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백써 #5, 물건 백 가지에 대해 써 봄.
아침 산책에 나선다. 조깅을 하지 않는 날에는 쉬엄쉬엄 동네 한 바퀴를 걷거나 천변 길을 걷고 있다. 아파트 단지를 나와 또 다른 아파트 단지를 지나치며 이런저런 풍경들을 눈에 담는다. 토요일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부지런한 아이들 몇몇은 이미 놀이터에 나와 있다. 스마트폰으로 로제의 <아파트>를 틀어놓고, 자기들끼리 손뼉과 박수를 치며 나로서는 알 수 없는 그런 놀이를 하고 있다. 이 시간에 아침은 먹고 나온 건지 싶다가도, 어른들의 단잠을 깨우기에 충분한 녀석들의 기운찬 목청에 오지랖이 사그라든다. “아파트, 아파트”거리는 소리를 뒤로 하고 새로 난 산책로를 따라서 발길을 옮겼다.
오르막 하나를 넘고 나니 풍경이 또 다르다. 저 멀리 호수가 보이고, 바람이 얼굴에 닿는다. 시야에 들어오는, 동네를 에워싼 산자락도 산들바람에 기지개를 켜는 것만 같다. 고요한 아침 햇살이 보기 좋아 시선을 위로 옮겼다가, 발에 닿는 느낌이 어느새 투박해져 아래를 내려다보니 공사장에 쓰이는 자갈과 모래가 보인다. 무언가 완성된 구역을 벗어나 새로이 짓고, 부수고, 만들어지고 있는 구역에 닿았구나 싶다.
우리 동네는 늘 공사를 한다. 시골 곳곳을 전전하다가 예닐곱 살쯤에 내가 처음 이곳에 왔던 당시에도 그러했다. 광역시(정확하게는 직할시)에 편입되기 전, 이 동네는 곳곳이 포도밭, 과수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어디 가서 어르신들에게 이 동네를 얘기하면, ‘아 거기 포도 많이 나는 곳’이라 말씀하실 정도다. 물론 지금은 동네에 포도밭보다 포도를 파는 마트나 가게가 더 많을 것이다. 여하튼 동네가 광역시에 속하게 되고, 당시 한창이었던 개발붐이 제대로 일면서 우리 동네는 한여름에 돋아난 포도알만큼이나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알알의 사람들만큼, 아파트도 함께 늘어났다.
그때 우리 가족이 살았던 아파트는 우리 동네 최초의, 못해도 두 번째쯤 되는 아파트였던 걸로 기억한다. 기록을 찾아보니 첫 입주가 내가 태어난 80년대 중반쯤이라고 하니, 아마 맞을 것이다. 그때부터도 아파트에 프리미엄한 이미지를 붙이고 싶은 의지는 강했던 건지, 20평 내외의 5층짜리 아파트에 거창하게도 로얄(Royal)이란 이름을 붙였었다.(어린 나는 로얄의 뜻을 정확히는 몰라서, 외할아버지가 약국에서 파시던 로얄젤리가 떠오를 수 밖에 없었는데, 각 호가 다닥다닥 붙은 아파트의 모습이 마치 벌집 같아 보이기도 했던 터라, 아마도 벌꿀과 관련 있는 단어일 것이라 혼자서 억측을 했다.)
최초, 혹은 두 번째라는 구분도 사실 그다지 의미가 없는 것이, 90년대가 시작되자마자 우후죽순으로 다른 아파트가 늘어났다. 그 덕분에 동네에는 늘 포크레인과 크레인이 오갔고, 시멘트 냄새와 모래바람이 떠다니곤 했다. 우리 부모님까지 그러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당시에 내가 본 동네 어른들은 대부분 공사를 좋아하고 반겼다. 새롭게 어떤 구역에서 공사가 시작되면 그것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입에선 ‘많은 게 달라지고, 많은 것이 나아질 것’이라는 말이 자연스레 나왔다. 신도시, 재개발, 토지 보상 같은 말들이 어른들의 입뿐만 아니라 동네 곳곳에 현수막과 전단지로 내걸리던 그런 시절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어른들의 말씀을 귓등으로 들은 것인지, 공사가 너무 싫었다. 늘 다니던 길인데도 어느 때가 되면 출입금지 표시가 붙고, 곳곳이 통제가 되는, 그런 일련의 상황들이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도시로 오기 전, 시골에 살 때는 동네 곳곳과 뒷산, 들판을 마음껏 누볐지만, 도시에선 학교를 마치고 거리를 다닐 때마다 늘 트럭이나 중장비를 조심해야만 했다. 드릴 소리를 비롯한 공사 현장의 소음 때문에 하굣길에 친구랑 이야기를 나누는 것조차 어려워 손짓과 발짓을 섞어 대화를 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무엇보다 마음이 편치 않았던 건, 내 기억 속의 동네가 내가 쫓아가지도 못할 만큼 빠르게 사라진다는 거였다. 하루하루 차곡차곡 쌓여가던 기억들이 무색하게 일순간 가게가 사라지고, 사람들이 이사를 가고, 눈앞의 풍경이 생경하게 바뀌는 것이 어린 내 눈에는 못내 아쉽고, 서운했다. 물론 지금은 그때만큼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거나(당시 내가 다니던, 그때 명칭으로 '국민학교'는 오전, 오후반으로 나눠서 수업을 할 정도였다.) 달마다 새 아파트 공사가 시작되지는 않지만, 동네 주변이 이른바 특구나 특별지역으로 지정되면서 공사 트럭이 오가고, 중장비 소리로 시끌시끌하다는 점만큼은 여전한 편이다.
나도 초등학교 시절에 첫 아파트를 떠나 몇 번의 이사를 더 겪었는데, 훌쩍 자라 돌아왔을 때 내가 살았던 아파트나 자주 가던 문구점, 오락실, 그리고 친구들과 은밀히 드나들던 모종의 비밀공간 같은 것들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내 추억을 점유하는 것들 또한 포도밭을 허물고 그 위에 세워졌건만, 또 다른 재개발과 신축의 파도 앞에서는 견뎌낼 재간이 없었던 모양이다. 이제는 근 30년을 산 동네가 되었지만, 그 기억의 시작에 있었던 것들 중에 지금까지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공간이 자주 바뀌니까, 사람도 자주 떠나고, 그 빈자리에 저마다의 기대를 품은 새로운 사람들이 자주 찾는, 우리 동네는 그런 곳이 되었다. 한편으론 오싹한 기분이 들 때도 있다. 나조차도 그런 것에 익숙해진 것인지, 이제는 동네를 다니다 오래된 무언가를 보게 되면 머지않아 사라질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낡은 간판과 색이 바랜 벽면에서 추억과 애착을 떠올리기보다는 처연한 기분으로 미리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기분이 들 때가 적지 않다.
지금 내가 아이들을 키우며 사는 아파트도 별반 다르진 않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이사를 갈 생각도 없고, 이사를 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지만, 누군가 당신 남은 인생의 배경이 이곳이냐고 물어본다면 선뜻 대답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부지런히 통로를 오가는 부동산 중개인과 서로 만족할 만한 조건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집에 사는 사람’과 ‘집을 살려는 사람’의 어색한 작별인사를 최근 들어 우리 단지에서 부쩍 많이 보았다. 그런 광경을 볼 때면, 가끔은 다들 처음부터 떠날 걸 염두에 두고 이곳에서 살아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집뿐만 아니라, 동네도, 직장도, 관계도 말이다.
그런 마음가짐이 차라리 우리를 조금이나마 덜 불행하게 하는 것인지, 도리어 그것 때문에 어떤 행복에 가닿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지금의 나로서는 선명한 결론이 떠오르지 않는다. 산책의 끝자락, 오래된 아파트의 리모델링을 전문으로 한다는 인테리어 가게 앞에 걸린 ‘공간이 바뀌면 삶이 달라진다’는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내 그것이 숙제 같은 생각들을 던져 준다.
정말, 그저 지금 사는 삶이 좋아서 지금의 공간도 마찬가지로 좋아질 수는 없는 걸까? 아파트에서 아파트로 옮겨 다니는 삶은 정말 괜찮은 걸까? 지금 나를 둘러싼 높다란 아파트 건물에 가려진 또 다른 선택지가 있는 것은 아닐지.
다시 한번, 깊이 고민해 봐야겠다는 다짐을 얻은 아침 산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