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사전에도 포기라는 단어가 있었다.

자유로운 포기 선언을 위하여

by 수신


지인이 복싱을 시작했다. 운동 겸 스트레스 풀 겸 시작했다는데, 하길 참 잘했다고 한다. 이유를 들어보니, ‘못 하겠어요.’라는 말을 할 수 있어서라고. 그녀는 처음 접해보는 강도 높은 운동으로 힘에 부치면 코치님에게 바로 포기 선언을 한다. 그럼 코치님은 끝까지 해보자는 파이팅 없이 바로 다른 운동으로 넘어간다.

성인이 되고 주어진 임무 앞에서 ‘할 수 없다’고 말을 하는 일이 줄어들었다. 특히 직장인이 되고 그랬다. 업무가 떨어지면 그것의 난이도가 어떻든 반드시 해내야 하는 게 나의 몫이었다. 도저히 하지 못할 것 같은 일이어도 그만하겠다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기어코 해내야 했다. 이 세상에 못 할 일은 없어야 했다


상사는 말했다. 못 하겠다는 말을 쉽게 하는 직원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낯선 업무가 주어져 갈피를 못 잡겠어도, 도저히 문제 해결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도, 끝까지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어떻게든 길을 찾아내라고. 함부로 포기 선언을 하는 사람은 영원히 자신의 수준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지 못할 거라는 무서운 말도 덧붙이면서.


살벌한 직장에서 나는 ‘할 수 없어요.’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수준 이상의 일로 버거워서 못 하겠다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라도 다시 꾹 삼켰다. 그 말을 마치 금기어처럼 여기고 입을 앙다물었다. 상사의 말을 되뇌고 명심했다. 덕분에 온갖 스트레스와 책임감은 양어깨 위로 차곡차곡 쌓였고, 그것들은 이후 높은 승모근과 거북목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내 손에 무거운 짐이 들릴 참이면 손을 놓아버렸던, 어려운 일은 미련 없이 회피했던 학창 시절과는 다른 직딩 시절을 보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인에게 복싱은 ‘포기할 수 있는 자유’를 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 달에 10만 원이라는 비용을 지불해서 얻는 해방감일지라도, 그것은 꽤 그녀의 숨통을 트이게 한다. 그만하고 싶을 때 그만둘 수 있는 자유, 더 애쓰지 않을 자유, 힘을 뺄 자유를 누리게 한다. 온통 ‘해내야 한다.’라는 문장으로 점철된 그녀의 일상에 ‘난 이쯤에서 이만 멈추겠소!’를 지체 없이 외칠 수 있는 순간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녀는 코치님께 마음껏 포기 선언을 하면서 오랜만에 생경한 후련함을 느꼈다고 한다.


능력의 한계치를 억지로 늘려야 하는 버거운 일상이 계속된다. 성장을 위한 발판이라는 말에 공감은 하지만 가끔은 높은 벽 앞에 그저 주저앉고 싶다. 굳이 벽을 오르려 애쓰지 않고 다른 곳을 찾아 떠나고 싶다. 저 못 하겠는데요, 라고 산뜻하게 포기 선언을 하고 경쾌하게 발걸음을 돌리는 것이다. 어차피 우리 인생이 버티는 성질의 것이라면 견뎌야 하는 일은 최소한으로 만들 수 없을까. 그럼 언젠가 그곳으로 다시 돌아올 용기도 선뜻 생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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