡기 중 맨땅에 슬라이딩을 해버렸다. 통증과 별개로(보통 아이들은 아파서 울기보다는 피를 보고선 울음의 포문을 열기 마련이다.) 또 상처가 났겠다 싶어 울상을 하고선 조심스레 바짓단을 올려보는데, 이게 웬걸? 살짝 까진 티만 나고 무릎이 멀쩡한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유레카’다 싶었다. 아마 부모님도 야외에서 역동적으로 놀 때는 긴바지가 더 낫다는 사실을 평소에 충분히 설파하셨겠지만, 귀로 듣는 것이 몸소 체험하는 것을 결코 능가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 경험은 열 살 남짓 살아온 당시의 나에게 꽤 중요한 체험이자, 기억해 두어야 할 삶의 노하우로 자리 잡게 되었다.
특히 유년기에 이사를 많이 다닌 나로서는 새로 이사를 간 동네에선 어쩔 수 없이 소극적이고 내향적인 태도가 드러날 수밖에 없었는데, 아직 잘 모르는 동네에서, 마찬가지로 미지(未知) 투성이인 사람들 앞에서 넘어져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어린 나로서도 난처하기도 했을 것이며, 지리도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집으로 급히 돌아가는 것도 여의찮았을 걸로 짐작이 된다.
그러한 배경을 두고, 그때의 나에게 긴바지는 ‘조금 불편하지만 그래도 안전한 것’, 반바지는 어쩌면 ‘겉으론 편안함이란 미소를 띠고 있지만, 실은 그 속에 검은 위험이 도사리는, 쉬이 방심해선 안 될 물건’쯤으로 인식되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두 번째 이유는 슬슬 사춘기의 문턱에 이른 나이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아직 어린이임에도 ‘나는 이제 어린이가 아님’을 표방하고 싶은 의식이 바로 그것이다. 보통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나는 곧 중학생이 되고, 형편상 지금은 초등학교 코찔찔이들과 같은 학교에 몸담고 있긴 하지만 그들과 나의 처지, 입장은 근본적으로 확연히 다르다고 자부하는, 이를테면 일종의 ‘계층의식’이 형성되게 되는데(압니다. 몹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강렬한 행동양식이 바로 ‘어려 보여선 안 돼’류의 자기 암시다. 반바지가 뭐 그렇게 ‘어려 보임’의 상징이겠냐고 되묻는 분도 계시겠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복장을 스스로 고르기 어려운 나이에는 보통 여름에 부모가 입으라고 하는 옷을 입기 마련이다. 그런데 날씨와 무관하게 자기 선택으로 긴바지를 입었다면, 그 행동 자체만으로도 나는 이제 독립성과 주체성을 인정받고 있음을 친구들과 주변에 보여줄 수 있다는 게, 그 또래에서는 나름 통용되는 ‘암묵적 정설’이었다.
그리고 여러분도 알고 있지 않은가. 어쨌든 어른들보다는 아이들이 반바지를 많이 입는다. 본인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한여름에도 긴바지나 청바지를 입고 돌아다니는 어른들의 모습에서 아이들은 어쩌면 ‘아, 어른은 더워도 저렇게 입고 다니는구나. 그래, 저런 게 바로 어른이구나’하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패션은 잘 모르지만, 반바지를 입으면 좀 더 캐주얼하고 영해 보이는 건 맞는 것 같다. 물론 기를 쓰고 어려 보이고 싶어 한다면, 그 사실만으로도 이미 그 사람은 나이 들었음을 증명하는 셈이 돼버리겠지만.)
세 번째는 몸의 변화다. 몸에 털이 나기 시작하고, 체형이 아이에서 어른으로 차츰 바뀌어 나가기 시작하면, 성장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인정하기보다는 불안과 우울, 경우에 따라서는 약간의 자기혐오를 느낄 수도 있다. 물론 호르몬의 영향일 것이고, 누구나 그 과도기를 적절히 잘 넘기기도 하겠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불안정한 상태의 내 몸을 남한테 쉽사리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던 것 같다.
쉽게 말하면 ‘내 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의 단계가 된 것이다. 그렇다고 얼굴(여드름이 나기 시작하면 공공장소에서의 고개 숙임이 또 하나의 기본 스탠스가 된다.)이나 팔까지 다 가릴 순 없으니, 그나마 내 몸의 절반이나마 자연스레 가리고 타인의 시선을 덜 신경 써도 되는, 긴바지에 자꾸 손이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 경우에는 양친이 건강과 장수의 상징인 튼튼한 하체를 물려주셔서, 깡말랐던 하체가 중학생 무렵부터 급격히 우람해졌다. 거기에 자전거 타기가 취미생활이 되면서, 나는 내 다리를 업힐을 힘차게 오를 때나 세트 드럼에서 강력한 베이스 킥을 시도할 때 외에는, 그저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대상으로 여기게 돼, 더욱더 긴바지를 애호하게 되었다.
그 시절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상당히 웃길 거 같은데, 그도 그럴 것이 요즘의 나는 초봄만 되어도 반바지를 꺼내 입는다. 일교차가 심할 때도, 한창 따뜻한 봄기운이 완연할 때도, 상의는 맨투맨이나 바람막이 점퍼로 바뀌더라도 외출할 때 하의는 거의 대부분 무릎 언저리까지 내려오는 반바지를 택한다. 무더운 여름은 당연히 말할 것도 없고, 찬 공기가 완연한 가을이 오기 전까지는 그런 선택들이 쭉 이어지곤 한다.
어쩌다 이런 변화를 맞이했냐면, 우선 예전보다 살이 많이 쪘다. 30대 초반까지는 예전과 비슷한 몸매를 유지했는데, 30대를 거치며 이런저런 군살이 붙다 보니, 체중이 늘고 더위도 많이 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봄에 집에서 실내복으로 입던 반바지를 어쩌다 외출할 때 입어 보니, 그것이 그렇게 상쾌하고 편안할 수가 없었다.
한편으론 그런 생각도 든다. 직장인으로서 한 주 내내 출근을 위해 갖춰진 복장(오해는 말길. 그래도 관용적인 분위기의 디자인 회사를 다니기에 주변의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편히 입고 다니는 편이다.)을 입다 보니, 주말이나 쉬는 시간만큼은 한층 더 가볍고 자유로운 복장을 지향하게 된 게 아닐까, 추측을 해본다.
아무튼 지금도 나의 하체는 어린 시절과 청년기에 그러했던 것처럼 우람하고 털까지 무성하다. 하지만 나는 이제 어엿한 아저씨가 됐고, 그때와는 달리 다른 사람의 시선이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는다. 특히나 두 아이가 생긴 후로는, 바깥 외출 때 몸이 편하고 행동하기에 수월한 옷이 자연스러운 선택지가 되었다.
그런 옷들이 놀아주기도 좋고, 짐을 들고 다닐 때나, 아이들을 안고, 뛰고, 움직이기에도 훨씬 더 편안한 것이 사실이니까. 아, 장거리 운전을 할 때도 하체를 압박하는 긴바지보다는 넉넉한 반바지를 입는 게 피로가 한층 덜하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이제 잘 넘어지지 않으니까.
차라리 넘어진 누군가를 일으켜 세워주거나,
누군가가 넘어지지 않게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는 시간이 더 많아졌으니까.
시간을 거슬러 이렇게 나열해 봤지만, 우리 집 아드님이 반바지를 거부하는 근원적인 이유에 도달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니, 애초에 나와는 완전히 다른 이유로 그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혹시 반바지 입지 않는 아이 때문에 고민 중인 분이 계신다면,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조심스레 조언하건대 너무 걱정하진 마시길.
‘때가 되면 입고, 본인이 정말 더우면 안 입으래도 입습니다. 곧 집안에서 속옷 바람으로 돌아다니는 숭한 모습을 보시게 될 수도 있어요. 그때를 생각하며, 조금만 느긋하게 기다려 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